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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아돌프 아이히만 1906. 3.19. ~ 1962. 5.31. 나찌 당원, 나찌 무장친위대 중령, 홀로코스트 실행책임자 중 한명. 그의 우수한 조직관리 능력과 나찌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심을 높게 평가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동유럽의 게토 및 절멸캠프에 유대인을 이송하는 책임자로 발탁했다. 전후, 적십자의 난민용 여행허가서(laissez-passer)를 사용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아이히만은 신분을 위장하고 현지의 메르세데즈 벤츠사에서 근무했으나 1960년 모사드에게 체포되었다. 이스라엘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인도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를 포함한 15개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1962년 사형당했다. 생애 유년기 아이히만은 독일 서부의 라인란트 솔링겐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루터교 신자였던 아버지 아돌프 카를.. 더보기
1차 중동전과 팔레스타인 난민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70만 내지 75만명의 아랍계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주변국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이를 둘러싼 문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역사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과 상황은 오늘날까지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모든 분파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1951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를 이스라엘 국외에 711,000명, 이스라엘 국내에 16만명 정도로 추산했으며 오늘날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4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에 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초창기에는 ‘주변 국가의 명령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이 1차 중동전쟁 이전에 전투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려 .. 더보기
중동전쟁과 유대 난민 추방의 진행과 이유 기원전 6세기 경의 바빌론 유수 이후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랍 각지에 흩어져서 수천년을 지내왔다. 유럽의 기독교 사회보다 비교적 유대교에 관대했던 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살아왔지만 19세기 말 중동에 유입된 민족주의는 아랍과 유대인의 관계를 근본적인 부분에서 바꾸어 놓았다.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예멘 출신의 유대인 중 약 10%가 1881년부터 1914년 동안에 이주했던 것 처럼 20세기 이전에도 박해를 피해 이주한 경우가 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격화된 아랍의 민족주의는 중동각지에서 유대인 박해를 가속화시켰고 유대인의 이주는 급격히 가속되었다. 그와 함께 시오니즘의 이상이 구현화 되면서 유대인들은 아랍국가에서 소수자로 지내는 불안정한 삶 .. 더보기
제1차 인티파타 1987년 오슬로 합의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설립된 이후부터 1993년 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폭력사건의 총칭. 투석 투쟁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인티파타라고 하면 제1차 인티파타를 의미하며 1차 인티파타라고 부르게 된 것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알 아크사 인티파타를 제2차 인티파타로 부르게 된 다음부터이다. 경위 발단 1987년 10월 1일,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의 가자출신 구성원 7명을 매복 사살하고 며칠 뒤에는 이스라엘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을 배후에서 총격하고 이에 대해 12월 4일에는 슈로모 사칼이라는 이스라엘 세일즈맨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스라엘 국방군의 트럭이 자동차에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고로.. 더보기
오슬로 협약 이후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드리드의 이정표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제1협약 : 실패가 예언된 원칙 선언 : 미국과 러시아가 후원한 이스라엘과 PLO 간의 비밀 노르웨이 협약에 의함. 2년의 기한을 두고 자치정부를 구성 1994년 5월 4일 - 가자와 예리고를 우선으로 하는 카이로 합의 :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5년 기한의 전환 작업이 시작됨. 1995년 9월 28일 - 오슬로 제2협약 : 준비협약으로 A, B, C 지역으로 세분화된 지역에서 최종 협약 타결을 위한 준비기간 1996년 1월 -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당선됨 1996년 5월 - 항구적 평화합의를 위한 기념할만한 출발 - 이스라엘 선거로 실질적 협상이 지연됨 1991년 4월 1.. 더보기
이스라엘 안보지도 골란고원 골란고원은 군사적으로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 및 평야지대와 이스라엘의 유일한 담수원인 갈릴리 호수 주변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골란고원은 대략 뉴욕의 퀸즈 정도의 크기로 전체 지역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5 1/2 마일 정도이다. 1967~1982 시나이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 본토보다 3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으로 1982년 이스라엘보다 50배 이상 영토가 넓고 10배 이상 인구가 많은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유대 사마리아 유대아와 사마리아는 요르단강 서안을 일컫는 표현이다. 1949년 휴전협정선에서 지중해까지의 길이는 가장 좁은 곳이 9마일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인구의 약 절반이 이 좁은 회랑지대에 모여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발전설비를 비롯한 공업시설과 금융시설 대부분이 이 .. 더보기
