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주류 역사계에서 논하는 홀로코스트, 이른바 2차대전중 나찌 독일에 의해 발생한 유대인 제노사이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사실 관계의 불명확 또는 의심스러움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재를 의문시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부인론 측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용하는 용어이며 부인론자 측에서는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증거나 확립된 방법론을 이용한 역사연구가 아니라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의 수정주의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현재의 주류적 견해는 유대인의 음모에 의한 것이며 이 음모는 유대인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스스로의 권익을 촉진시키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으로 간주되곤 하지만, 홀로코스트에 관한 현재의 “통설”에 이의를 표명하는 사람들의 사상적 배경이나 주장 내용은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가 나찌를 지지하거나 극우 편향적인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은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위법행동으로 간주되며 반유대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결합된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부인론인가 수정주의 인가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그 용어가 적용되는 사람들에게 거부되고 있으며 보통은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고의로 현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인론이라는 것은 자신이 예상한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들만을 채용해서 사실을 왜곡한다는 인상을 주는 용어인데 반해, 수정주의란 새롭게 발견되는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에 의해서 역사의 사실을 새롭게 수정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이를 통해서 지금까지 받아들여지는 역사를 재조사, 검토하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단, 역사주정주의라는 말이 일반적인 용어로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이렇게 현재의 정립된 주장도 일종의 가설로 받아들이며 충분한 반증이 발생할 경우 적절히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류적 태도이다.
그런데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스스로도 적절한 수정주의적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에 비판적인 측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보다 정확한 용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고든 맥피(Gordon McFee)는 소논문 “왜 수정주의는 다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위 “수정주의”는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서 출발하여 사실을 검토하고 미리 설정된 결론에 부합되는 사실을 적용하는 것을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적절한 방법론을 역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묘사하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표현한다면 홀로코스트 수정론’이라는 용어는 애매해서 이미 밝혀진 홀로코스트의 제 측면들을 고찰하는 데 이용되는 통상의 역사학적 기법까지도 포괄적으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수정주의라는 용어가 이미 부인론자들에게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적 목적이 우선해서 잘못된 추론에 의한 연구’라는 의미가 “역사 수정주의”라는 표현에 굳게 결부되고 있어서 주류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역사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인론과 홀로코스트 수정주의라고 하여 2개의 용어를 구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지 않다. 2006년 2월에 재야 사학 연구가 데이비드 어빙이 홀로코스트 부인을 이유로 오스트리아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영국의 언론에서는 어빙에 대하여 “수정주의자”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한 바 있다.
한 국내 포탈사이트에서 발췌.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견해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주장한다고 하여 독일이 제2차대전 이전부터 대전중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유대인을 차별, 박해한 것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고 정치적인 견해도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주요논점은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1. 나찌 독일의 정책에서 유대인 멸종의 공식적인 정책이나 의도를 확인할 수는 없다.
2. 나찌 독일은 유대인을 대량 살해하기 위해서 가스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3. 500만 내지 600만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 유대인 희생자의 숫자는 무책임한 과장으로 실제로는 훨씬 적다.
부인론자들의 구체적인 주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지만 모든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1. 유대인 멸종 정책의 부재
전후, 연합군은 독일에서 방대한 정부 문서를 압수했으나, 히틀러 또는 다른 독일정부의 지도자가 “유대인의 멸종”을 결정, 명령한 문서는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문서 중에는 아우슈비츠에 수용한 유대인을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로 이주시킬 계획도 있었음이 명료해진다. 이것은 아우슈비츠등의 수용소가 건설된 목적이 “유대인 멸종”이 아니라 전후, 소련을 타도한 후에 유대인을 우랄산맥 너머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서 준비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어 “최종해결”이라는 용어도 전후의 강제 이주계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강제 이주를 인도적으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가와는 별도로 “최종해결”이라는 용어가 반드시 “멸종”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전후의 통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 당시의 독일 정부가 “유대인 멸종”이라고 불릴만한 계획을 위한 예산을 전혀 계상해두지 않았던 것이 판명되어 있다. 독일은 확실히 유대인을 차별, 박해했지만 절차를 따르지 않고 유대인을 학대한 독일인에게도 처벌을 가하고 있으며 이것은 독일이 “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다”는 통설에 반하고 있다.
2. 가스실 부정
아우슈비츠와 마예다네크 등에서 청산가스를 이용한 가스실이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청산가스를 이용한 가스실은 미국에서 실제로 사형을 위해 이용되기는 했으나 모든 처형법 중에서 가장 고가에 속하는 처형법으로 대량 살인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방법을 “민족 멸종”의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또, 청산가스를 발생시키기 위해 미국에서는 염산등과 시안화칼륨을 반응시키는 방법을 용하고 있지만 아우슈비츠나 마예다네크에서는 펄프 등에 청산가스를 흡착시킨 것을 투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처형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게 된다. 게다가 가스실을 환기시키는 데에도 장기간의 시간이 소요되어 너무 비효율적인 처형법이 된다. 이런 방법을 대량 살인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트레블링카, 소비브르, 베제트, 헤움노 등의 4개 수용소에서는 “디젤 엔진에 의하여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가스실”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디젤엔진은 일산화탄소를 별로 배출시키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므로 이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불합리하다. (디젤엔진도 불완전 연소시키게 되면 일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게 되면 훨씬 더 많은 일산화탄소를 얻을 수 있으므로 일부러 디젤 엔진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포함)에서 “처형용 가스실”로 공개되어 온 복수의 방에서 벽돌등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대조군으로 채취된 살충용 가스실에서는 전후 40년이 지난 후인 1988년에도 고농도의 시안 화합물이 검출된데 비해 중요한 “처형용 가스실”에서는 거의 시안화합물이 검출되지 않았다. (로이터 보고서) 이 분석결과는 추후에 같은 화학분석을 시험했던 폴란드 크라코프 대 법의학 팀의 보고서에서도 증명되고 있다.(크라코프 대 법의학 팀 보고서는 로이터 보고서를 비판하고 있다.)
또,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서 압수한 방대한 독일측 문서 중에 처형용 가스실의 설계도는 발견되지 않았다.(소각로의 도면은 다수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전후에 폴란드 당국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포함)의 처형용 가스실로 공개해온 복수의 방은, 설계도 상에는 병사자 등의 시체를 안치하는 시체 안치실(Leichenkeller)로 설계된 것임은 도면에서 명확히 읽어낼 수 있다. 이것은 이러한 설계도를 검증한 프랑스의 가스실 긍정론측 연구자, 프레자크 본인이 인정하고 있다. 프레자크는 설계단계와 건설후, 사용 목적이 변경되었다는 해석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 가설에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독일이 병사자의 영안실로 만든 지하실 등을 전후에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이 가스실로 공개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시체를 병리학자 또는 법의학자가 해부와 화학분석을 통해 증명한 의학 논문 보고서는 없다. 일산화탄소에 의한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련의 문서가 있지만 이 문서에는 중요한 의학적 기록이 없다. 또 카탄 숲 사건에서 소련측이 법의학 보고를 허위로 기재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 문서에는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체의 해부 기록을 소련은 제출하고 있지 않다.
전후 알려졌던 가스실의 목격 증언에도 상호의 모순이나 내용의 변화가 많다.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인이나 레지스탕스 중에도 가스실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인 증언을 한 생존자도 다수 있으며 자신의 증언을 후에 철회한 증인도 있다.
가스실이나 치클론B등은 기생충 구제를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3. 시체 처리용 화장터의 부재
알려진 바와 같은 대량 학살이 실행되었을 경우, 인체를 소각하기 위해서는 장시간 화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소각로는 아우슈비츠나 마예다네크에도 없으며 이러한 노에서 충분한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당시 독일이 에너지 난에 처해있는 중에 전쟁 중 할당할 수 있는 양을 웃돌고 있다.
