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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아돌프 아이히만 1906. 3.19. ~ 1962. 5.31. 나찌 당원, 나찌 무장친위대 중령, 홀로코스트 실행책임자 중 한명. 그의 우수한 조직관리 능력과 나찌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심을 높게 평가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동유럽의 게토 및 절멸캠프에 유대인을 이송하는 책임자로 발탁했다. 전후, 적십자의 난민용 여행허가서(laissez-passer)를 사용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아이히만은 신분을 위장하고 현지의 메르세데즈 벤츠사에서 근무했으나 1960년 모사드에게 체포되었다. 이스라엘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인도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를 포함한 15개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1962년 사형당했다. 생애 유년기 아이히만은 독일 서부의 라인란트 솔링겐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루터교 신자였던 아버지 아돌프 카를.. 더보기
프리메라리가의 역사 초창기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대표팀이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스페인에 불어온 축구 붐이 계기가 되어 1927년 4월 아레나스 클럽 데 겟소 구단주 호세 마리아 아카는 스페인에도 국가 수준의 최고리그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리그의 규모와 참가할 팀에 대한 논의 끝에 스페인 왕립 축구협회는 1928년도 스페인 1부 리그에 10개 팀이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프리메라리가가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AT빌바오, 레알 소시에다드, 아레나스 겟소, 레알 우니온이 역대 코파델레이 우승자 자격으로, AT 마드리드와 에스파뇰, 유로파는 코파델레이 준우승으로 원년멤버로 선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라싱 산탄데르가 예선전을 거쳐 1928~29시즌 프리메라리가 멤버로 선발되었다. 첫 시즌에는 바르셀로나가 초대 챔.. 더보기
남북전쟁 16. 서부전역 f. 프랭클린-내쉬빌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여론 악화에 시달리던 링컨에게 애틀랜타 점령 소식은 11월 8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55:45로 재선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워싱턴을 위협하고 있던 남군은 게티스버그에서, 치커모거와 채터누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끝에 이제는 남부의 심장부인 조지아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몰려있었다. 뉴올리언즈 함락 이후 수고인 리치먼드와 함께 남부의 버팀목이었던 애틀랜타의 함락과 맥클랠런을 내세운 민주당의 선거전 패배는 남부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최후의 희망마저도 빼앗아간 결정타였다. 하지만 남부는 아직 중서부 산악지역에서 마지막 희망까지 잃지는 않았다. 후드가 지휘하는 테네시 군은 애틀랜타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맹수가 되어 폐허가 된 도시에 간신히 입성한 북군을 몰아붙이겠.. 더보기
시바 료타로 일본의 소설가. 1923년 8월 7일 ~ 1996년 2월12일. 오사카 출생.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이란 필명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에 이르지 못한다는(遼 ; 멀다, 요원하다) 겸양의 뜻을 담고 있다. 산케이 신문사에 재직하던 중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래 일본의 역사 소설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라 훔친 이야기’, ‘료마가 간다’, ‘언덕위의 구름’ 등의 저서가 유명하며 일본의 전국시대나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다. 또, ‘가도를 간다’를 시작으로 하는 에세이 등을 통해 활발하게 문명 비평을 발표했다. 경력 생애 1923년 8월 7일, 오사카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부친의 둘째 아들로 출생. 할아버지는 효고현 출신으로 현재의 히메지시 히.. 더보기
남북전쟁 17. 서부전역 - g. 바다로의 행군 1864년 겨울, 북군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은 11월 15일, 애틀랜타를 점령한 뒤 남부의 심장인 조지아 주로 부대를 행군시키며 12월 21일 서배너 항을 점령하기 까지 각종 산업시설과 기반시설을 파괴했다. 훗날 총력전 개념으로 알려지게 된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은 남부의 전쟁수행능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함께 남부의 민간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전쟁수행의지를 꺽어버렸다. 행군의 준비 1864년, 셔먼은 5월부터 9월까지 계속된 애틀랜타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부의 심장부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북군 총사령관이던 그랜트와 서부군 사령관 셔먼은 남북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략적, 산업적, 심리적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철저하게 파괴해야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버지니아에서 그.. 더보기
