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소설가. 1923년 8월 7일 ~ 1996년 2월12일. 오사카 출생.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이란 필명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에 이르지 못한다는(遼 ; 멀다, 요원하다) 겸양의 뜻을 담고 있다.
산케이 신문사에 재직하던 중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래 일본의 역사 소설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라 훔친 이야기’, ‘료마가 간다’, ‘언덕위의 구름’ 등의 저서가 유명하며 일본의 전국시대나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다. 또, ‘가도를 간다’를 시작으로 하는 에세이 등을 통해 활발하게 문명 비평을 발표했다.
경력
생애
1923년 8월 7일, 오사카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부친의 둘째 아들로 출생. 할아버지는 효고현 출신으로 현재의 히메지시 히로하타의 농가에서 태어나 메이지 초기에 우에사카에서 과자 제조업으로 성공했다. 형이 하나 있었지만 두살때 요절했고 누나와 여동생이 한명씩 있다.
3살 때까지는 나라현 키타카츠라기 군 타이마쵸의 친가쪽 수양 아들로 집을 나와 있었다.
1930년 오사카시의 나니와 시오쿠사 진죠 소학교에 입학. 당시에는 학교를 싫어하는 악동이었던 듯 하며 외가 주변에 고분이 많아 토기의 파편이나 돌화살촉 등을 주워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1936년 사립 우에노미야 중학교로 진학해 ‘이와타 군의 손톱’을 감명깊게 읽었고 3학년때무터 오쿠라토마치의 도서관에 다니면서 오사카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방대한 양의 책을 탐독하게 된다.
1940년에 구제 오사카 고교, 다음해에는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지만 불합격, 1942년 4월에 구제 오사카 외국어 학교 몽골어 학과에 입학, 러시아 문학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다. 이 학교 2년 선배로 쇼노 준죠, 1년 선배로 진순신(인도 어학과. 역시 유명한 소설가), 동기로는 아키오 등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된 ‘문학 동아리’가 있었지만 그 구성원은 아니었다.
1943년 11월, 학도병으로 징용되어 오사카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고 효고현의 전차 제19연대에 입대했다. 이듬해 4월 만주의 육군 전차학교에 입교해 12월에 졸업. 만주의 모란강에 전개하고 있던 쿠루메 전차 제1연대 3중대 제5소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이듬해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니가타 현을 거쳐 토치기 현에 배치되었다.
이 시기, 미국이 도쿄를 직접 공격해올 경우에는 토치기에서 도쿄로 이동해 공격한다는 작전을 듣고 ‘시민과 병사가 혼란해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대본영에서 온 영관급 참모에게 질문했을 때 상대방이 ‘(들이받아)치어 죽이면서 가라’고 대답한 것에 대해 당시 22세였던 시바 료타로는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은 전쟁을 하는 나라에 출생했는가? 언제부터 일본인은 이런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어 ‘옛날의 일본인은 더 나았던 것이 분명하다’며 ‘22세의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듯이 소설을 썻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즉, 패전의 체험이 그 후의 작가 생활에 있어 원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위로 종전을 맞이한 후, 곧바로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기자 시대
전후 이쿠노 구 이카이노 동 고쵸메 8번지에 위치한 신세계 신문사에 오오타케 테루히코와 함께 입사했다. 재일 교포가 운영하는 이 신문사를 첫 직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바 료타로가 친한파라는 평가의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듬해에는 동기 오오타케와 함께 신일본신문 쿄토 본사에 입사. 이 시기의 동료인 아오키 코지로에게 30세가 넘으면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학이나 종교 관련 기사를 작성했지만 회사는 2년 후에 도산했다.
산케이 신문사에서 '외대를 졸업했으니 영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는 질문을 받고 사실은 전혀 못했지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서 쿄토 지국에 입사했다. 그해 11월 와카 작가 가와다 준의 실종 사건을 취재하면서 '늘그막의 사랑'이라는 표제어를 유행어로 만든다.
이듬해 오사카 본사로 이동, 1950년에는 금각사 방화 사건의 기사를 작성했다. 이 시기에는 쿄토의 지사 근처 및 쿄토 대학을 담당하면서 현지의 밀교 사원 등에서 기이한 승려들을 만나거나 이시야마 전쟁 중 혼간지의 자금을 관리하던 사람의 자손이 운영하는 일본식 과자가게 이야기라던지, 쿄토 대학에서 쿠와바라 다케오, 카이즈카 시게키 등, 쿄토 학파의 학자 등을 취재했다. 이런 경험이 후년의 역사소설 및 에세이 집필의 기초가 되는 인연을 맺었다는 내용이 말년의 회상기 '시바 료타로가 생각한 것'에 수록되어 있다. 그후 산케이 신문의 문화부장, 출판국 차장등으로 근무했다.