당시에 존재했던 화정터는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너무 작기 떄문에 이러한 화장터가 있던 이유는 자연사 혹은 죄수가 밀집되어 있는 노동 수용소에서 예상되는 전염병의 만연에 의한 죽음에 대응해서 화장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또 1944년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아우슈비츠의 항공사진에서도 시체 소각의 연기나 석탄더미도 찾아볼 수 없다.
4. 사망수의 과장
1939년을 전후하여 전세계의 유대인 총숫자는 1600~1700만명이며 1948년 전후에는 1500~1800만명이라는 통계로 볼 때,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명이라는 데에는 과장이 있다. 즉, 대량학살 발생전 1940년 판의 “월드 아르메넥” (The World Almanac) 에서는 유대인 인구가 15,319,359명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반해 전후의 1948년판 “월드 아르메넥”에서는 15,713,638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베이비붐 세대라는 것도 대부분 1.2~1.3배 정도의 인구 증가율인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 증가치는 비정상적이다. 만약 출생율이 매우 높았다고 하더라도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죽었다면 2차대전 종결 전후의 유대인 수는 약 1100만명 전후가 되어야 하므로 600만명이 죽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독일 점령지역에 거주한 유대인의 총수도 명확하지 않아서 600만명의 희생자가 나오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유대인이 점령지역에 존재하고 있어야 하지만 1933~1945년 사이에 출국 장려책으로 인하여 적어도 300만명의 유대인이 독일 점령지역 외로 이동하고 있다. 때문에 60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려면 1933년 이전에 적어도 900만명 전후의 유대인이 독일 점령지역에 존재할 필요가 있는데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해서 명확히 말할 수가 없지만 독일 점령지역 내에 있는 유대인의 숫자를 30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경우도 있다.
5. 연합국의 선전과 증거 날조
전후 “홀로코스트”의 내용은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전쟁 직후에 다하우,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의 수용소에도 처형용 가스실이 존재했고 그런 가스실에서 유대인이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오늘날 이러한 수용소에서는 가스실에 의한 처형이 없었다고 설명이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후에 알려져 있던 이러한 수용소에서의 가스실 처형에 관한 목격증언들은 무엇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남는다.
이 때문에 대량학살의 역사적 증거들은 위조 또는 고의로 잘못해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개된 다수의 사진이나 영화 필름들은 연합군에 의한 반나찌 선전으로 날조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전후에 독일인에게 보여진 홀로코스트 희생자 촬영필름 중에는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후에 처리되고 있는 독일의 민간인 사진이 있다. 또 우리가 보통 볼 수 있는 사진들은 기아나 티푸스의 희생자를 찍고 있으며 가스실의 희생자가 아니다.
아우슈비츠의 시체소각동을 1945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지금은 존재하는 굴뚝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굴뚝은 전후에 지어진 것이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전후에 오랫동안 처형용 가스실과 시체소각소라고 알려진 것을 공개하고 있었으나 많은 의문점이 지적되자 전후에 재건된 것임을 인정해서 설명을 변경하고 있다. 또 마예다네크 수용소에서 전시 공개하고 있던 처형용 가스실도 설명이 바뀌었다. 이와같이 현지의 물증들이 전후에 변경되는 경우가 있다.
또, 연합국이 주도한 전범 재판에서도 많은 독일인에 고문에 의해 자백한 경우가 있어 자백에는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 특히 나찌 지도자들이 유대인에 대해서 서술했다는 주장들 중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학려는 연합국의 의도를 실현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취급을 정당화 하는 데 이용하려는 유대인의 음모가 있다. 또, 독일에 대한 광기와도 같은 이야기를 널리 유포시켜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접경국가를 위협하여 소련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 소련의 이익과 부합된다. 이스라엘에 투입된 자금의 양과 독일로부터의 배상금만으로도 이스라엘이 이 음모를 계속하려고 할 만한 강력한 유인이 된다.
6. 그 외
- 대다수의 학자나 역사가들은 대량학살이 허구라고 실제로 인정하면 실직할 위험성이 있기 떄문에 이를 인정할 용기가 없다.
- 소련이나 중국에서 학살당한 수에 비하면 홀로코스트는 소규모의 것이다.
- 신대륙에서 널리 발생한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학살에 비교하면 홀로코스트는 소규모의 것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전개
1. 초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주장은 전후에도 있었으며 1960년대에는 통설적인 대량학살에 대한 이의 표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전 말기에 나찌 지도자들은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고 있으며 재판에 회부될 것이 거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각 수용소 소장에게 기록이나 시체 소각로를 비롯하여 대량학살의 흔적이 될 것을 소멸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전후에 친위대 지도자 상당수는 독일을 떠나서 습득한 선전기법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또는 비평가가들이 주장하도록 역사의 개서를 시작했다과 여겨진다. 이를 토대로 최초의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는 나찌 보인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프랑스의 역사가 폴 라시니에 (Paul Rassinier, 1906 - 1967) 는 1948년 저서 월경 (Passage de la Ligne)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이의를 제기했고 1964년에는 유럽 유대인의 드라마 ( Le Drame des Juifs europens) 를 출판하여 가스실을 비롯한 전후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라시니에는 사회주의자, 비폭력주의자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유대인을 스위스에 탈출시키는 활동을 했었다. 이 때문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와 도라 수용소에 수용되으며 전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되뇌에르 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본인이 나찌의 희생자인 라시니에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고 있기에 수정주의자들은 라시니에를 시오니스트, 연합국, 소련의 거대한 음모에 의해 홀로코스트가 날조되었다는 것을 고발한 최초의 부인론자로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저작을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 학술적인 연구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라시니에 본인의 반유대주의적 생각이 그의 주장에 영향으르 주고 있으며 부헨발트는 절멸수용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가스실을 목격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라시니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자신이 단언했던 것과 모순되는 정보는 무시하고 있는 점도 비판되고 있다.
라시니에와 비슷한 시기에 루마니아계 유대인인 부르그(Burg)도 전후에 가스실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의문을 제기하여 수용소를 스스로 조사했으며 유대인인 그가 홀로코스트에 의문을 표명한 것은 흥미롭다고 여겨진다.
초기의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 중 한명으로는 히틀러를 신봉하는 미국인, 프란시스 파커 요키 (Francis Parker Yockey, 1917 - 1960) 가 있다. 요키의 1962년 저서 “제국” (Imperium) 에는 “역사와 정치의 철학” (philosophy of history and politics) 이라는 부제가 있으며 반유대주의적 분석으로 가득하다.
미국 콜롬비아 대의 역사가 해리 엘머 번즈 (Harry Elmer Barnes, 1889 ~ 1968) 는 만년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전개했다. 그는 뛰어난 경력을 갖으며 입장적으로는 주류에 속하는 역사가로 수정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이다. 전간기에는 반전적인 저술가였으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과 일본에의 비판은 미국의 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 선전에 지나지 않으므로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번즈의 반전적이고 주류에 속하는 역사 수정주의적 저장은 존중받고 있다.
만년에 그의 저작으로 홀로코스트를 전시 선전에 포함된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대부분의 주류 역사계는 번즈의 실적을 평가하면서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일부에서는 번즈를 모방하는 경우가 있고 제임스·마틴 (James J. Martin) 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의 일부는 주장에 신뢰성을 가하기 위해 번즈의 명성을 이용하고 있으며 윌리스 카르토(Willis Carto) 가 가장 현저한 예이다.