이스라엘이 바라본 중동분쟁 UN 1947년 분리독립안 1947년 11월 29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2/3의 찬성으로 유대와 아랍의 분할독립안을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지도상의 푸른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유대인에게 배정된 지역의 75%는 사막이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한 천국은 아닐지라도 유대인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분리안을 받아들인다. 반면 아랍은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유대인 국가도 수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분리독립안을 거절한다.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예맨 등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했고 결의안이 무효라고 선언한다. 1948년 아랍침공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다음날 아랍연합 총장 아잠 파샤는 성전.. 더보기
안네의 일기 ; 진위논쟁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조숙한 소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키티라는 제3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표현 스타일에 있다. 나찌 치하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은 모종의 두려움으로 표현될 뿐 생활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극장의 우상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안네는 그런 삶에서도 희망의 끈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안네의 일기는 최종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암스테르담 주둔 보안경찰 SD에 발각되고 은신처의 8명중 7명은 각기 다른 수용소에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 뿐이었다. 보안경찰이 은신처를 수색한 뒤 마루 위에 흩어져 있던 문서들을 모아두었던 협조자들은.. 더보기
레바논 내전 7. 출구없는 미로 전쟁은 도박과 같아서 시작하기는 쉬운데 그만두기가 힘들다. 이스라엘은 PLO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으며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군비를 확충하고 있음을 전재로 전쟁을 시작했고, 시리아와 PLO가 레바논에서 축출되면서 물러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어떻게 전쟁을 끝내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계획했던 종전 작업은 레바논에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레바논 군을 재조직하여 시리아와 PLO? 세력을 몰아낸다면 리쿠드 당이 약속했던 40년간의 평화도 멀지 않을듯 했다. 바시르 제마엘. 팔랑헤당의 창립자인 피에르 제마엘.. 더보기
레바논 내전 6.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은 최신예 메르카바가 시리아군 T-72를 압도한데 힘입어 다시금 기갑부대간의 교전에서 승리를 장식했다. 이스라엘의 자국산 최신예 메르카바가 환상의 무적전차로 알려져 있던 소련의 T-72를 승무원 손실없이 제압해버리자?시리아 군은 더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메르카바는 히브리어로 전차(Chariot)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자국설계, 자국생산 전차인 메르카바는 두터운 전면장갑을 바탕으로 높은 생존성을 자랑하며 굴곡이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자국지형에 맞게 설계되었다. T-72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이미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군은 결국 11월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아랍세계에서 고립된채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벌이게 될 상황이.. 더보기
유대인 절멸의 문서적 근거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절멸 명령’을 기록한 문서는 발견된 적은 없고, 대부분의 경우에 유대인을 절멸시키라는 것보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조치”, “궁극적 해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 내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찌 독일에서 행해진 수많은 발언들 중에는 그러한 절멸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며 1939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독일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는 그러한 “절멸 의도”에 대한 증거로서 자주 인용된다. ”만약 국제 유대인 자본이 독일 제국을 다시 세계전쟁에 빠트린다면 그 결과는 지구의 볼셰비키화나 거기에 따른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5. 베카 계곡의 공중전 6월 9일, 시리아와 PLO는 전진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을 레바논 중부의 방어 거점에서 저지하고 있었다. 자동차에 탑재한 Sagger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스라엘도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ATM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격렬한 지상전을 거듭하면서도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의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이 시점까지 아직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전면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지난 전쟁에서 맹위를 떨치며 이스라엘 공군을 괴롭혔던 시리아군 SAM과의 2라운.. 더보기