남북전쟁 외전 4. Marching through Georgia 남북전쟁 관련 포스팅이 점점 늦어지고 있는 중에 곁가지를 끄적거려 봅니다. 1절 Bring the good old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4]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옛 나팔을 가져오게 전우여. 함께 노래하리라. 세상을 뒤흔들 혼으로 부른다. 5만 전우가 함께 부르던 그때처럼. 우리가 조지아를 행진할 때에. 후렴 Hurrah! Hurrah! we bring the jubilee! Hurrah! Hurrah! the flag that make.. 더보기
분데스리가의 역사 독일 축구의 출발 분데스리가의 태동은 1932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독립왕국 시절의 지역감정이 남아있어서 지역별로 리그를 만들어 소속팀들끼리 리그전을 치르고 챔피언들끼리 경기를 치르는 체제였는데 독일축구협회장 펠릭스 리네만이 독일 최고의 팀들을 모아 ‘왕국 리그(kingdom league)’를 창설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비록 각 지역 축구협회들이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축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사실 독일에서 축구는 전통적으로 지도층의 구미에 맞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축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잉글랜드의 영향력, 무질서함 등은 독일 지도층이 원하는 ‘건강한 국민’ 육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기계체조나 육.. 더보기
세리에A의 역사 제노아의 시대 1893년 9월 7일, 이탈리아 최초의 축구팀 제노아가 만들어진 이후 19세기의 마지막 10년간 토리노(1894), 운디네세(1896), 유벤투스(1897), 밀란(1899) 등 오늘날까지 유명한 여러 팀들이 태어났다. 이탈리아에는 거의 중세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칼치오의 전통이 있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전파된 축구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 중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된 북서부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898년 3월 16일,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결성되고 같은해 토너먼트 형식의 전 이탈리아 챔피언쉽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축구는 20세기를 맞이한다. 이탈리아 챔피언쉽 첫 대회는 하루만에 끝나는 대회로 각지역 대표들이 출전한 최초의 전국급 대회에서 우승한 제노아는 3회.. 더보기
남북전쟁 외전 3. John Brown's Body 남북전쟁 때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남북군 모두가 많은 군악대를 운용했지만 특히 돈이 많은 북군 군악대가 인기가 좋았다고들 하죠. 스톤리버 전투에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서로를 위해 남군과 북군의 군악대가 곡을 연주해주기도 했다는데요, 남군의 군가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게 딕시랜드라면 북군의 가장 유명한 군가는 ‘John Brown’s Body’일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지만 개신교 신자라면 잘 아는 Battle Hymn of Republic과 같은 곡입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군과… …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라고 하면 더 잘 이해되겠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영광 영광 대한민국~ 이라는 버전이 유명한데 워낙 유명한 곡이다.. 더보기
남북전쟁 외전 2. Yellow rose of Texas 제가 알게된 내용들 중에 링컨 대통령 이야기 다음으로 오래된 남북전쟁 관련 사항이 바로 이 곡입니다. 오늘날에도 미군들이 좋아하는 군가중 하나인 이 곡은 남북전쟁때 부터 유명한 곡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곡을 출판한 Firth, Pond & Co.는 J.K가 Chareles H. Brown을 위해서 편곡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 누가 작곡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미국 역사박물관에는 1836년의 산 자킨토 전투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손으로 적은 유사한 곡의 악보가 보관되어 있긴 합니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텍사스 독립전쟁 당시에 뉴워싱턴 호텔의 여급이었던 흑인 혼혈아 에밀리 D. 웨스트 양이 ‘텍사스의 노란 장미’로, 멕시코군의 사령관이자 대통령이었던 안토니오 로페즈 데 산타 .. 더보기