또 눈에 띄는 인물로 미국 역사가인 데이비드 호건 (David Hoggan, 1923 ~ 1988) 이 있다. 1961년에 발표한 제2차 대전의 원인을 논한 ‘강제당한 전쟁’ (Der Erzwungene Krieg) 에서 그는 1939년 이전의 반유대주의적 활동이 갖는 영향을 경시 또는 정당화 했다고 비판되고 있으며 1969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최초의 책인 ‘600만명의 속설’ (The Myth of the Six Million) 을 집필하여 로스앤젤리스에 본거지가 있는 반유대주의 문헌의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눈타이드 프레스 (Noontide Press) 에서 간행되었다. 호건은 복수의 일류대학에서 교수로 재임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 부인론 초기의 스타가 되었다.
2. 1970년대
1970년대에 대량학살 부인 운동은 큰 고조를 보인다.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체가 전후 엄격하게 규제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관계자를 포함한 많은 독일인들이 전후 영원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4년 아우슈비츠 근처에서 근무했고 전후에는 천연고무 대체 소재의 개발에 종사하고 있던 전 친위대원 티에스 크리스파센 (Thies Christophersen, 1918 - 1997) 은 ‘아우슈비트의 거짓말’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해서 반향을 일으켰다. 크리스파센에 의하면 확실히 독일의 대유대인 정책에는 비판될 점이 있지만 전후의 아우슈비츠 상은 너무 과장된 것으로 적어도 크리스파센이 근무하던 당시, 아우슈비츠의 그 주변에 수용되었던 유대인들과 피수용자들은 학대되고 있지 않았다.
즉 전쟁 말기라면 예외지만 대전 중 절반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대우는 전후에 알려진 정도가 아니며 식사를 비롯한 제 대우가 열악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피수용자를 위한 성매매소가 있었으며 당시 아우슈비츠에 근무하던 독일인 중에도 유대인과 우정을 나누어 전후에도 편지 왕래를 계속한 사람이 있는 사실으르 들어 전후의 아우슈비츠 상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또 크리스파센 자신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위생상태의 악화를 염려하여 유대인 처우를 개선하도록 상사에게 제안했었다던지 유대인 중에는 독일보다 소련을 무서워 하여 소련에 대한 독일의 승리를 기대하는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도 적고 있다.
1976년 아서 바츠 (Arthur Butz, 1933 ~ )는 저서 ‘20세기의 허풍:유럽-유태인 멸종설에 대한 이의 제기’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Case Against the Presumed Extermination of European Jewry)를 간행했으며 1977년 데이비드 어빙은 ‘히틀러의 전쟁’ (Hitler's War) 을 간행했다. 이들 저서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근거로서 중시하고 있다.
1978년 프랑스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서 감정을 전공하고 있는 로베르 푸리송(Robert Faurisson)은 프랑스의 르몽드 지에 “가스실”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르르 발표했으며 이는 포리송 사건이라고 까지 불리웠다. 포리송은 가스실은 기만(fraud) 이라고 주장하며 “이 기만의 희생자는 독일의 지배자를 제외한 독일인과 모든 팔레스타인 인이다.”라고 주장하여 이 문제가 팔레스타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1979년, 대전 중 독일의 공군부대 장교로 스스로 아우슈비츠를 단기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서독의 판사 빌헬름 슈티그리히(Wilhelm Stglich, 1916 - 2006)는 재판관의 시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시작으로 하는 전후의 전범재판을 철저하게 재검 증명해 홀로코스트를 검증하는 “아우슈비트의 신화” (Der Auschwitz-Mythos) 를 간행했지만 1980년 슈투트가르트 재판소의 명령으로 독일 국내에서 반포금지가 되었고 발매 당일에 서점에서 회수되었다
3. 역사 재검토 연구소
1978년, 미국의 네오나찌 윌리스 카르토 (Willis Carto) 의 주도로 역사 재검토 연구소 (IHR) 가 창설되었다. 이는 홀로코스트에 이의를 주장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며 영어권에서 재평가론의 확대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IHR은 과학적인 역사 수정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네오나찌적인 배경을 갖지 않는 제임스 마틴 (James J. Martin) 또는 사뮤엘 에드워드 콘킨 3세 (Samuel Edward Konkin III) 등의 상징적인 지도자를 환영하며 라시니에나 번즈의 저작을 판매하여 대량학살 부인론이 네오나찌 이외에도 폭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IHR에 비판적인 견해에 의하면 IHR 지지자의 대부분은 네오나찌 또는 반유대주의자로 주류적 역사가에 의한 명색뿐인 서적을 판매하기는 하지만 실제 출판, 배포하고 있느느 자료의 압도적 다수는 대량학살을 둘러싼 사실에 의문을 나타내는 것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IHR 웹사이트 내의 “About the IHR”에서는 IHR은 대량학살을 부인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량학살에 대한 주류적 견해들은 “거짓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IHR의 정기 간행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많은 유대인이 강제 수용소나 게토에 추방된 사실, 혹은 많은 유대인이 세계대전에서 살해된 사실에 대한 논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증거를 제출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유럽, 유대인을 멸종시킨다는 독일의 계획은 존재하지 않고 600만의 유대인이 전시중에 죽었다는 추정은 믿을 수 없는 과장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증거에 의해서 “멸종파의 무리”(exterminationists) 는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약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대부분 가스에 의하여 몰살되었다는 것은 나쁜 농담이며 이것은 기독교인이나 교양있고 성실하며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쁜 농담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점을 들어 평론가들은 IHR이 스스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는 아니라고 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성격이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 익스프레스 (The San Francisco Express) 지에서 폴 레이버 (Paul Raber) 는 수정주의자들의 말장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IHR에게 대량학살을 부인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IHR이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게임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하나 둘씩 그 말에 제멋대로의 의미를 준다 … (IHR의 장인)마크 웨버에 의하면 “홀로코스트라는 말이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 박해나 몇건 정도 산발적인 살해를 의미한다면 그런 것은 존재했으며 실제로 발생하나 1건의 잔혹한 사건을 말하면 그것은 긍정한다. … 즉 IHR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IHR은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가스실이 아우슈비츠에 존재하는 가를 검증한 증거”에 대해서 5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있다. 이에 아우슈비츠 생존자이니 멜 멜름스틴(Mel Mermelstein)이 증거를 제출했지만 이것은 무시되었다. 이에 멜름스틴은 IHR 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5만 달러의 상금과 더해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4만달러를 받았고 재판소는 홀로코스트의 발생은 법적으로 논할 여지가 없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선고했다.
최근에는 IHR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 윌리스 카르토는 추방되었고 그를 잇는 마크 웨버 (Mark Weber) 의 지도하에 IHR은 보다 공공연히 네오나찌 지향적이니 성격이 되었다. 카르토는 IHR에서 추방된 뒤 번즈 리뷰 (Barnes Review) 라는 잡지를 창간했으며 이것도 홀로코스트 부인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이다. IHR을 비롯한 이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미국내에서 금전적 지지층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때문에 IHR 을 비롯한 부인론 그룹의 대변인들은 중동을 방문하여 현지의 과격파 그룹과 연대를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IHR은 반대그룹으로 부터 폭력에 의한 습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특히 1984년 7월 4일에는 IHR이 적대하는 그룹에게 방화공격을 받아 많은 자료가 소실되는 일이 발생했으며 부인론자 측은 이를 규탄하고 있다.
4. 키그스트라 사건
1984년 캐나다의 교사인 제임스 키그스트라(James Keegstra) 는 수업중에 자료의 일부에서 대량학살을 부인하고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디었다. 그와 변호사인 더그 크리스티 (Doug Christie) 는 캐나다 형법 319조2항이 캐나다 헌법 제9조 b항의 위반이라고 주장했으며 사건은 최고재판소까지 상소되었다. 여기서 키그스트라가 위반하나 법률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지만 이는 정당한 제한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키그스트라는 유죄가 선고되어 해고되었다.
