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사가현 출신. 일본육사 22기, 일본육대 29기. 최종계급은 중장. 키무라 헤이타로, 토미나가 쿄지 등과 함께 토조 히데키의 심복 부하중 하나.
노구교 사건(1937)에서 독단적으로 공격을 허가해서 중일전쟁의 단서를 만들었다. 이 사건 직후에 다치지 않은 팔을 붕대로 고정하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1944년 일본 제15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정글과 2000m급 산악지대가 혼재된 코히마를 돌파해서 미얀마-인도 경계가 되는 임팔 지역을 공략한다는 작전을 입안했다. 당초 상급 부대인 남방군 사령관이나 자군 참모, 예하 사단에서는 보급 문제를 들어서 거의 전원이 반대했지만 무다구치는 "영국군은 약하다. 반드시 퇴각할 것이다"라며 강경론을 관철시켜 결국 남방군과 일본대본영은 이 작전을 승인했다.
예상대로 작전은 보급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무다구치는 강경론을 계속 밀어붙여서 전선의 사단장들을 독려했으며 심지어는 경질하기 까지 이른다. 구 일본군 통수체계에서 사단장은 일왕이 직속권한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일개 중장에 불과한 무다구치가 사단장을 독단으로 해임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이 작전에서 무다구치는 험악지에서 일선부대에의 보급대책으로 소에게 짐을 옮기게 하고 산을 넘으면 식량으로 바꾼다고 하는 이른바 "징기스칸 작전"을 입안했지만 원래 미얀마의 소는 저습지에만 익숙해져 있고 장기간의 보행에는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소의 음식용 풀 준비도 미흡했기 때문에 소들은 길가에서 차례로 죽어갔고 작전을 실패했다.
또, 증언들 중에는 보급문제를 들어서 난색을 표명하는 참모들에게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얀마 방면군 사령관 카와베 소죠 중장도 이런 상황에서 작전의 속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무다구치는 작전 강행의 의지만을 표명했고, 결국 전황의 악화되면서 보급이 두절되자 제31사단장 사토 코토쿠 소장은 무타구치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철퇴해버렸다.
결국 각개 부대들이 보급부족으로 전투력이 거의 소진된 상황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무다구치는 전황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휘하의 제15군 장병을 버려두고 "북방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 점에 대해서 무다구치 자신은 전후에 일본 방위청 전사편찬실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내가 제1선에 머무르는 것에 신변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하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그때 군사령관인 내가 사령부에 머물러 후퇴를 지휘하는 것의 중요함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찬드윈 강의 지류에서 보급체계를 신속히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비겁한 자로 취급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변명하고 있다.이 "임팔 작전"의 실패는 무다구치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일본육군 자체의 저열한 수준에 대한 상징처럼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기실 무다구치 한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치중병(보급을 맡은 부대)이 군인이라면 잠자리도 새"라는 속설이 보여주듯 당시 일본군에 만연하고 있었던 보급 경시, 기계화 경시의 구조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임팔작전을 둘러싼 일련의 작전 지도에서 무다구치의 잘못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현지의 일본군 사이에서는 "무다구치 각하가 좋아하는 것은 첫째가 훈장, 둘째가 메이바(미얀마 어로 여자), 셋째가 져널리스트"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임팔작전 실패후 무다구치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나 잠시 뒤에는 일본육군 예과 교장이 되어 더 이상의 책임을 추궁받지 않은 상태로 종전을 맞았다. 종전후에 전범용의로 체포되어 싱가폴에 송치되었지만 작전 실패로 일본군의 심대한 손해를 야기하여 영국군 작전수행을 용이하게한 점이 참작되어 불기소되었다.
전후에 도쿄에서 여생을 보내었지만 임팔 작전 실패 책임이 추궁되면 "그것은 내 탓이 아니고 부하의 무능함 때문에 실패했다"라고 완고하게 자기 변호로 시종일관했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 잡지 등에서 기회가 될때마다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심지어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노구교 사건에 대해 증언을 부탁했을 때에도 예정에 없었던 임팔 작전의 녹음을 무리하게 요구했다. 1966년 사망할때까지 임팔 사건에 대한 사죄는 없었고 유언에도 자신의 장의에서 자기 변호를 인쇄한 광고지를 배포하라고 했다.
에피소드
임팔 작전의 패색이 농후해져서 부하에게 "일왕에게 사과하기 위해, 자결하고 싶다"라고 상담했을때, 부하는 "예로부터 죽겠다 죽겠다 라고 말로 하는 사람이 죽는 일은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써 할복자살 하시겠다고 한다면 막료로써의 책임상, 일단은 멈추어 달라고 하겠습니다만, 사령관으로써 책임을 진실로 느끼고 있으시다면 물러나 주십시오. 아무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염려없이 물러나 주십시오. 이번 작전의 실패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결국 자결하지 않았다.
전선에서는 보급이 부족하고 고전이 계속되는 중에도 사령부에는 청명장이라는 요정을 만들었고 작전중에도 매일 5시가 넘으면 자택에 돌아가서 유카타로 갈아입고 요정에 나갔다. 이 정보를 입수한 영국군은 전선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흘렸기 때문에 일본군 장병들의 사기는 현저히 저하되었다.
패색이 농후해지자 사령부 뒤쪽에 제단을 쌓아 작전을 지휘하지 않기보다는 매일아침마다 전승기원의 축사를 올렸다.
무다구치는 전선부대에게 현지 사수 명령을 반복할 뿐, 철퇴는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수명령 때문에 조직적인 철수 작전을 실시할 수 없었던 일선부대는 단번에 괴멸되어 버렸다. 전선이 붕괴되면서 사령부가 공세에 노출되자 무다구치는 지금까지의 현위치를 사수하는 대신 전역을 이탈해 버렸다.
임팔 작전 실패의 결과로 미얀마를 잃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공세하러 나왔기 때문에 미얀마를 잃는 것을 끝난 것이며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시아 전부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자기 변호로 시종일관했다.
제15사단장 야마우치 마사후미는 전투 상세보고에서 "공격하는 병사에게 총알이 없으며 일선부대는 호우중의 진흙탕에서 병과 기아로 전투력을 상실해 가는 이 상황은 실로 군과 무다구치의 무능"이라고 실명이 거론하고 있다.
임팔 작전 실패후에 스스로 건축한 요배소(일왕을 참배하고 경례하는 곳)에 간부급 장교를 모아서 1시간 이상 훈시를 실시했지만 간부 장교들까지도 영양실조로 서있지를 못하고 쓰러졌었다.
장병들 사이에서는 "바보같은 대장은 적보다 무섭다"라고 말이 돌았다고 한다.
원래 무다구치는 제18사단장 시절에 국경을 넘어서 인도를 향해 진격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이 윙게이트 소장의 의견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각지에서 파괴 공작을 실시하자 "영국군은 산을 도보로 넘어온 것이다"라고 믿어서 저쪽에서 건너올 수 있다면 이쪽에서도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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