남북전쟁 외전 1. 피해의 원인 그리스 인들은 전쟁의 신이 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테네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전쟁을 주관하고 아레스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주관했고, 두 신중 어떤 신이 주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성격이 바뀐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전쟁이건 다 그렇지만 내전은 특별히 참혹하고 그 중에서도 남북전쟁은 아레스가 전담하기라도 한 듯이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지지부진하게 길어졌습니다. 남부와 북부 모두 1년내로 끝나리라 예상했던 전쟁은 5년간 60만명이 사망하고 40만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내며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란 것도 인간의 일이라 사회의 변화나 과학기술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듯 남북전쟁에도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남북전쟁의 특징적인 ‘많은 피해, 장기화’에 초점을 놓고 보면 그 .. 더보기
남북전쟁 15. 서부전역 - e. 애틀랜타 작전 빅스버그와 채터누가에서 거둔 승리로 그랜트는 1864년 3월,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이어 미국 역사상 두번째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랜트는 북군 최고 사령관직 취임을 위해 동부로 떠나면서 후임 미시시피 집단군 사령관에 오랜 친구 셔먼을 임명했다. 휘하의 군 사령관 중에서 능력이나 전공으로 가장 우수했던 것은 캠벌랜드 군의 토머스였지만 그에게는 그랜트의 신뢰가 없었다. 16개로 분산되어 있던 북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 시킨 그랜트는 여러방면에서 일제히 공격에 나서 남부가 내선의 이점을 이용할 수 없게 하려는 했다. 스스로는 미드, 버틀러, 시겔을 지휘해 섀넌도어 계곡과 리치몬드를 노리고 리의 북버지니아 군을 상대하는 한편, 나타니엘 뱅크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에 남은 남부의 유일한 항구 모빌을 공략하고 셔먼은 애.. 더보기
남북전쟁 14. 서부전역 - d. 채터누가 전투 스톤 리버에서 거둔 승리로 로스크랜의 컴벌랜드 군은 멀프리스보로를 점령하고 북군이 테네시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후 6개월간 북군은 더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스톤 리버 전투의 피해가 1만 6천명에 달하는 데다가 인구가 적은 산악지대인 이곳에서 보급은 단선철도에 의존했기에 다시금 기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기도 했다. 또, 미시시피의 그랜트는 빅스버그 공략에 나섰고 동부에서는 게티스버그 전투가 다가오는 상황이라 이곳에 지원을 집중시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북군의 다음 목표인 채터누가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계속 지체할 수도 없었다. 테네시강변의 고지대에 위치한 채터누가는 주변 산악지대에 광석이 풍부해 남부의 전쟁수행에 중요한 철광석과 구리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데다가 북쪽으로는 내쉬빌과 녹스빌, 남.. 더보기
남북전쟁 13. 서부전역 - c. 빅스버그 공략 빅스버그는 남부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못이다. - 제퍼슨 데이비스.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쟁 초부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요새 도시 빅스버그야 말로 남북전쟁에 있어 승리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빅스버그는 강이 크게 굽이치는 부분에 있어 수면위로 우뚝 솟은 절벽에 건설된 요새도시로 북쪽과 동쪽으로는 길이 320km너비 80km에 달하는 미시시피 삼각주(야주 삼각주라고도 부른다.)의 늪지대가 펼쳐져 있고 강을 따라 19km 북쪽의 야주 강까지 남군의 포대와 참호가 절벽을 방어하고 있는 천혜의 험지로 ‘미시시피의 지브랄타’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1862년 북부는 해군과의 협력으로 미시시피 강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빅스버그와 그 남쪽에 있는 허드슨 요새만은 북부의 하천 포함대에게 넘을 수 없는 관문이 되었다.. 더보기
남북전쟁 12. 서부전역 - b. 스톤 리버 전투 할렉이 코린스를 점령하자 남부는 6월 27일 테네시군 사령관을 보우리가드에서 브랙스턴 브래그로 교체했다. 켄터키-테네시-미시시피 전역 작전도. 코린스에서 페리빌 전투까지. 코린스 남쪽 미시시피의 투펠로에 주둔중인 테네시군 56,000명을 지휘하게 된 브래그는 테네시에서 남부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치중인 북군과 바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우회기동해서 북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스털링 프라이스 소장과 얼 반 돈 소장에게 일부 병력을 남겨 그랜트와 대치하도록 한 뒤 철도를 이용해 35,000명의 병력을 빠르게 채터누가로 재배치했다. 한편 할렉이 북군 총사령관으로 영전되면서 이 지역의 지휘체계는 그랜트와 뷰엘이 각기 대등한 관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랜트는 .. 더보기