이해 결혼하고 1952년에는 장남이 출생했지만, 1954년 이혼하면서 첫번째 결혼생활이 끝났다. 장남은 친가인 후쿠다 가에 맡겨져서 조부모가 양육했으며 이 결혼과 장남에 관한 일은 공적으로는 전혀 발표된 바가 없으므로, 시바 료타로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숨기고 싶은 과거로 추측된다.
1955년, '명언수필, 샐러리맨'(6월사)을 본명으로 발표. 이 외에도 '만두 전래기' 등 본명으로 발표한 작품은 상당수 남아있다. 이 시기부터 당시 친분관계가 있던 테라우치 다이키치에게 권유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56년 5월, '페르시아의 마술사'가 제8회 코단샤 클럽상에 응모(시바 료타로 라는 이름으로 투고)해 찬사를 받으며 동상을 수상해 출세작이 되었다.
그와 함께 친구들과 잡지 '근대 설화'를 창간하고 그 밖에도 '오모지로 클럽', '소설 클럽' 등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1958년 7월에는 시바 료타로 라는 필명으로 첫번째 저서, '흰 환희전'을 출판했다. 당시에는 야마다 후타로와 함께 전도양양한 전기 소설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있어 본격적인 역사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 시기에 '올빼미가 있는 궁성'(나중에 '올빼미의 성'으로 명칭을 바꿈.)을 연재하기 시작.
1959년 1월, 같은 산케이 신문 기자인 마츠미 미도리와 재혼.
12월에는 오사카의 니시구 서 나가호루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오사카 사무리아', '올빼미의 성' 등을 발표했으며 이 '올빼미의 성'이 제42회 나오키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산케이 신문사를 퇴직해 본격적인 작가가 된다.
소설가 시대
초기작으로는 나오키 상을 수상한 '올빼미의 성', '오사카 사무라이', '바람의 무사', '풍신의 문' 같은 장편이나 단편 '페르시아의 마술사', '과심 거사의 환술', '날아라 카토' 같은 시대, 전기 소설이 많다. '돼지와 장미', '고찰 염상' 같은 추리소설도 있지만 이 방면에서는 그다지 수작이 없고 거론된 두 작품만이 남아있다. 1962년 부터는 '료마가 간다', '타올라라 검'. 1963년에는 '나라 훔친 이야기'등을 연재해 역사 소설가로 왕성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시기의 작품부터는 작가 스스로가 수필풍으로 해설하는 수법을 완성했다.
1964년에는 후세 시 교외의 코사카(현재의 히가시오사카시)로 이사. 본인의 표현으로는 '너저분한 동네에서 살고 싶었다'라고. 1966년 '료마가 간다'가 기쿠치칸상을 수상. 이 후로도 '나라 훔친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신역사 타이코기', '세키가하라', '성새'의 센코쿠 4부작을 출판. 1971년 부터는 기행 수필 '가도를 간다'의 연재도 시작했다. 이후 약 25년간 연재한 이 에세이는 단행본만 43권 분량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 중 제2권 한국 기행(번역시에는 한나라 기행이라고 되어 있음)과 28권 탐라기행의 두권만 번역되어 있다. 만주로 끌려가는 기차안에서 서울역 인근을 보고 '전쟁에서 살아남는 다면 조선에 꼭 다시 와보고 싶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972년에는 메이지 시대를 취급한 '언덕위의 구름' 연재가 종료. 또 에도막부 말기를 다룬 '세상을 살아가는 나날'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초기부터 나타나던 밀교에 대한 관심은 '쿠카이(공해)의 풍경'(일본 예술원상)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작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역사를 조감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짜올리는 '시바 사관'이라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구축해서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메이지 초기를 다룬 '나비의 꿈', '유채꽃의 바다', 전국시대를 다룬 '하코네의 바람'등을 저술했으며 청나라 건국기를 다룬 '타타르족 질풍록'을 마지막으로 소설 집필을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풍진초', '이나라의 모습', '가도를 간다' 등의 연재에 집중하면서 일본이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문명 비평을 계속했다. 1981년 일본 예술원 회원, 1991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택되어 1993년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이 무렵부터 허리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해 좌골 신경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죽음을 불러온 한 복부 동맥류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만에 건너가 리덩후의 전 대만총통과 회담 하거나 아오모리의 산나이 마루야마 유적을 방문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만년에는 노몬한 사건을 작품화 하려고 구상하고 있었지만 착수하지 못하고 끝났다.
