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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캐나다 북부의 탐험을 통해 북서항로를 찾으려고 하거나,?러시아 북부를 통과해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1631년에는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가 북서항로를 탐사했고 러시아도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을 찾아 탐험대를 파견했다. 비투스 베링 1725년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을 받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 2년간의 여정을 거쳐 캄차카 반도의 오호츠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선박을 건조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과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여 수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1730년 페테르스부르크로 귀환한다.? 1733년 베링은 쿠릴열도의 지도작성과 일본과의 항로등을 탐사하기 위해?두번째 탐험에 나선다.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1. 바렌츠의 모험 바렌츠의 모험 네덜란드의 탐험 영국인들은 거듭되는 실패로 북방항로 탐사에서 손을 떼었지만 1588년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북방항로도 그 후보중의 하나였다. 1594년과 1595년, 네덜란드 의회는 "메소포타미아와 타타르(오늘날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 북부를 따라가는 탐험여행"을 시도하게 된다. 1차 항해에서는 탐험대는 오렌지 군도 일대를 탐사했으며 바다코끼리 떼를 발견하여 상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고무되었지만 북극곰을 만나 생포하려다가 탐험대원 일부가 사망했다. 원하던 목적달성에는 살패했지만 몇가지 새로운 발견에 고무된 네덜란드는 다시금 카타이와의 무역을 희망하면서 탐험대를 파견했다. 불행히도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0. 허드슨의 비극 데이비스 드레이크의 북미대륙 서해안 조사와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 발견의 가능성은 희미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은 일부 영국 상인들은 북서 항로의 단서를 더듬어나갈 유능한 항해자를 찾았다. 유능한 항해자로 정평이 나있던 존 데이비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쉽게 실망하거나 개인적인 욕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북서항로를 탐사해 나갔다. 1585년의 첫 항해에서는 폭풍때문에 배를 돌려야 했지만 프로비셔가 조사했던 지역보다 훨씬 북쪽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컴벌랜드 해협을 발견했다. 다음해의 2차 항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587년의 세번째 항해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를 거쳐 베핀 만까지 진출했고 그때까지의 항해가들 중 가장 높은 위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 세번째 항해에서 그는 "7..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5. 북방항로 논전 북방항로 논전 이 논전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0년후 길버트는 "카타이로 가는 새항로의 발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당시의 논전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논란 당시에 길버트나 젠킨슨는 북동항로건 북서항로건 실제로 항해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양측은 모두 당시에 입수 가능했던 자료들에 의존해서 논쟁을 이어나갔다. 젠킨슨은 북동항로를 꽤 전진한 후 그 앞에 다시 열려있는 바다를 보았다는 타타르인 어부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들어 북동항로를 옹호했다. 그에 대하여 길버트는 "타타르인은 미개한 민족이며 항해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우기 해상에서 32km이상이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젠킨슨은 바렌츠 해에서 일각수의 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거..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 북방으로 일찌기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15세기말 부터 유럽의 열강은 흑사병의 공포를 벗어나 자원 고갈로 인한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슬람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된 항해술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고 항로의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인도양 무역에 뛰어들어 향신료와 황금, 노예 무역을 기반으로 했고 에스파냐는 신대륙의 금은을 긁어들이고 있었다.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이들 국가들의 뒤에는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쟁국들이 있었고 그중에 북쪽에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막 벗어난 잉글랜드가 있었다. 1540년대, 오스만 해..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8. 프로비셔의 실패 마틴 프로비셔 마틴 프로비셔(Martin Frobisher 프로비서 아님)는 잉글랜드 웨이크필드 출신으로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아프리카의 기니만 무역선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영국 해협을 근거지로 플로렌스 지방과 오가는 에스파냐 운송선단을 습격하는 해적행위를 통해 프로비셔는 용감하고 노련한 뱃사람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일찍부터 북방항로 탐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576년 멕코비 회사의 자금 지원을 통해 20~25톤급 선박 가브리엘 호와 미카엘 호와 10톤급 핀네스 한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는데 성공, 6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한 후 북미대륙의 북동부를 통해 카타이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찾아나섰다. 영국 최고의 두뇌진이 제시한 낙관적 견해에 고무되기는 했지만 탐험대의 항로는 험난해서 그린란드 남쪽에서..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4. 북서항로론의 대두 스티븐 버로우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로써 러시아와의 교역로가 개설되었다. 뇌제 이반의 치하였던 당시의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에 의해 서방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고 발트해의 교역로는 한자동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들의 방해가 없는 신 교역로는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이익이었고 당시에도 귀중품이었던 모피를 수입하게 되자 이에 고무된 모험회사의 투자가들은 3년뒤인 1556년, 스티븐 버로우(Steven Borough)의 지휘하에 새로운 북방항로 탐험대를 파견한다. 챈슬러의 항해사로 저번 항해에 참가했던 스티븐 버로우가 지휘하는 서치드리프트(Serchthrift) 호를 환송하기 위해 80세의 고령이 된 영국 최고의 도항사 세바스티앙 카보트가 그레이브샌드항까지 찾아와 직접 배를 둘러보..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7. 베라차노의 바다 베라차노 죠바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의 삶에 관해서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는 1485년 피렌체에서 약 50km 떨어진 카스테라 베라차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7년 프랑스의 디에프 근처로 이사한 후 항해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동 지중해와 대서양일대를 항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4년 베라차노는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의 측량사로 근무하던 중 왕의 명을 받아 북아메리카 연안의 탐험여행에 나서게 되고 그 탐험으로 북미대륙에 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베라차노는 플로리다와 뉴펀틀랜드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으며 현재의 남 캐롤라이나 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 체샤피크 만과 델라웨어 강을 비롯한 오늘날의 뉴욕만 근처를 탐사했고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3. 북동항로에의 첫도전 북방 진출에 있어서 먼저 시도된 것은 북동항로로, 이 항로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점을 강조하는 일단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들의 필두에는 존 디가 있었다. 당대의 대수학자이며 천문학과 지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메르카토르와 친분이 깊은 존 디는 당시 궁정점성술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에녹어"라고 하는 독특한 언어를 제창하여 대천사장 미카엘과도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바디랭기지의 달인 띠딕 존 디 선생은, 아라비아 지리학자들의 저작을 근거로 타빈곳이라고 하는 지점을 지나면 항로가 남동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단 이 항로를 통한다면 카타이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북해안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항로를 발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