레바논 내전 4. 작전명 갈릴리의 평화 1982년 PLO는 병력 15,000명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000여명이 남부 레바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기동중인 이스라엘 전차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차호에 은폐되어 있었다. 또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츄사 방사포 80문 및 120mm~ 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 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무장의 속도도 밀수의 천국이 된 레바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 더보기
레바논 내전 3. 시리아와 이스라엘 레바논 정부가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남부 지역에 파타랜드라고 불리는 PLO 지배 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테러활동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PLO는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이나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해서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남레바논 및 베이루트를 공격했고 이것이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기독교 마론파 소속의 팔랑헤당이 교회에서 집회를 거행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PLO지지자들의 버스가 교회에 발포, 팔랑헤당도 이에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하여 내전이 재개되었다. 또 같은 시기 남부의 시돈에서도 수니파의 어민이 .. 더보기
홀로코스트 부인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주류 역사계에서 논하는 홀로코스트, 이른바 2차대전중 나찌 독일에 의해 발생한 유대인 제노사이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사실 관계의 불명확 또는 의심스러움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재를 의문시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부인론 측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용하는 용어이며 부인론자 측에서는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증거나 확립된 방법론을 이용한 역사연구가 아니라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의 수정주의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현재의 주류적 견해는 유대인의 음모에 의한 것이며 이 음모는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2. 국가속의 국가 PLO 1960년대 아랍권은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사건(1956)으로 나세르 주의가 열풍처럼 휩쓸고 있었고 이것이 인구 변화와 함께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런 와중에 1958년 기독교 출신의 샤문(Camille Chamoun)?대통령이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하는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인자 이슬람 세력이 반발했다. 게다가 샤문 대통령이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한 채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임하려?하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규모?반란을 일으켰으며 1개월 후 반란은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샤문 대통령 ? 내전이 악화되자 샤.. 더보기
레바논 내전 1. 백향목의 레바논 비록 그 날개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입힐 지라도. ?- 칼린 지브난 오늘날의 레바논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 지역을 통치한 두르즈파의 파할 앗디가 지배하던 “소 레바논” 지역을 근거지로 한다.아랍의 일부지만 마론파 기독교도를 비롯해서 그리스 정교들이 다수 존재하는 독특한 사정으로 반독립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던 이 지역에서?1860년 오스만이 지배권을 강화하는 와중에 마론파 그리스도 교도들과 드루즈파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마론파 1만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보내 질서를 회복했다. 이후 프랑스는 레바논의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여 이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했다.?오스만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자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레바논 사회는 유럽과 교류를 쌓았으며 해외에서 축적한 부를 환원하여.. 더보기
2차대전에서 유대인 희생자의 수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600만명에 이른다는 주장은 1945년 뉘른베르크에서 제국보안국 소속의 빌헬름 회틀의 증언, 즉, 1944년 8월말 부다페스트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때까지 살해된 유대인 수가 600만에 달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회틀은 이 가운데 400만은 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 200만은 소련에서 총살되었다고 기억했으며 뉘른베르크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1946년 9월의 선고 공판에서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명이라고 밝혔다. 반제회담에서 추정한 유럽의 유대인 수. 총 1천1백만으로 산정하고 있다. 당시에는 희생자 수가 600만인 근거를 명확히 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라이틀링어는 1945년 뉘른베르크에 제출.. 더보기