1996년 1월 '가도를 간다' 시리즈의 '노비 산슈기' 취재를 끝낸 직후인 2월 10일 밤. 피를 토하고 넘어져서 일본국립오사카 병원에 입원했으나 이틀후 오후 8시 50분에 복부 동맥류로 사망. 향년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작가로서의 평가
작풍
역사 소설가로는 스콧 이래의 인물중심주의를 이어받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형식을 모범으로 삼고있다.
언제나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에 호의적이고, 그런 인물만을 두드러지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으로,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서 가지는 공감을 독자와 주인공의 관계로까지 연장해서 스토리 안에 독자를 유인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한다. 또 역사의 대국적인 서술과 함께 소소한 일화 등을 다용해서 등장인물을 소묘하며, 약간 떨어진 시점에서 보는 객관적인 묘사에 의해 메마른듯한 유머나 여유있는 인간 긍정적 태도를 보이는 수법은, 그 시기 까지 일본의 역사 소설 전통에서 보면 이질적인 것으로, 이러한 방법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크다.
'여담이지만...'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에피소드나 시바 자신의 경험담(등장 인물 자손과의 의견 교환이나 방문한 토지의 소묘)등을 적당히 이야기 내에 아로새기는 수필과 같은 수법도 시바 소설의 특징중 하나이며 거기에 매료된 독자들도 많다.
반면, 작품중의 인물이 갖는 내면의 묘사는 드물기 때문에 '가볍다'는 평도 있고, 장편의 경우에는 주제가 흐릿해진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많은 등장 인물들을 이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화법은 본질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내면 묘사를 피하는 것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파악해 단순화, 전형화 해서 나타내 보이는 18세기 유럽 소설이나 한문 사서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크므로 '전형으로서의 인간' 이냐 '전형을 떠난 내면의 묘사'냐의 문제는, 소설의 유파적 문제(18세기형인가 19세기형인가)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장편의 구성력이 약하다는 것도 앞에서 거론한 '여담이지만..." 같은 부분 때문에 옆길로 빗나가는 경우가 많고 '전체의 3/5 지점부터 엉성해진다.', '최초의 복선이 후반에 활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평이 있으면서도, 이러한 '엉성함', '두서없음'이 갈고 닦인 결과 여러종류의 인물이 차례차례 등장해서 가십을 뿌리고는 사라져 간다는 점 때문에 장편 형식의 소설을 쓰면서도 지루하지 않다는 평도 있다.
후년에 들어서는 소설 보다는 수필이나 비평 등을 주로 했지만, 추상적인 사색이나 철학성보다는 구체적인 역사 평론이나 문명 비평을 위주로 합리적인 사고를 내걸고 고증을 실시한 것에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인물 이미지의 영향
시바 료타로의 작품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이면서 스테디셀러로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으며, 대부분이 영상화 되어 NHK 대하 드라마의 원작으로 다수 활용되었으며 소위 '21세기 스페셜'이라 불리는 시리즈로는 7작품이 제작되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인물은 많은 작품에 중복 등장하고 있으므로, 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역사적 인물의 이미지'는 시바 소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크다.
그 외에도, 에도막부 말기의 에치고 나가오카 번의 중신, 가와이 쓰구노스케 처럼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명확하게 시바 소설의 영향이며, 에도시대의 상인 다카다야 가헤에나 에도막부 말기의 군정가 오오무라 마스지로, 에도막부 말기 부터 메이지에 이르는 정치가 에토 신페이 등도, 시바 소설 이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시바 소설의 영향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경우를 다수 찾을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인들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이들보다 '시바 작품의 등장인물'로서 이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관
사고관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에서 핵심은 합리주의에 대한 작가의 강한 신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방법론에 대한 불신으로 붓을 잡았다는 술회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시바의 생각은 광신적인 것,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신비주의, 형이상학적인 것, 전근대적인 발상, 비상식적인 방법론, 극좌나 극우의 사상, 이론에 맞추어 현실을 제단하려는 구일본 육군적인 발상 등을 싫어하고 그 반대쪽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도 시바의 작품군에는 이상의 것들을 비판하거나 에세이 등에서 부정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시바는 이러한 경향에 대척을 이루는 것이 근대 합리주의라고 생각하며 그 체현자로 시바가 사랑하는 인물상 들을 내세우고 있다. 예컨데 '불타라 검'에서는 끝까지 좌막의 사상적 대립에 계속 고민한 곤도 이사미가 아니라 철저한 실무가로 일관했다는 히지가타 도시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바 작품과 시대기반