남북전쟁 11. 서부전역 - a. 샤일로 전투 작전지역 서부전역의 무대는 지형적으로는 미시시피 강 동쪽과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사이로 한정되지만 작전적 의미에서는 멕시코만 연안지역이나 동부 연안지역 일부도 포함된다. 전쟁 중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테네시의 채터누가에서 부터 대서양까지 진군한 1964년부터는 전역의 의미가 조지아 주와 캐롤라이나까지 확대되었다. 남부전역 서부전역은 동부전역에 비교해볼때 당대에나 후대에나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부전역에는 양측의 수도가 위치해있고 주요 신문사들이 동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기자들이 취재하기 좋았던 데다가 로버트 E. 리나 스톤월 잭슨 같은 유명한 장군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맥클랠런의 반도작전 중 북군은 서부전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으나 7일전투의 패배는 서부에서 북부가 거둔.. 더보기
남북전쟁 10. 동부전역 - h. 게티스버그 우리가 언덕(리틀 라운드 탑)에 도달했을 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가득한 연기와 불길 너머로 보이는 물웅덩이에는 주인을 잃은 말과 싸우고, 도망치고, 쫓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기는 화약냄새로 가득하고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격선의 외침소리, 덜컥거리는 총소리, 포탄의 폭발음 그리고 부상자들의 비명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마치 밀턴의 실낙원에 나올 듯한 지옥의 모습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 북군 대위 포터 폴리 1863년 6월 로버트 E. 리는 챈슬러스빌의 승리를 발판으로 1862년의 전략을 따라 북부로 진격할 계획을 세운다. 북부로의 진격은 전쟁때문에 피폐해진 버지니아의 농부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북부의 사기를 위협하면서 펜실베니아의 주도인 해리스버그나 볼티모어,.. 더보기
남북전쟁 9. 동부전역 - g.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스빌 앤티텀에서 리의 북진을 막아내는 공로를 세웠음에도 맥클랠런이 리를 추격하기 보다는 재편성과 재정비에만 몰두하자 링컨은 1862년 11월 7일, 결국 그를 해임시키고 포토맥군 사령관직에 앰브로즈 번사이드를 임명한다. 앤티텀 전투에서 북군의 좌익을 맡았으나 돋보일만한 활약은 없던 번사이드는 장군으로서의 재능보다는 멋진 구렛나루와 후장식 총기 등 각종 무기개발 관련 능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편 리는 무리한 공세로 지쳐있는 북버지니아 군에 병력을 증원하고 재정비를 하며 북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두가지 있다. 첫번째는 언제나 가능한한 적을 착각시키고 기만해서 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보다 우세한 상황이 되어 공격할 때에는 힘이 남아있는 한 적군이 괴멸되기까지 .. 더보기
남북전쟁 8. 동부전역 - f. 앤티텀 전투 메릴랜드 작전(1862년 9월 3일부터 9월 15일까지) 1862년 초 북부는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날듯한 기세로 공세에 나섰지만 가을이 오자 상황은 뒤바뀌어 있었다. 북군은 워싱턴에 포위되는 신세였고 남군은 여름내내 이어진 공세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병력 손실이 막대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듯 했다. 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개전이래 계속 방어만 하던 상황에서 역으로 북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를 비롯한 북부 주들로 진출해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로를 끊는다면 워싱턴으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동시에 서부에서 북부가 누리고 있는 우세를 뒤엎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란과 포프의 약탈로 황폐해진 남부 버지니아 주의 농장과 달리 아직 전쟁.. 더보기
남북전쟁 7. 동부전역 - e. 2차 불런 전투 반도작전에서 리는 맥클랠런을 후퇴시키기는 했지만 북군은 아직 리치몬드를 노릴만한 위치에 있었고 지원군이 남하하고 있었다. 남군은 7일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각 부대의 연계부족으로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점을 고려해 북 버지니아 군 55,000 병력을 2개 군단으로 편성했다. 우익은 제임스 롱 스트리트, 좌익은 스톤월 잭슨이 지휘를 맡아 보다 효율적으로 지휘구조를 개편했다. 북군도 섀넌도어와 버지니아 반도에서의 작전 실패는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기존의 버지니아 주둔 북군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프레몬트의 마운틴 군, 어빈 맥도웰의 라파해넉 군, 나타니엘 뱅크스의 섀넌도어 군, 워싱턴의 새뮤얼 여단, 웨스트 버지니아의 제이콥 D 콕스 사단 등을 통합해 새롭게 버지니아 군을 구성해 맥.. 더보기