5. 브래들리 스미스와 CODOH
1987년, 브래들리 스미스 (Bradley R. Smith) 에 의해 “홀로코스트에 관한 공개 토론 위원회”(CODOH) 라는 그룹이 창립되었다. 이 그룹은 홀로코스트를 문제삼는 신문광고를 미국내 대학생 신문을 중심으로 개제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게재의 승낙여부는 신문에 따라 다르지만 편집장이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대부분의 신문은 표현의 자유를 이루로 혹은 스미스의 의견은 불쾌함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게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판단을 옹호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이 광고캠페인에 의하여 1990년대 초 많은 학생 신문에 CODOH 의 광고가 게재되어 전국적인 논의를 야기해서 뉴욕 타임즈같은 대형 신문에서도 사설의 소재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학생신문이 광고를 거부하게 되어 과거와 같은 논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으며 브래들리 스미스는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보급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취하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6. 에른스트 츤델 재판과 로이터 보고서
캐나다에 거주하는 에른스트 츤델은 사미시다트 출판사(Samisdat Publishing) 라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출판사는 영국의 네오나찌 지도자 리철드 바랄 (Richard Verrall, 본명은 리처드 하우드)의 저서 ‘정말로 600만명이 죽었는지?’ (Did Six Million Really Die?) 라는 제목의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관한 서적을 출판하고 있었다. 1985년 츤델은 “홀로코스트 부인론 저서를 출판했다”라고 하여 허위보도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온타리오 지방 재판소에 의하여 유죄선고를 받고 15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많은 활동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호소하고 츤델이 갖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려고 개입했다.
1992년 캐나다 최고재판소는 “허위보도”법은 위헌이라고 선언하여 그의 유죄판결은 반송되었으나 바랄의 “정말로 600만명도 죽었는지?’에 대해서 캐나다 최고재판소는 “역사가의 실적을 착오하거나 증인의 증언을 잘못 인용하거나, 증거를 날조 또는 존재하지 않는 공공기관을 인용하고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 재판에 대하여 1988년 츤델이 변호인측 증거로 미국의 프레드 로이터에게 의뢰해서 작성한 “로이터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가스실로 알려져 있는 건조물을 조사하여 기술적인 문제로 가스에 의한 살인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리포트에 대해서는 “로이터는 공학의 학위가 없으며 실적에서도 전문가로서 능력이 부족하다”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재판에서도 로이터는 증언을 했지만 그는 철학 석사로 공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비르케나우에 관한 자료를 충분히 접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지적되어 “전문가에 의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 츤델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자신의 주장을 선전했다. 이 웹사이트는 고소당해서 2002년 1월, 캐나다 인권 재판소가 인권법에 위반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리고 츤델에게 상기의 메세지 전술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2003년 2월에는 미국 이민귀화국이 테네시주에서 이민법 위반 용의로 츤델을 체포하여 며칠후에 캐나다에 신병을 송환했고 여기서 츤델은 난민을 인정받으려 했다. 츤델은 2005년 1월까지 구류되었다가 이후 독일에 추방되었는데 독일의 법률에 의하면 츤델은 형사소추될 가능성이 있다.
7. 아노 메이어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미국내에서 좌익으로 간주되는 역사가 아노 메이어는 조부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이며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1980년대 말 “천국은 왜 어둡지 않았는가?”에서 (1) 독일은 당초부터 유태인을 멸종할 계획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2)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유대인의 상당수는 고의에 의한 살해라기 보다는 병사나 기아의 희생자라는 고찰을 말해 논의를 야기하고 있다. 메이어의 문제 제기는, 뉴스위크에서도 크게 다루어진 바 있다.
8. 루돌프 리포트
1993년 당시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화학박사 과정에 있었던 게르마 루돌프가 로히터 보고서와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반박의 시도는 인터넷상에서 발표되었던 Richard J. Green 의 것이 있지만 이것은 정치적인 면에 대한 것이고 화학 학위가 있는 사람에 의한 학술적 반론은 거의 전무한 것 같다. 그럴만도 한 것이 루돌프는 리포트 내에서 “화학을 이용해도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화학적인 논쟁 자체는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며 게르마 루돌프는 채취한 샘플의 분석 의뢰를 위해 무단으로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무에 동 연구소에서 해고되었다.
9. 데이빗 어윙과 립슈타트 재판
데이비드 어빙은 1977년에 “히틀러의 전쟁”을 발표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어윙은 미국 작가인 데보르 립슈타트와 그의 저서 “홀로코스트 부인”(Denying The Holocaust) 이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을 실시했다고 하여 그녀와 출판사인 펭귄 북스 (Penguin Books) 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했다. 립슈타트의 저술에는 어윙이 증거를 고의로 왜곡하거나 바꾸어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맞추고 있다는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법은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개인의 세평 보호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립슈타트와 출판사에 대하여 진실을 부당하게 경시하고 있지 않는지, 또 립슈타트의 기술이 진실, 또는 진실하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즉 어윙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했는지,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립슈타트와 펭귄사는 영국의 변호사 엔소티 쥴리어스 (Anthony Julius) 와 캠브리지 대의 역사가 리처드 에바스 (Richard J. Evans) 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에반스는 2년간에 걸쳐서 어윙의 연구를 조사해서 어윙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출했으며 동시에 어윙이 날조된 문서를 날조된 것을 알면서도 정보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내었다. 한편 어윙측의 증언자로 호출된 사람중에는 미국의 진화 심리학 교수이니 케빈 맥도날드 (Kevin B. MacDonald) 가 있었다.
이 재판에서 재판장 찰즈 그레이 (Charles Gray) 는 에바스 및 그 외에 제출된 증거를 중시하여 립슈타트를 지지하는 장문의 판결문장을 써서 어윙을 “우익적이고 친나치적인 논객” (“right-wing pro-Nazi polemicist”) 으로 규정했으며 립슈타트와 에반스에 의한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홀로코스트 부인은 범죄이며 어윙은 1989년 연설을 했던 이유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어윙은 오스트리아에 입국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2005년 오스트리아에 입국하여 체포되었다. 재판의 죄상 인정여부시에 어윙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용의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의견을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즉 어윙은 “나는 당시의 지식을 기본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1991년 아이히만 문서를 알았고 이때부터 이미 그러한 일은 말하지 않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나찌는 확실히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어윙에 대한 판결을 들은 립슈타트는 “나는 기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검열에 의해서 싸움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과 싸우는 것은 역사의 진실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덧붙여서 어윙은 빈의 주 재판소에서 금고 3년의 실형을 판결받았지만 공소심으로 나머지 형기는 면제되었지만 오스트리아 내무성의 결정으로 어윙은 국외 퇴거 처분을 받았다.
10. 프랑스에서 부인주의의 확대
프랑스에서 홀로코스트 부인은 1990년대의 부인주의 (ngationnisme)로 현저해졌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적어도 1960년대에 피에르 기욤(Pierre Guillaume) 등의 프랑스 극좌 정치가 중에 존재했다. 1990년대에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적 지도자인 좌익계 철학자 로제 가로디(Roger Garaudy)가 가스실을 비롯한 홀로코스트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여 이스라엘이 이러한 내용을 이용해왔다고 평했다. 가로디는 좌익계 지식인이었으며 1990년대에 이슬람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아랍제국에서 이 문제의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근래에 프랑스의 극좌 및 극우 운동가는 모두 부인론을 과격화시키고 있으며 그 주장은 자주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넘어 광범위한 반유대주의로 변하고 있다 이 중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대량학살과 성서에 있는 가나안 학살을 묶어 시온주의에 대한 비판, 반유대주의의 정당화 일반화 등 이른바 “음모론적 유대인 공포증”선동이 포함된다.
