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나가 쿄지(1892년 1월 2일 - 1960년 1월 14일) 별명은 "도조 히데키의 돈주머니"
경력
1939년 9월 참모본부 제1 부장으로 취임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일본이 접수하는 작전에서 진주시각을 알리는 전단이 유출되는 사고로 좌천되었다.
1941년 4월, 일본 육군성 인사국장으로 중앙에 복귀했으며 이후 1943년 3월 육군 차관을 겸임했으나 도조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실각, 1944년 8월에 신임 육군상 스기야마 하지메에 의해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9월 8일 마닐라에 착임했다.
스기야마는 "자리가 나서 간신히 토미나가를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으므로, 좌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다가 실전경험이 전무한 토미나가는 항공대가 발진할 때 군도를 휘두르며 호령하는 등 엉망인 지휘로 현지 일본군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적전도망
필리핀에 부임한 토미나가는 필리핀 결전에 앞서 일본육군의 첫 카미카제 공격대에 출격 명령을 내린다. 그는 항공작전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특공에 임하게 되면 술을 들고 나와서 훈시를 길게 늘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알려져 있다.
훈시에서는 "제군들은 벌써 신이다. 너희들만을 가게 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일전이 되면 본관도 특공하겠다"라고 말했었다. 게다가 자살공격을 하지 않고 돌아온 특공대원은 가차없이 매도해서 약 62회에 걸쳐 400기에 특공을 명령, 파일럿 전원을 전사시켰다. 그러다가 전세가 명백히 불리해진 1945년 1월 16일, 마닐라에서 불러온 사령부 요원을 산티아고에 남겨놓고 참모를 비롯한 고급 장교들은 얼마 남지 않은 전투기를 출동시켜서 호위를 명령하고 필리핀을 떠나 술과 기생들을 대동하고 대만의 타이페이로 도주했다.
필리핀에 남겨진 1만여명의 제4항공군 장병들은 지상부대로 전환되어 보병부대로 대부분이 전사했다. 타이페이로 도주한 토미나가는 위궤양 진단서를 제출해서 온천에서 요양하며 충분히 "영기"를 길렀고 2월 13일 일본 총사령부는 제4항공군 사령부를 정식으로 해체했다.
이것이 악명높은 ‘토미나가의 대만 도주’ 사건으로 명백히 중대한 군율위반행동이며 총살을 당한다 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으로 상관이었던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 대장에게도 알리지 않은 적전도망 그 자체였다. 때문에 사후에 승낙을 요청하러간 참모에게 야마시타는 "부하를 방치하고 도망치는 놈에게는 할말이 없다!"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원래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상황이지만 아무런 처분도 내려지지 않다가 일본육군 중앙부에서도 결국 문제가 되어 1945년 2월 23일 대기명령을 받고 5월 5일에는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죽는 것이 무서워 도망쳐온 인간을 예비역으로 만들어서 전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으로 7월에 재소집되어 제139 사단장으로 만주로 갔으며 8월에 소련이 참전하면서 시베리아의 하바롭스크 수용소에서 억류되어 있다가 1955년 4월 18일, 마이즈루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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