남북전쟁 6. 동부전역 - d. 7일전투 “슬픔과 후회속에 빠져있을 수 없다. 남부는 조용한 결단과 냉정한 이성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두 위험을 각오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 매리 체스넛 7일 전투 리는 6월 23일 작전회의를 거쳐 휘하 북군을 버지니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휘하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조율했다. 치커호미니 강 북안에 방어선을 구축한 병력 3만의 북군 우익에 대해 롱스트리트, D.H.힐이 매카닉스 빌 전면에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는 중에 잭슨과 A.P. 힐이 비버 크리크로 기동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이어질 남군의 전략은 존스턴이 세운 계획과 유사할 정도로 복잡했고 리 휘하의 각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6월 26일 ~ 6월 27일의 전황도. 치커호미니 강 북안에 위치한 북군 .. 더보기
남북전쟁 5. 동부전역 - c. 반도작전 “맥클랠런은 지적인 공학자이고 장교였지만 대군을 이끌만한 지휘관은 못되었다. 자신감있게 공격하고 전진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건 맥클랠런이 소심하거나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작전을 지휘하는 것을 좋아했고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참모로 두는 것을, 군대의 퍼레이드와 힘을 즐겼다. 맥클랠런은 반군을 뛰어넘기를 원했지만 그들을 죽이거나 파괴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 해군장관 기드온 웰즈. 반도작전 진행도 맥클랠런은 불런 전투의 패배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북군의 지휘를 맡아 포토맥군을 훈련시키며 1962년 겨울을 보냈다. 북부 정치가들은 워싱턴을 위협하고 있는 존스턴 군과 한없이 늘어나는 전비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라도 빨리 공세에 나서도록 지시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 더보기
남북전쟁 4. 동부전역 - b. 계곡작전 “철이 들때까지 나는 집에 걸린 로버트 E.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의 초상화를 성부와 성자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 조지 패튼. 1862년 봄이 되자 불런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은 빠르게 사라지고 남부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서부 전역의 도넬슨 요새와 실로에서 북군에게 연패를 당한데 이어 조지 B. 맥클랠런이 지휘하는 포토맥군은 날로 강성해지며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맥클랠런은 1861년 겨울 동안 북부 정치가들의 독전을 무시하고 남군과 싸우기 보다는 신생 포토맥군의 훈련을 강화하는데 전념했다. 워싱턴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센트레빌에 주둔중인 조셉 E. 존스턴 장군의 남군을 우려한 링컨은 수차례 남부에 공세로 나설 것을 요청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존스턴 군의 병력.. 더보기
남북전쟁 3. 동부전역 - a. 불런전투 동부전역 남북전쟁에서 동부전역은 버지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메릴랜드, 펜실베니아, 워싱턴을 비롯해 노스 캐롤라이나의 요새지역을 무대로 북군과 남군이 격전을 벌인 전장을 말한다. 남부를 패배시키는데 전략적인 면에서 중요했던 것은 서부전역이었지만 1865년 리 장군이 애포마톡스에서 항복하기 까지 남부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동부가 상징적인 면에서 중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양측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인구밀집지역에서 일어난 동부전역의 전투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게티스버그는 남북전쟁을 대표하는 전투로 전쟁사에서 남기도 했다. 애팔래치아 산맥과 대서양으로 둘러쌓여있는 미국 동부의 넓이는 광활하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워싱턴과 리치몬드 사이의 100마일 정도 사이를 두고 벌어졌으며, 이곳의 지형은 .. 더보기
남북전쟁 2. 전쟁 개괄 전쟁의 전개 남북전쟁 중에 벌어진 1만회가 넘는 교전중 약 40%가 버지니아와 테네시에서 일어난 것은 무대가 되는 미국 동부 지역의 지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남부는 우측은 대서양이, 좌측은 애팔래치아 산맥이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도로망이 발달되지 못한 지역으로 넓이는 러시아의 유럽쪽 영토에 필적할만큼 넓은 지역이다. 대서양과 평행하게 달리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기준으로 동부에서는 160km도 안되는 양쪽 수도 사이에서 치열한 진지전이 벌어진 반면에 서부에서는 광활한 지역에 펼쳐진 강과 계곡이 천연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가운데 뉴올리언즈를 통해서 해군이 접근할 수 있는 미시시피 강이 다시 남부를 가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부에서는 서로가 수도점령을 노리며 버지니아에서 치열한 진지전을 벌이고 서부에.. 더보기
