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1947년 분리독립안
1947년 11월 29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2/3의 찬성으로 유대와 아랍의 분할독립안을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지도상의 푸른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유대인에게 배정된 지역의 75%는 사막이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한 천국은 아닐지라도 유대인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분리안을 받아들인다. 반면 아랍은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유대인 국가도 수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분리독립안을 거절한다.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예맨 등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했고 결의안이 무효라고 선언한다.
1948년 아랍침공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다음날 아랍연합 총장 아잠 파샤는 성전을 선포한다. 그는 이 전쟁이 절멸전이 될 것이며 학살은 몽고나 십자군이 했던 수준에 이를것이라고 경고했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법률고문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성전을 선포하노니, 모든 무슬림 형제들은 유대인을, 모든 유대인을 죽여버려라’고 명령했다.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이라크의 연합군은 이 지역에 통합 팔레스타인 연방을 수립하기 위해 독립까지 무장이 금지되어 있던 유대인 거주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1949년 정전협정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중에 많은 유대인 거주지와 회당, 성소가 파괴되었고 마을과 건물들이 불태워졌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구역은 포위되어 물과 식료품 공급이 차단되었고 요르단은 구시가지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축줄해 나갔다.
예루살렘의 음영 부분은 구시가지를 의미한다. 요르단은 동 예루살렘과 요르단 서안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이로써 예루살렘의 국경선은 가장 좁은 곳은 불과 9마일에 불과할 정도로 협소해졌다. 이집트 군은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남쪽 외곽을 점령했다. 빈약한 무장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이스라엘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은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1949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트렌스 요르단과 휴전조약을 맺었다. 트렌스 요르단은 영국과 파키스탄을 제외한 국제사회의 승인이 없는 상황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자국영토로 편입했고, 이 지역들은 이후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거점이 된다.
1948년 아랍 난민 발생
1948년 4월부터 12월에 걸쳐서 약 72만명에 달하는 아랍계 난민이 발생했다.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이 파괴된 이후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스라엘에서 벤구리온을 비롯한 일부 정치가들은 참정권을 비롯하여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인정할 것이고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지만 아랍난민들은 떠나는 길을 선택했지만 주변 아랍국은 난민들을 사회의 주류에 편입시키는 대신에 난민촌에서 생활하도록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1948~1972 이스라엘 난민 발생
1945년에 아랍국가들에는 87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거주지들 중에는 2,500년 이상 유지되어 왔던
유대인 정착지들이 있었다. 1947년에서 1948년 동안 유대인들이 축출되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아덴과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시오니즘은 중죄로 판단되어 약 60만에 달하는 유대인 난민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재산을 전부 빼앗긴 상태로 도착했지만 유대인 난민들은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되어 국가의 일부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아랍과 이스라엘간에는 대규모 난민교환이 이루어졌느나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된데 반해 아랍 난민들은 아랍 정치의 논리에 의하여 난민으로 남게 되었다.
파다인 습격 1951~1956
전쟁에 패배하고 1947년의 분리독립안에 의해 평화가 오자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은 “파다인(Fedayeen")”이라는 테러리스트 그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습격하기 시작했고 1949년~1956년 간에 걸쳐 1,300여명의 이스라엘인이 아랍인의 테러에 의하여 죽거나 부상당했다.
시나이 작전 1956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엘리앗 항구를 봉쇄하고 아프리카와 극동지방과의 통상을 차단하면서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6일에 일련의 군사작전을 실시한다. 그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여 이집트가 국유화한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점령하고 이집트의 군사작전을 중단시켰다. 1957년 3월,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의 해운로가 재 개통될 것을 보증하면서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와 가자 지구에서 철군했다. 이후 3,300명에 달하는 UN 평화유지군이 시나이에 주둔하며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군이 철수했음에도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적 선박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1967년 5월 아랍군의 압력
1966년 초부터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 적대적인 군사행동을 증대하는 것이 명백해졌고 시리아와 요르단 국경에서는 상당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시리아 군은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 거주지를 향해 산발적인 포격을 가했다.
1967년 5월 15일, 이집트 군이 시나이 반도의 국제관리 지역을 점령하고 UN평화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한다. 5월 22일에는 이집트가 다시금 티란 해협을 봉쇄하였고 25일에는 시리아와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이집트가 군대를 국경지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청했다.
2일 후인 5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우리의 기본 목표는 이스라엘의 파멸이다. 아랍 민족은 전쟁을 원한다. 살름 알 세이크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최전선이 될 것이다.” 1966년의 이집트-시리아 방위조약을 토대로 이집트는 요르단 및 이라크와 5월 30일과 6월 4일에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이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6월 6일전쟁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를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스라엘 군은 요르단에게 전쟁에 참전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요르단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예루살렘 서부 지구와 텔 아비브에 중포로 포격을 가했고 이스라엘 군도 반격에 나섰다. 1967년 6월 8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요르단 군을 격퇴하고 유대 전지역과 사마리아를 점령했으며 6월 9일에는 그동안 205채의 가옥과 175에이커의 과수원및 75에이커의 농장을 파괴하는 포격을 가해오던 골란고원의 시리아 군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1967년 정전협정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 유대, 사마리아, 골란고원을 점령했지만 1949년의 휴전선을 월경하지는 않았다. 국제적인 통상의 안전보장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났고 아랍의 테러에서 이스라엘 민간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1967년의 정전선은 1973년까지 이스라엘의 국경선으로 남았으며 이스라엘은 영토를 수배로 확대시켰다. 비록 이스라엘 방위군이 모든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방어할 수는 없었지만 이스라엘 영내에서는 테러리스트를 소탕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주변 아랍국가로 이동했고 이로써 주변국가에서는 국제적인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1973년 이집트 공격
1973년 10월 6일 토요일 유대인의 전통적이니 명절로 대부분의 이스라엘 인들이 회당에서 금식을 하던 욤키푸르 날 정오가 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선제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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