11. 인터넷 상의 논쟁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대량학살 부인론 그룹이 새롭게 국제화되었다 많은 정부당국자들도 인터넷에서 증오를 부추키는 그룹이 메세지를 광범위한 독자에게 전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로써 결과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12. 홀로코스트 산업론
최근에는 유대인 지도부가 대량학살을 이용하여 금전적 또는 정치적 이익을 얻고 있다는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 혹은 절멸 비즈니스(Shoah business) 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1996년 스위스의 주요 은행에 대하여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휴면계좌에 있는 예금의 반환을 요구하는 유대인의 집단소송이 발생했다. 이에 대통령과 경제장관은 이를 공갈협박이라고 비난했다가 후에 사죄를 하게 되었다. 1998년에 휴면 계좌의 조사는 속행중이었지만 은행측이 향후에 지불을 요구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12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10월 13일 영국의 타임즈는 스위스의 독립청구 심판소에 의한 조사 결과를 알렸는데 휴면 계좌의 총액은 6천만 달러에 지나지 않으면 대부분 소액이었다. 1만건에 가까운 청구중에 확인할 수 있던 계좌는 200건으로 유대인 정치학자 노먼 핀켈슈타인은 2002년 이러한 유대인 단체의 행동을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홀로코스트 산업”을 저술했다.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이며 홀로코스트 자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정하고 있지만 유대인 단체에게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산업”은 어디까지나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사복을 채우는 유대인 엘리트” 비판에 관한 것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들은 홀로코스트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부인론자들에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핀켈슈타인 본인은 자신의 연구가 부당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핀켈슈타인의 연구는 촘스키나 라울 힐버그등을 제외한 주류 유대인 사회의 학자들 대부분에게 거부되고 있다.
한편 반대로 비달 나케의 경우에는 역사 수정주의를 비판해서 역사자료를 꾸며내서 위조를 위한 기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3. 이슬람 국가의 홀로코스트 부인론
이슬람 국가에서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에의 동정론이 결과적으로 시온주의를 용인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비극으로 연결되었다는 반발로 인해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근년 급속히 대두되고 있다.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 정치그룹만이 아니라 시리아나 이란의 정부 각료가 홀로코스트를 공공연히 부인하는 발언을 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이란의 아후마디 네자드 대통령이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발언하여 비난받았다. 이러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이슬람권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움직임으로 명예훼손방지동맹(ADL)의 부이사 케네스 제이콥슨(Kenneth Jacobson) 은 하레트 (Haaretz) 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방 학자에 의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적용하는 것은 이슬람권에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팔레스타인이 그 대가를 치뤄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이란 대통령의 발언은 그가 이런 두가지 접근방법을 혼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PATA의 설립자 중 한명으로 PLO의 지도자 중 한명인 마흐무드 압바스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1982년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 학위논문은 “나찌와 시오니즘 지도자간의 비밀관계”라는 제목이었다. 덧붙여 소련은 1960년대부터 나찌스와 시오니즘 지도부의 연관설을 주장해왔으며 그가 박사논문을 기초로 1983년 저술한 “또하나의 얼굴 : 나찌와 시오니즘의 밀월관계”(The Other Face: The Secret Connection Between the Nazis and the Zionist Movement) 에른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시오니즘의 관심사는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과장하고 이익을 확대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들의 국제적 여론을 시오니즘에 연대시키기 위하여 600만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많은 학자가 지금까지 600만이라는 숫자를 논의한 결과 유대인 희생자를 수십만으로 축소수정하는 놀랄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압바스는 2006년 3월에 하레트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상세한 숫자를 논의할 생각이 없다. 나는 역사가의 논의를 인용한 것이며 다양한 수의 희생자 숫자가 언급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1200만명을 논하고 어떤 경우에는 80만명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숫자 그 자체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유대민족에게 대한 허락할 수 없는 범죄이며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범죄이다. 대량학살은 무서운 것이고 내가 그것을 부인했다고는 할 수 없다.
홀로코스트 부인은 현재 다양한 아랍 지도자들이 선전하고 있으며 이것이 중동의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2002년 8월 아랍 연맹의 씽크탱크에서 UAE 수장인 술탄 빈 자이드 알 나하얀(Sultan Bin Zayed Al Nahayan) 이 의장을 맡는 자이드 협동 추구센터(Zayed Center for Coordination and Follow-up) 는 홀로코스트 부인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하마스의 지도자들도 홀로코스트 부인을 선전하고 있으며 2000년 4월 하마스의 언론 릴리스에서는 “이른바 홀로코스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창작되어 주장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4. 아후마디네쟈드
2005년 12월의 연설에서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후마디네쟈드는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유포된 옛날 이야기라고 말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아후마디네쟈드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설을 날조해서 신이나 종교, 예언자보다 높은 위치에 그것을 놓았다”고 말했으며 유대인 박해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한 행동으로 그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이며 이스라엘은 이런 국가에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층 더 나아가 이스라엘 유대인을 미국에 이주시키도록 제안하고 있다.
2006년 4월 24일에는 궁극적으로 진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규모를 다시 확인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발언은 곧바로 격렬한 국제적 논의를 불러일으켜 이스라엘, 유럽, 미국의 정부 고관들은 즉각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나찌식 해결을 제안한 이랑 대통령을 비난했고 독일연방의회 6개 정당 모두가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비난하는 결의문에 서명했으며 미국에서는 이슬람 공공문제 협의회(Muslim Public Affairs Council)까지 나서서 아후마디네쟈드의 발언을 비난했다.
하지만 하마스의 정치지도자 하레드 마샬은 (Khaled Mashal) 아후마디네쟈드의 발언이 용감하다고 평가했으며 “이슬람 교도들은 이란이 자신들의 생각을,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구상을 대변해주기 때문에 이란을 지지한다”라고 말했다.
아후마디네쟈드는 최근 로버트 포리송 같은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을 불러들여 홀로코스트를 검증하는 회의를 열려하고 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에의 비판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대해 이스라엘이나 유대인 사회는 당연히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 저명인이나 학자의 대부분도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연구센트(The Holocaust Research Center) 의 소장 윌리엄·살맨 (William Shulman) 은 부인론에 대해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가쟌 보들리에르도 “멸종 행위를 잊는 것은 멸종 행위의 일부”라고 발언하고 있다.