남북전쟁 1. 전쟁의 원인 1861년 11개의 남부 노예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남부연합을 결성하면서 미 동북부의 자유주 전체와 경계선 상에 있는 5개주를 포함한 북부와 싸운 미국내전을 남북전쟁이라고 부른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을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은 기존의 노예주 경계 밖으로 노예제의 확산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하자 남부 7개주가 반발해 1961년 3월 4일 대통령에 링컨이 취임하기 전에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미연방정부는 이를 반란이라고 비난했다. 1961년 4월 12일 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자 링컨 대통령은 각주에서 지원군을 소집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그에 반발하여 4개 노예주가 추가로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에 가담했다. 양측이 서로.. 더보기
스페인 독감 1918년 1차대전중의 세계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독감(인플루엔자, 플루, influenza)이 대유행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H1N1이라고 분류되었으며 역사적, 전염학 자료가 부족해서 근원을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이 바이러스는 비정상적으로 강한 전염성과 높은 치사율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건강하고 젊은 어른들로 보통 독감 바이러스가 노약자나 어린아이 처럼 면역력이 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 3월부터 1920년 6월까지 대유행했으며 극지방이나 태평양의 외딴 섬들까지도 퍼져나갔다. 전세계적으로 7천만 내지 1억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유럽 인구의 1/3이 감염되어 1차대전 사망자의 2배 .. 더보기
바이킹 바이킹은 8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활약한 스칸디나비아의 모험가, 전사 겸 상인인 해적이다. 이들은 유명한 바이킹쉽을 타고 동으로는 볼가강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나 러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서쪽으로는 아이슬랜드, 그린랜드와 심지어 북미대륙의 뉴펀틀랜드에도 정착지를 건설했다. 바이킹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부르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7세기의 낭만주의적 사조에 따라 바이킹들은 고귀한 전사로 재해석되었으며 특히 영국이 스칸디나비아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각광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독일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민족주의에 의해 바이킹 시대를 부각시켰고 이러한 사회, 정치적 상황이 바.. 더보기
철갑선의 기술과 전술 함선의 외피를 철로 보호하게 되자 소구경의 대포를 수십문씩 장비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기존의 소구경 포들이 장갑에 되튕겨져 나가는 상황에서 유효한 공격법으로 부각된 것은 천년만에 다시 부각된 충각돌격이었다. 그와 함께 함포의 종류 배치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 중량과 크기가 증대되었으며 전열함처럼 현측에 다수의 포를 장비하던 방식에서 소수의 함포를 터렛에 탑재하여 전방위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기술적 발전 충각 열풍 1860년대부터 각국의 해군은 장갑함을 상대로는 함포보다 충각이 더 유력하다고 보았다. 증기기관은 풍향과 상관없이 배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장갑의 방어력이 함포의 공격력을 웃도는 상황에서 충각은 거의 천년만에 위력을 발휘했다. 실전에서 햄튼 수로에서 일어난 .. 더보기
마법사인가 수학자인가, 존 디의 삶 생애 공식활동 런던의 타워와드 출신으로 디라는 성은 웨일즈 어로 '검다'는 뜻이다.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롤랜드 밑에서 디는 클렘스포드의 가톨릭 학교(오늘날의 킹 에드워드 6세 문법학교)를 졸업한 후 1543년부터 46년까지 캠브리지의 성 요한 대학을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재능으로 유명했던 디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fellow)이 되었으며 154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르우벤과 브뤼셀에서 공부하고 파리 대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젬파 프리지우스와 함께 공부하면서 지리학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와 친구가 된 그는 10년후에 중요한 수학, 천문학 기구들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디는 1554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과 학장직을 제안받았지만 저술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