3차 중동전쟁, 6. 전쟁의 결과 분쟁의 결말과 전후 상황 6월 10일,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의 최후공세를 종료하고 다음날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서안,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전에 비해 3배로 증가했으며 점령지에 거주하는 1백만명의 아랍계 인구가 이스라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종심은 남쪽으로 300km, 동쪽으로 60km, 북쪽으로 20km씩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67년 전쟁의 정치적 중요성은 심대하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뒤바꿀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도 있음을 확실히 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요한 교훈을 습득했고.. 더보기
3차 중동전쟁, 5. 리버티 사건 공중전 6일전쟁 중에 IAF는 사막전에서 현대적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전술적 기습이 된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공격 이후에 (공격이 시작된 시점에 이집트 공군의 비무장 훈련기 4기만이 비행중이었다.) 이스라엘은 잔존 아랍 공군을 파괴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전술지원 활동으로 첫공격의 전략적 효과를 더욱 확대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체로 저공으로 침투하여 일출 무렵에(전술적으로 태양을 등지고 싸움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기습을 가하는 전법을 이용했고 초기의 타격으로 적 공군의 전술적 저항력을 제거하였으며 제공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부분의 전장에서 육군의 전진을 도왔으며 특별히 요르단 군의 예리고 근처에 주둔한 60기갑여단의 기동을 파괴.. 더보기
3차 중동전쟁, 4. 전쟁의 전개 포커스 작전(Operation Focus) 시나이 반도에서 격추된 이집트 공군기를 이스라엘 공군장교가 조사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의 최중요 작전목표는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공격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소련제 신예기 450기로 구성되어 아랍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현대화된 공군으로 초기에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 측은 군사 및 민간 시설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30기의 Tu-16 "배저" 중폭격기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판단했다. 이스라엘 시간으로 6월 5일 7시 45분, (이집트 시간 6:45), 이스라엘 전역에는 시민군 방어 경보가 울려퍼졌고 그와 함게 이스라엘 공군은 포커스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가능한 200여기의 제트기 중 12기를 제외.. 더보기
3차 중동전쟁, 3. 전쟁 전야 이집트와 요르단 5월과 6월, 이스라엘 정부는 여러전선에서 동시에 공격받을 위험을 피하고, 요르단 서안의 팔레스타인 계 문제를 피하기 위해 요르단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범아랍주의 여론 때문에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1967년 5월 30일 이집트와 시리아 간의 군사동맹에 더해 요르단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후세인 국왕을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부르던 나세르는 "우리의 기본적 공동목표는 이스라엘의 파별이며 아랍인들은 모두 싸움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상호 방위조약에 서명하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1967년 5월 말, 요르단 군은 이집트의 압둘 무님 리아드(Abdul Munim Riad) 장군의 지휘하에 .. 더보기
3차 중동전쟁, 2. 티란해협 봉쇄 초기 군사활동 5월 17일, 가말 압델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UNEF병력 4,000여명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아바 에반의 절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UN 군은 수일 뒤 부대를 철수했다.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과 공보부는 당시 이집트가 북예맨 내전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대 이스라엘 전선에서 개전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세르가 예맨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시나이 쪽으로 진출시키겠다고 선언하자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될 정도로 병역 대상자 일체를 소집했다. 요르단 국경선에서는 비상 시국 분위기가 없었으며 요르단 군단이 암만에서 유대아, 사마리아 등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는 중에 관광객들은 여전히 만델바움 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반면에 이집트는 샬름 엘 세이크를.. 더보기
3차 중동전쟁, 1. 분쟁재개 6일전쟁 (??? ?????? ??????, ?arb al?Ayyam as?Sitta, ????? ??? ??????) 또는 1967년 중동전, 제3차 중동전, 6일전쟁, 6월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연합군의 전쟁으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튀니지아, 모로코, 알제리아도 아랍 연합군에 병력과 무기를 제공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국제연합긴급대응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UNEF)을 1956년 2차중동전 이후 평화유지를 위해 완충지대를 형성하던 시나이 반도에서 축출하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긴장고조에 대응하여 이집트는 1,000대의 전차와 병력 10만명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그와 함께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기를 게양했거나 전략적 물자를 .. 더보기