2006년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그런 것은 없던 일이거나 과장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질책을 하고 싶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완미한 사람들의 일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행해지더라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2007년에 행해진 UN총회 본회의에서도 홀로코스트를 “역사적 사실”로 재확인해서 학살을 부정하는 언동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미국의 주도로 제출되어 회의 참가국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란 대표는 직접적인 비난이 있었기 때문에 채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1. 홀로코스트 부인 비판론의 주장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구태여 사용하지 않더라도 주류파의 역사가들도 홀로코스트의 여러 측면에 대해 연구를 통해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명망이 높은 역사가들 중에 홀로코스트의 기본적인 규모나 요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서든 감리교 대학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의 역사가 도널드 뉴이크 (Donald Niewyk)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핵심적인 부분은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혐의를 둘 것이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가들은 홀로코스트의 설 중에서 증거가 불완전하거나 애매한 부분에 주의를 갖고 있으며 이런 부분이 결코 사소하지는 않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에 있어서 히틀러의 역할, 박해에 대한 유대인의 대응, 나찌 지배하의 유럽 내외에서 방관자의 반응과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류 역사학자 대부분은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역사학적 연구가 아니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나아가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논의하는 연구가 정당한 연구분야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도 있으며 그에 따르면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부인론의 논점들 다수는 수많은 사료와 모순되고 있음을 지족하고 있다. 데보라 립슈타트로 대표되는 이러한 대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정당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방법이나 동기에 대해 의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응의 목적에 대해서 립슈타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부인론자의 주장에 응하려고 시간을 소비하거나 노력을 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조사 결과를 자유 마음대로 위조하거나 맥락이 없는 인용을 하거나 혹은 다수의 증언을 그냥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의에 응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진짜 학자와 달리 부인론자들은 데이터나 증거, 비유 등등을 어떤 것이라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자체에 심취하고 있어 본인들의 ‘조사결과’를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해 끼워 맞추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비판자에 의하면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불합리하다고 널리 간주되는 것은 합리적 조사의 대원칙이 되는 “증거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 주장자는 자신의 의제나 변증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 증거의 가치는 그 본질에 따라 결정되는데, 예를 들어서 소문은 증거가 되기 힘들지만 목격자나 확정일자가 있는 문서는 증거로 인정된다.
- 일단 증거가 제시되면 주장자의 제기는 독립되고 증거가 정밀조사되며 주장자에게 입증책임이 생긴다.
- 주장자의 대화상대가 주장자의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려면 대화자는 자기 자신의 주장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증거는 가짜라는 주장을 했을 때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대화자로 옮겨지며 증거기준은 본래의 주장을 수립한 것과 동일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증명 책임의 전환)
- 이렇게 되면 주장자의 증거는 일단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되고 증거로 한 가치능력에 힘이 생긴다.
- 대화자가 주장자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를 요구하거나, 회의적인 추정 또는 가상의 가능성을 제시한것이 바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주장자의 증명 책임은 불합리한 수준까지 상승되게 된다.
홀로코스트의 경우에 이를 적용하면 생존자, 목격자, 역사가는 전체적으로 주장자로 간주할 수 있다. 생존자, 목격자, 역사가에 의해서 제출된 증거는 압도적잉고 홀로코스트가 실재했다는 것은 “합리적인 혐의를 넘는 정도”로 판명되어 있어 증언된 것 같은 상태로 홀로코스트가 일어났었다는 것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나치스 자신이 작성해서 전쟁으로 없어지지 않았던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와 사진을 무시하거나 최소한으로 평가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의심할만한 극히 명확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한, 주장자에 대해서 그 증거가 증명된 수준 이상으로 “완전하고 진실한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약 홀로콧트 부인론자가 증거를 통해서 혐의를 제기하려면 증명 책임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측에 전환되며 그 기준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 된다. 부인론자는 적어도 홀로코스트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들이 수천 이상의 감식자들에게 날조되어서 잘못 전해져 오고 있음을 “개연성의 균형”을 통해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까지 논하는데 필요하다고 인정될 만한 “증거의 원칙”을 부정론을 제기하는 측이 채워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다. 그때까지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불합리한 견해라는 인식이 계속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위조된 서류를 유럽 대륙 전체로 정착시키는 대규모의 “유대인의 음모 내지 계획”이라는 것을 생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부인론자가 증거로 삼는 문서는 일리야 엘렌부르크(Ilya Ehrenburg)의 소련 반 파시스트 연맹을 원점으로 하는 소련의 반파시스트 운동은 선전일 뿐이며 당연히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뉘른베르크 재판의 법정에서 증언한 독일의 정부 고관, 독일 병사나 나찌 친위대원, 강제 수용소 직원에 대해서 고문이나 자백 강제가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전제가 된다.
이 부분에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일반적인 음모론과도 다르다. 즉, 음모론은 ‘증거의 원칙’에 준거하려고 하지만, 제시하는 증거가 비판자에게서는 불충분으로 보이는데 반해,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비판자에 대해서 불합리하게 높은 증거 기준을 요구하며 동시에 역사가의 증거는 불충분하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부인론이 주장하는 ‘사실’이나 ‘증거’에 관해서는 재판정에서 제출된 증거를 포함해서 수많은 것이 제출되고 있으나 독립된 조사에 의해서 이런 주장들은 결함이 있거나 편향된 증언, 또는 의도적으로 날조된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어서 재판에서 음미되거나 유명지의 게재 기준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대항자들은 증거를 바꾸거나 제조되거나 한 수많은 사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축적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부인론의 주장에 대항하고 있는 활동가인 켄 마크베이하의 1994년 인터뷰에서는 부인론자의 ‘수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부인론자가 ‘아우슈비츠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 캠벨(K.K. Campbell)의 유명한 저서 82페이지에 써 있다’라고 하면 미연방의회 도서고나에 가서 캠벨의 책에서 82페이지를 열어 보면 좋다. 그러면 실제로는 ‘다하우에서는 좋은 날씨였다’라고 씌여 있다. 의회 도서관에 갈 틈이 있는 인간은 거의 없으니까 이런걸 그냥 말하는 것만으로 속이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것을 조사해보면 누구라도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했다해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인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라고.
Eye잡지(온라인 웹 잡지),1994년11월10일
한편 서로 다른 사실의 합성에 의해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빈번히 사용되는 예중에 매우 얇은 가스실 문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가스실이 실제로는 사람의 몰살에 사용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준다. 만약 사람이 살해될 정도의 독가스가 살포되었다면 문을 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실제의 가스실 문이지만 이 구제를 위한 가스실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 홀로코스트 부인론의 주장이나 제출된 증거는, 중립적인 학술적 제시를 벗어나 개인적인 공격으로 시종하고 있는 예가 많이 증명되고 있다. “자신과 반대 의견을 말하는 모든 증거에 대해서 자신이 갖는 경멸적인 생각을 가장 신랄한 도덕적 어조로 표현"'”하거나 “위조 문서를 채용해서 진리의 색조를 바른다” 특히,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에 의한 출판물이나 성명의 상당수는 반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고 홀로코스트 부인 대항론자에 대해서는 “시오니즘 협력자”, “유대 편애자”등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빈번히 사용한다.
2. 홀로코스트의 증거
홀로코스트의 존재와 그 본질은 매우 관료적이었던 독일 정부와 독일군 자신에 의해서 상세하게 문서화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수개국 사이에서 장기간에 걸쳐 지휘, 통괄된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진 중대사업이며 증거가 되는 서류를 대량으로 남기고 있다. 나찌 독일은 패색이 짙어지자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없애려고 시도했지만 중요한 증거 자료는 남겨진 채였다. 전쟁의 종반에 나찌 독일의 전력은 급속하게 붕괴했으므로 독일 내부에서 증거를 소멸하는 시도는 거의 실패했다.(나찌 독일의 경우 교전중에 베를린을 소련군이 점령하여 바로 공공기관들을 장악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진주군이 도착하는데에도 수주이상이 걸렸다) 종전 후에 수톤 분량의 문서가 발견되었으며 각지의 강제 수용소 근처에서는 다수의 시체가 수천 단위로 부패하지도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물적 증거나 문서에 의한 증거 중에는 살해당한 유대인의 수에 대한 다수의 보고서, 수용소에 유대인을 반입한 열차의 기록, 수톤 분량의 시안 화합물이나 그 외의 정리된 독극물, 사진, 필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수용소의 구조물 자체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루블린의 SS대대 지휘관 헤르만 헤훌레(Hermann Hfle)가 1943년 1월 11일, 베를린의 SS상급대대 지휘관 아돌프 아이히만 앞으로 보낸 ‘헤후레 전보’ (Hfle Telegram)로, 라인하르트 작전 (Einsatz Reinhard) 이 시작된 1942년에 루블린(마예다네크), 베제크, 소비브르(Sobibr), 트레블링카 등 4개 강제 수용소에서 합계 1,274,166명이 사망한 것이 보고되고 있다. 이 전보는 2000년에 영국의 큐(Kew)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자료 보관 공문서고에서 발견되었다. 이 전보에 기록된 숫자는 친위대 통계관인 리하르트 콜헤어(Richard Korherr) 박사가 1943년 1월 18일에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서 내려진 명령에 의해 동년 3월에 작성된 이른바 콜헤어 보고(Korherr Report)의 내용과 합치하는 것이다. 콜헤어 보고에서는 소극적인 숫자로 총 2,454,000명의 유대인이 멸종 수용소에 추방되어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살해되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아인자츠 그루펜이라는 살인 부대의 상태를 완전하게 파악한 보고서는 미 육군이 게슈타포의 문서 보관소를 수색했을 때 발견되었다 전쟁 범죄 재판등에서 증언한 원 부대원에 의해서 그 정확성은 증명되고 있다.