시바 료타로가 소설 집필에 전념하던 당시는 일종의 시대사조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반동으로 일본의 근대사 전체에 부정적인 견해가 강했다. 그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통렬하게 비판하는 논지가 많은 가운데, 그 외의 근대사를 조명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시바 이전 일본의 역사 소설은 이른바 사전적이거나, 대중적 오락성을 중시하고 있었으나 시바는 자료 수집을 중시하는 방향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시바에 긍정적인 입장의 평론가등은 높은 실증성을 가진 역사 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것을 들어 수준 높은 오락으로서 높게 평가했다. 다만, 동시대에 실증성을 중시한 소설가가 없지는 않아서 요시무라 아키라, 오카 쇼헤이 등이 실증성 높은 소설이나 논픽션을 발표했고 그 외에도 넓게는 '어두운 쇼와'를 대상으로 역사 연구가들이 2차 자료로 발표하는 등 시바 료타로와 동시대에도 역사 연구와 그에 기반한 논픽션은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즉, 시바 료타로는 소설 집필에 앞서서 방대한 자료를 모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자체가 기존의 성과물들이 다수 존재한 기반위에 성립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시바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까닭에 실제 이상으로, '시바 료타로의 작품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범주를 넘어있다'고 생각하는 극성팬들이 다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저서에서 시바의 생각을 인용하거나, 시바를 동경해서 소설가나 역사 연구자가 되었다는 예도 많다. 높은 시청율로 정평이 나 있는 대하드라마에도 여러차례 선정되어 시바는 새로운 시점과 참신한 묘사로 자신의 역사관을 만들어 일본사회에 폭넓은 영향을 미친 국민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사후에도 시바 료타로의 영향력은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찬이 지나쳐서 일종의 예언자의 경지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관에의 비판
한편, 시바가 만들어낸 역사관은 자주 '시바 사관'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시바 료타로 자신은 '사관'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이 논쟁은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 대한 해석론적 논쟁의 성격이 강하고, '시바 사관'에 비판적인 쪽의 관점이 몇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사상적인 성격을 갖지만 기본적으로는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편중된 견해가 일정한 한계를 만들어 낸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예컨데 하나의 시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지도자의 관점을 중시하고 민중의 관점이나 통시적인 관점으로부터의 파악을 게을리 하고 있다던지, 메이지 시대의 전쟁은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쇼와 시대의 전쟁은 부정적이라는 점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의 단절), 각 시대의 묘사가 앞에서 거론한 편향(예컨데 쇼와기의 일본군에 대한 증오)으로 객관적인 분석이 결여된 합리주의 일색이라는 부분이 있다.
다만, '밝은 메이지'는 시바 자신이 작가로서 연구 조사한 합리주의에서 오는 것이고 '어두운 쇼와'는 자신이 징병된 체험에 의한 실증주의에 의하는 것으로, 작가가 갖는 개인의 주관이 작품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 교과서 문제처럼 역사의 인식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유주의 사관파(전 도쿄대 교수 후지오카 노부카즈가 주장한 역사검증 방법.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인물을 중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가 시바의 역사관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문제 때문에 정치적 좌우익을 불문하고 자유주의 사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함께 비판받는 경우가 있다. 나카무라 마사노리 등의 소위 '혁신파 계통'에게는 '전쟁,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거나 정당화 한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코바야시 요시노리 등의 보수파(주로 반미 보수파) 등은 '대동아전쟁을 부정하는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증성에 대한 비판
보다 학구적인 입장에서는 실증성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있다. 특정의 사실을 중점에 두고 서술한 내용이라면 사실의 범주겠지만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 중에는 실증성을 중시하면서도 일부분 창작한 장면이 존재한다는 점, 자료의 오독이나 자료 비판의 부실 등으로 인한 사실 오인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데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 말기에 활약한 내용을 과대평가했다던지, 노기 마레스케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 등 역사상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바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그 이미지가 일반화되어 버리는 예가 많다.
작품중, 출전을 적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는 실증성을 구가하는 자세에 합치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원 사료부터 조사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도 있다.