1차 중동전쟁, 9. 전쟁의 결과 1949년 종전협정 이집트 1948년 1월 6일, 랄프 분쉐 박사는 이집트가 마침내 이스라엘과 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1월 12일부터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발표가 있은 직후 이스라엘은 팔루자(Faluja)의 포위되어 있던 이집트 여단을 해방시켰지만 그달 말이 되자 대화는 난황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집트는 48년 11월 4일 UN안보리 결의안 1070에 따라 11948년 10월 14일 점령하고 있던 영역으로 후퇴하겠다고 주장했다. 1949년 2월 12일, 이슬람 형제단의 지도자인 핫산 알 바나의 살해로 인해 이집트 내부의 긴장감이 상승한 것도 회담의 교착에 빠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2월 초, 이스라엘.. 더보기
1차 중동전쟁, 8. 전쟁의 전개 1948 아랍-이스라엘 전쟁 제1단계 (1948. 5.14 ~ 1948. 6.11)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는 5월 15일에 종료되었지만 미래의 수상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끄는 유대 지도부는 14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소련과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게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서 레바논군 1,000, 시리아군 5,000, 이라크군 5,000, 이집트군 10,000 이 신생 이스라엘 영내로 침공을 개시했다. 트렌스요르단 군은 예루살렘과 주변지역의 아랍관리지역을 비롯하여 국제관리 독립구역을 4,000여명의 병력으로 침공했으며 사우디아리비아, 리비야, 예맨의 자원병력 군단이 이들을 보조했다. 1948년 5월 15일, 아랍연합 사무총장은 해저전보를 통해 UN사무.. 더보기
1차 중동전쟁, 7. 분쟁의 주역들 이슈브 베니 모리스는 이슈브의 목표가 전쟁을 통해서 서서히 변해갔다고 지적했다. 전쟁 초기에 이슈브의 목표는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계와 주변 아랍국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깊이, 진정으로 중동에서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가 재현될 것을 우려했고 아랍의 공공연한 발표들은 그들의 공포를 부추켰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슈브의 목표는 유대국가의 영역을 국제연합 분리안 너머로 확장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우선 고립되어 있는 유대인 정착지들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점진적으로 방어가능한 경계선 속에 궁가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4~5개월 후에 정치, 군사 지도자들 간에 세워진 세번째 새로운 목표는 "이스라엘에 장래의 강력한 제5전선.. 더보기
1차 중동전쟁, 2. UN분리안 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아랍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 관리를 1948년 8월 1일부로 종결하고 이 지역에 유대계와 아랍계로 분리된 2개의 국가를 분리 독립시키는 안건을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 불참 1로 결의했다. 계획의 맥락 1917년 11월, 알렌비 장군은 팔레스타인 점령 준비를 하는 시점에서 영국 외무부는 1917년 외무부의 벨푸어 경(Lord Belfour)이 영국 시온주의 운동의 수장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 통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폐하의 정부는 유대 민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에 긍정적이며 이 목적의 성취가 용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계 공동체의 사회, 종교적인 권리들이나 .. 더보기
1차 중동전쟁, 1. 배경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이라고 불리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알 나크바(대재앙)이라고 부른다.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아랍연합국과 신생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이후 지속되는 아랍 위기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1948년 5월 15일, 국제연합의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식민통치 종료와 분리안 발표를 신호로 이집트, 시리아, 트렌스 요르단을 비롯한 주변 아랍국의 지원하에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무대로 전쟁이 발발하여 곧 시나이 반도에로 전화가 번졌으며 그 결과 수백 내지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 난민이 발생했다. 배경 1차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패배하자 연합국 수뇌부는 이탈리아 산 레모(San Remo)의 빌라 데슈방(Villa D.. 더보기
4차 중동전쟁, 7. 머나먼 평화 전쟁의 장기적 효과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1948년 1차 중동전 이후 아랍국과 이스라엘의 첫 공식 회담이었다. 이 전쟁으로 아랍국가들은 6일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있었고 특히 부분적이나마 승리를 거두고 실지를 회복한 이집트에서 이러한 효과가 더욱 컸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는 더 많은 영토를 획득했고 수에즈를 넘어 아프리카 까지 진출함에 따라 아랍권이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협상과 외교전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스라엘에게 이 전쟁은 재앙에 다름아니었다. 6일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유지하던 압도적 군사력의 이미지가 퇴색되었으며 초기의 기습을 당한 충격은 이스라엘 인들에게 심리적인 충격이 되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