이 사진은 아인자츠그루펜A에 의해서 실행된 유대인 처형을 나타내는 지도로, 부대의 대장에 의해서 1941년 12월에 작성된 보고서이다. “비밀 제국 문제”라고 제목되어 있는 이 지도는 발트해 연안에서 총살한 유대인의 수를 나타내고 있고 하부에는 “아직도 우리의 수중에 있는 유대인의 추정수는 128,000”이라고 되어 있다. 특별 행동 부대의 보고서 다수는 옥외 처형만으로 150만명 이상이 살해된 것을 상술하고 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대인이다.
또 수많은 사진들이 대량으로 홀로코스트의 증거가 된다. 아인자츠그루펜 병사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앨범에 1941년 9월(유대인 정월)에 촬영한 사진에는 부대 멤버가 우크라이나의 비니사(Vinnitsa)에서 마지막 유대인을 살해하려고 준비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유대인 다수를 묻어놓은 구멍에 무릎을 꿇게 하고 “비니사의 마지막 유대인”이라고 부언 설명이 되어 있다. (비니사의 그 주변의 유대인 28,000명은 모두 학살되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는 독일이나 독일 점령지역에 진공한 연합군이나 제2차대전 막바지까지 독일을 추종하고 있던 추축국에 의해서도 목격되고 있다. 제출된 증거 중에는 연합군이 수용소에 발을 디뎠을 때 해방된 죄수들이나 부근의 거주자(그 중에는 수용소 내에서 노동하는 사람도 있었다)의 증언 이외에 수용소의 존재를 나타낸 필름이나 스틸 컷도 존재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수천명의 사람들에 의한 증언은, 붙잡힌 독일의 정부 고관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그 외의 기회에 행한 증언과 함께 가장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이러한 증인은 고문을 받은 것이며 나ㅏ찌 당원인 루돌프 페르디난드 헤스가 모르는 영어로 ‘피에 물든 자백조서’에 서명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은 적절한 사법 수속에 준거하지 않았다과 주장하면서 이러한 증언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자의적인 사료 조작인 것으로 예를 들ㅇ서 헤스의 증언은 서명한 자백 조서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헤스는 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2부에 걸친 회상록을 작성하고 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 이외의 장소에서도 광범위한 증언을 하고 있다. 게다가 헤스의 증언은 페리 브로드(Pery Broad)같은 전 아우슈비츠 직원에 의한 서면 설명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헤스의 증언은 요한 크레머 (Johann Kremer) 가 작성한 일기나 수백명 이상의 수용소 경비관 및 희생자에 의한 증언과도 합치한다.
3. 유대인 멸종정책의 부재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쓰여지거나 서명되거나 하여 노골적이고 논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명령서, 즉 독일이나 폴란드의 유대인을 살해하라는 특별명령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확실히 현재까지 그러한 총통 명령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대량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총통명령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반제 회담에 부수한 서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보고서, 그 외의 1차 자료는 나찌 지도부 상층의 대부분이 중앙집권화 된 홀로코스트 계획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압도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특히 반제 회담의 상황에서는 틀림없이 나찌 정권 상층부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는 명령을 내렸음을 증명한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홀로코스트가 중앙에서 계획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 계획 및 실행에 있어서 나찌 지도부의 역할은 학자나 역사가에게 있어서 혐의의 대상이 아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나찌 문서에는 그들의 행동을 취급할 때, ‘살해’ 또는 ‘죽음’이라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나찌는 거의 항상 “유대인의 멸종”이 아니라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라는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이야기하거나 쓰고 있었다. 유럽의 유대인을 살해하려는 의도에 관해서 히틀러의 발언 속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그가 1939년 1월 30일에 독일 제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오늘, 나는 예언자가 되려고 한다.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적 유대인 자본이 독일 제국을 재차의 세계 전쟁에 빠뜨리게 되면 그 결과는 지구의 볼세비키화나 거기에 따른 유대인 승리가 아니고, 유럽 유대인의 멸종이다.
죄수 처형에 관한 히믈러로부터 히틀러에게의 보고서 제51호(1942년12월) 오른쪽의 사진은 히믈러가 히틀러에게 보낸 나찌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행해진 죄수 처형에 관한 보고서로 이 서류는 홀로코스트로 행해진 대량 학살 행위에 히틀러의 공모와 시인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남 러시아, 우크라이나, 비엘스크에서 무법행위의 공범 및 용의자로 4개월 동안 유대인만 363,211명이 살해되고 있다.
4. 가스실 부정
마예다네크 강제 수용소와 치클론 B투입구의 커버를 여는 소련군 병사. 이 사진은 1944년 10월 런던에서 보도한 것이다.
1943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 사이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를 촬영한 사진. 당시 건설중이던 제 2시체 소각로 복합 시설의 가스실이 촬영되었다. 치클론B가 투입된 4개의 굴뚝이 있는 구조물이 분명히 보인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는 민간인을 학살하기 위해 건설된 가스실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가스실로 되어 있는 구조물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가스실의 상당수는 전후에 일부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로이터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1988년에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채취한 표본을 검사했는데 시안 화합물이 일절 검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에는 시안화합물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40년 이상 전에 아우슈비츠에서 시안 화합물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논의에는 문제가 있다.
1990년 2월 크라코프 법의학 연구소 소장이니 얀 마르키비치(Jan Markiewicz)와 그의 조사팀은 마이크로 디퓨전을 이용해서 아우슈비츠 내에 있는 살인용 가스실이라고 의심되는 방과 이 구제용 가스실, 관리동 등에서 각각 채취한 표본중에서 시안화합물을 해석했다. 대조 조사 표본에서는 음성이 나왔지만 이 구제 가스실과 살인용 가스실에서는 시안 화합물의 잔류물이 검출되었다. 여기서 검출된 시안 화합물의 양은 표본 조사로 큰 차이가 있었다. 50년에 걸쳐서 비바람에 노출된 것이 표본의 차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시안 화합물이 발견되어야 할 곳에서 발견되어 대조 조사 표본에서는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결과가 된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의 주장 또 하나는 가스실에는 치클론 B를 투입할 구멍이 없었다는 것이다. 로이터의 말을 빌리면 “구멍이 없으면 학살도 없다”라는 주장이 되는데 BBC는 이에 대해서 이 주장을 관철하게 되면 대량의 서류를 무시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부인론자는 비르케나우의 가스실 지붕위에 치클론이 대량으로 투입될 구멍이 하나도 없다라고 주장해왔다. (가스실 중 일부는 치클론 B를 지붕으로 투입했지만 다른 가스실 중에는 창에서 투하한 것이 있다.) 지붕은 전쟁 막바지에 다이나마이트로 폭파되었고 오늘날에는 파손되어 방치되고 있다. 그러나 최초에는 4개 존재하던 구멍 중 3개는 새로운 서류에서는 구멍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멍의 위치는 목격자의 증언, 1944년의 항공사진, 1943년 지상 촬영 사진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 물적 증거는 치클론이 투입된 구멍은 건물이 건설되었을 때에 콘크티르 외벽에 존재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부인론자의 가스실에 관한 주장 다수는 잘못된 설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역사재검토연구소는 가스실에 대한 증언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헤스는 그 자백중에 가스 처리를 한 후 10분 뒤에 유대인 시체를 가스실에서 꺼내며 그의 부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틀림없는 치클론 B는 폭발물이며 헤스의 자맥은 모순되는 분명하게허위인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실수이다.