전사 연구자 중에는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 있어서 창작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특정 개인의 역사관을 사실인 것 처럼 착각시키는 수법의 위험성을 지적할 때에 시바 료타로를 거론하는 경우가 있으며 최근 들어서 설정이나 고증의 수준에 중점을 둔 일부의 가공 전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진실성에 대한 동종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바 사관에 대한 옹호론
이에 대한 옹호론으로는 '시바 사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시바 료타로 본인이 정리한 것이 아니라는 부분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또, 시바 료타로 본인은 만년에 들어서 역사 평론적인 성격이 강한 르포르타쥬(기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대중매체의 보도), 에세이를 많이 발표했으며 인터뷰에도 자주 응했으며 '가도를 간다' 같은 논픽션도 영상화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은 소설 이외의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어 하나의 사관으로 확립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반드시 시바 료타로 개인의 작품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실증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소설과 같은 창작물에 대해서는 (시사 평론 등은 예외) '역사의 진실을 기술한 사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거나 보편화되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시바 자신이 스스로의 저작을 '픽션이다'라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러한 창작물과 사료의 구분은 역사학에서는 기본적인 것으로, 예컨데 '미야모토 무사시'를 저술한 요시카와 에이지 등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시바 사관이라는 말은 비판적인 의견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며 픽션의 내용을 역사의 진실로 착각하는 독자가 있다는 말은 그 만큼 작가로서의 수완이 우수하다는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바에 대한 논의는 수용의 양태 그 자체도 대상이 된다. 옹호파는 시바의 말에서 교훈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있고, 비판파에서는 신격화를 실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빈감을 시바 본인에데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인품
말재주가 뛰어나고 '좌담의 명수'라고 불릴 정도로 대담집이 많다.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다방면에 걸친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자료 수집욕이 굉장해서 생애에 수억 단위의 거액을 들여서 자료를 사서 모으고 있었다. 시바가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면 관련된 고서적들이 헌책방 업계에서 씨가 말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고서점이 밀집한 지역에 트럭을 몰고 와서 책방에서 닥치는 대로 난독하고 짐받이에 실어갔다고 한다. 특히 '언덕위의 구름'을 집필하던 시기에는 '러일전쟁'이라는 말이 있는 책은 닥치는 대로 사모아서 당시 같은 소재의 희곡을 쓰고 있던 사람이 헌책방에 가도 자료가 없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속독에 아주 뛰어나서 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상대방이 커피 1잔을 마시는 중에 문고본 크기의 책 1권을 전부 읽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이때 읽고 있던 것은 자료로서 수집한 당사자의 일기였다.)
성씨와 얼굴을 보고 출신지나 선조를 맟혀내는 특기가 있어서 가끔 주위를 놀래켰다.
스포츠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오사카의 아파트(이 아파트는 오늘날의 초고층 아파트에 해당하는 고급 주거지역에 해당한다.)에 살던 시절에 난카이 호크스(일본 프로야구 팀의 이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주포 노무라 카츠야(일본 프로야구 경기출장 , 통산 타수 1위, 통산 안타, 통산 홈런, 통산 타점 2위를 기록한 공격형 포수의 원조라 불리는 대 타자. 감독으로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에서 ID야구라 불리는 데이터 야구의 거장.)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오후에 집을 나갔다 심야에 돌아오는 큰 남자를 이상하게 보았다고 한다.
'소문의 진상' 1998년 6월호에서는 전처와의 이혼에 대하여, 시바 료타로의 부친이 원인이었다고 적고 있다. 부친이 좀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전처를 비난하였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계속 가혹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출산후에는 모유가 나오지 않아 가업인 약국에서 판매하는 우유를 사용하려 했을 때 '상품에 손을 대지 마라, 갖고 싶다면 사라'면서 강매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처는 스트레스로 이혼을 요구했지만 부친 측은 아이에 대해서 '후계자'라는 이유로 친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시바 료타로는 나서지 않고 전처가 뭐라고 말해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다. 후일 시바가 후처와 재혼하게 되면서 전처에게 '상대를 보고 결정해 달라'고 요청해서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되었을 때 결국 시바와의 관계를 끊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장남에 대해서도 시바 료타로는 직접 양육하지는 않았고 결혼할 때까지 장남은 조부모 슬하에서 살았으며 생활비를 받으러 갈 때에만 시바의 집에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남은 '시바 료타로의 아들'이라는 말을 싫어했고 시바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최근 저 녀석 내 자식이라는 걸 싫어하는 것 같군'이라는 정도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전 대만총통 리덩후이와는 학도병 출신 동기로, 사상도 비슷했기 때문에 항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저서 '대만 기행'의 말미에는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집필 활동 이외에는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정도 이외에 특별한 활동은 없었고 큰 스카프를 수집하는 정도가 유일한 취미였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할 때에는 마음에 드는 스카프를 몸에 둘렀고 그 대부분은 현재도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다.
http://ja.wikipedia.org/wiki/%E5%8F%B8%E9%A6%AC%E9%81%BC%E5%A4%AA%E9%83%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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