치클론 B는 폭발성이 있으려면 최저 56,000ppm의 농도가 필요하며 그에 반해서 인간을 살해하는데 필요한 양은 300ppm이다. 이것은 마크 인덱스(The Merck Index)(이)나CRC화학 물리 핸드북(CRC Handbook of Chemistry and Physics)와 같은 일반의 화학물질 참조 가이드에는 반드시 기록되고 있다. 사실 나찌 서류에도 “폭발의 위험 : 1입방미터당 75그램의 시안화 수소(HCN). 통상의 사용량 1입방미터 당 대략 8~10그램은, 폭발성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뉘른베르크 재판 자료 번호NI-9912).
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나 화장터라 하는 장소에서는 그러한 건물의 잔해에 상당하는 충분한 양의 기와조각이나 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역사가들은 해방 후에 폴란드 농민이 돌아왔을 때, 겨울이 오기 전에 집을 재건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재이용할 수 있는 벽돌을 잔해에서 대량으로 가져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벽돌을 찾을 때 내던진 대량의 폐기물은 화장터 근처에 남아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가 빈번히 의문을 제기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시체가 소각되니 후의 재는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1구의 시체를 소각했을 때 생성되는 재는 그 처리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정 양의 재가 가까운 강이나 늪지대에 쌓여있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항공사진에서 나타나 있다. 또 그 이외의 재는 가까운 밭에서 비료로 사용되었다는 상세한 서류가 증거로 존재한다. 트레블링카의 사진은 수용소장에 의해서 쵤영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대량의 재가 굴착기로 뿌려지고 있는 것이 나오 있다.
5. 사망수의 과장
’600만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자주 사명자는 100만명 정도 또는 ‘전시 사상자'’는 30만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망자 수에 대한 논쟁에서 자주 이용되는 것으로 브레트바르드 문서(Breitbard Document)가 있다. 이것은 아론 브레트바트(Aaron Breitbart)가 작성한 것으로 “1940년부터 1945년 동안 나찌에 의해 400만명이 여기서 괴로워 하며 죽었다” 라고 작성되어 있던 기념비가 1990년에 “그 다수는 유럽의 다양한 국가에서 데려온 유대인으로 150만명의 남성, 여성, 아이들이 이 땅에서 몰래 살해당했다. 이 땅이 영원히 인류에게 절망과 경고의 외침이 되기를”이라고 바뀌어 기록되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이 숫자의 불일치를 근거로 살해당한 유대인의 수는 적어도 250만은 줄어든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희생자의 수가 과장되고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몬 비젠탈 센터에 의하면 희생자의 수가 전의 비석과 비교해서 훨씬 적게 나오는 것은 소련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비유대인 사망자 수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었기 떄문”이다. 이 비석은 소련 당국에 의해서 놓인 것으로 냉전중에 서독정부와 대립중이었던 사정을 감안해 봐야 한다. 냉전이 종결되자 그에 따라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었고 숫자를 개정한 것이다. 또 소련이 주장한 400만의 숫자에는 약 200만명의 비유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본래 서방국가의 역사가들은 이 400만의 숫자를 유대인 희생자를 계산하는데 이용하지 않으며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사람의 추정수는 100만에서 150만 사이로 일관되게 추정해 왔다.
”월드 아르메넥”에 의하면 홀로코스트 전후에 유대인 인구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사료를 정밀 조사해 볼때 자의적인 사료 조작이 인정된다. 즉, 1945년부터 48년간의 아르메넥은 유일하게 이용가능한 1938년의 데이터를 사용하고 있으며 1949년 판에서는 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11,266,600명이 되고 있다. 게다가 1939년에 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상향수정해서 16,643,120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의하면 1939년과 1949년에 유대인 인구의 차이는 540만명이 된다.
이에 더해서 전쟁 전후 유대인 인구는 정보의 출처에 의해서 크게 숫자가 다르지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그 중에서 스스로의 주장에 합치되는 숫자를 선택적으로 채용하고 있으며 정보원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를 피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월드 아르메넥”의 세계 유대인 인구는 1982년 판에서는 14,318,000명, 1990년 판에서는 18,169,000명, 1996년 판에서는 13,451,000명이 되고 있다. 즉 1982년부터 1990년 동안 370만명의 유대인이 증가했는데 반대로 1990년부터 1996년동안에는 450만명의 유대인이 실제로 소실되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월드 아르메넥이 세계의 유대 인구를 정확하게 추정하는데 신뢰할 수 없는 정보원인지 둘중의 하나이다. 한편, 미국의 유대인 연감은 1932년 판 연감에서 세계의 유대인 수를 15,192,218명이며 그 중에 9,418,248명이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그에 대해서 1947년판의 연감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계의 유대인 수 추정은 미국 유대인 통일 송금 위원회(The American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 에 의해서 정리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제외) 이 견적은 현재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추저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것이다. 이 숫자는 나찌에 의한 550만명 이상의 유럽 유대인이 멸종된 결과 세계의 유대인 수가 그 1/3을 잃어 1939년에 약 16,600,000명에서 1946년의 약 11,000,000명까지 감소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럽에서는 전쟁전의 추정 유대인 9,740,000명 중에서 약 3,642,000명 만이 남았다.
이러한 수치 선택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가 나찌 자신이 작성된 문서조차 무시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반제회담의 메모에서 명시되듯이 나찌는 유럽의 유대인 수를 900만에서 1100만으로 추정했고 콜헤어 보고서에도 있듯이 나찌는 진행중에 유대인 인구의 감소를 꼼꼼하게 기록해서 1942년 12월 중에 “최종적 해결”의 진행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1937년에 세계의 유대인 총수는 일반적으로 1700만명 전후라고 추측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1000만명 이상이 유럽에 있다. 1937년부터 1943년 초에 걸쳐서 유대인의 수는 부분적으로는 중부 유럽이나 서유럽에 있어서 과도한 유대인 사망율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여기에서 탈출한 수도 포함되어 있지만 특히 인구가 많은 동방으로 피난에 의해서 약 400만명이 감소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유럽 점령지역에서 소련 유대인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일부만이 기록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럽-러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전선에 있어서의 사망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이며… 전체적으로 1933년부터, 즉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정권 초기 10년간에서 유럽의 유대인은 그 인구의 절반을 잃은 것이다.
절멸 수용소에서 사망자 수를 과장하는 예가 복수 보고되는 것이 사태를 복잡하게 하고 있으며 사망자의 수에 대해 애매한 점이 있다고 부정론자들은 이를 반드시 지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견해가 올바름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막대한 수의 사망자가 나왔다(멸종 대상이 된 민족, 종교, 소수, 신체적 장애자를 포함하면 실제는 1100만명에 이른다)는 증거는 주류 정보원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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