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아랍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 관리를 1948년 8월 1일부로 종결하고 이 지역에 유대계와 아랍계로 분리된 2개의 국가를 분리 독립시키는 안건을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 불참 1로 결의했다.
계획의 맥락
1917년 11월, 알렌비 장군은 팔레스타인 점령 준비를 하는 시점에서 영국 외무부는 1917년 외무부의 벨푸어 경(Lord Belfour)이 영국 시온주의 운동의 수장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 통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폐하의 정부는 유대 민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에 긍정적이며 이 목적의 성취가 용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계 공동체의 사회, 종교적인 권리들이나 다른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와 정치적인 지위를 침해하는 그 어떤 일도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주지하는 바이다." 라고 발표한다.
이 선언은 벨푸어 경이 바이츠만에게 승인을 요청했던 전보 초안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정식 계약은 아니었다. 벨푸어 선언은 체임 바이츠만 박사가 주도해온 영국 시온주의 운동의 성과를 반영하는 결과물인 동시에 다년간 영국이 유대계와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강화하면서 예상되는 아랍계와 반시오니즘 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외무부의 전략적 배려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러한 복합적인 세력간 이해균형은 궁극적으로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분할 외의 해결책을 선택할 수 없게한 대영제국의 부침에 의한 정책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1차대전이 종결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붕괴되자 승리한 연합국 수뇌부는 1920년 산레모에서 회담을 갖고 오스만 투르크 영역을 승전국이 식민 체제하에 관리하기로 결정한다. 팔레스타인은 여기서 영국의 식민성 관리하에 들어왔고 국제연맹은 국제법에 의해 벨푸어 선언을 승인함으로써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유 대인들의 국제적 근거지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도 부합되는 것으로 미국에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발판을 마련했고 시오니즘의 꿈이 실현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시온주의에 의한 개척 생활의 고됨, 지원 자금의 부족 등으로 인종주의와 독일내 히틀러의 부상으로 인해 박해가 심해진 30년대의 제5차 알리야(Aliyah)까지 유대계의 이주활동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922년 7월 24일, 국제연합은 런던에서 영국의 트렌스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지역 식민지화를 승인했으나 식민 통치 초기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식민지의 78%에 해당하는 트렌스 요르단지역을 분리하여 독립적인 아랍 구역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첫 분할로, 이에 따라 1922년 9월 16일, 국제연합은 정식으로 벨푸어 선언에서 인정된 유대인 국가 지역과 트렌스 요르단이 분리되었으며 영국식민성이 유대인 정책과 이민을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영국 관리기간 중 유대인 이민의 증가는 1936~1939 동안의 아랍 대폭동을 낳는 원인이 되었으며 아랍 민족주의가 감정적으로 흐르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영국의 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이 15%의 영역을 차지하는 작은 유대인 정착지와 보다 큰 아랍 국가, 국제 관리 지역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아랍측에서 거부되었고 영국은 대안으로 팔레스타인에로의 유대인 이민을 금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한다. 이는 식민화에 모순이 되는 정책으로 유럽에서 박해가 증가하고 있다는 면에 고려하면 비인도 적인 행동이었다. 영국의 규제는 결국 불법 이민의 조직화를 낳았고, 소규모의 레히 그룹이 영국과 영국이 이민을 다시 허용하고 대 파시즘 투쟁에 영국이 협조해주리라는 희망을 품고있는 시온주의 주류인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를 공격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영국이 금지하자 유대인 사회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게릴라 전과 폭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과 미국의 반이민정책 폐지 압력의 증가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식민지 문제에서 손을 떼고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맡기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국제연맹을 계승한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계와 아랍계의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1947년 5월 15일, 11개 국 대표들로 구성된 UNSCOP를 구성했으며 위원회를 보다 중립적으로 하기 위해 강대국 대표들은 선택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3개월에 걸쳐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조사한 끝에 UNSCOP는 공식적으로 8월 31일, 보고서를 제출했다. 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과테말라, 네덜란드, 페루, 스웨덴, 우루과이의 7개국은 이 지역에 아랍과 유대계 국가를 분리독립시키고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지 화할 것을 추천했다. 다만 인도, 이란, 유고슬라비아는 유대계와 아랍게로 구성된 연방국가 형성안을 지지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는 기권했다. 이에 유대인 국가 건설은 투표에 부쳐졌지만 국제연합 결의안에 필요수보다 1표 부족했다. 또, 이때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 독립된 아랍국가가 탄생되게 되었다.
분리안
영역 |
아랍계 인구 |
% |
유대계 인구 |
% |
총 인구 |
아랍지역 |
725,000 |
99 |
10,000 |
1 |
735,000 |
유대 지역 |
407,000 |
45 |
498,000 |
55 |
905,000 |
국제관리지역 |
105,000 |
51 |
100,000 |
49 |
205,000 |
합계 |
1,237,000 |
67 |
608,000 |
33 |
,845,000 |
팔레스타인 지역의 면적은 약 26,320km²로 그중 약 1/3이 경작 가능한 면적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토는 20,770km²이다. 1920년대에 유대인의 소유지역은 456 km²였지만 1945년에는 1,393 km²까지 확대되었으며 1947년에는 1,850km²까지 증가했다. 반면에 오스만 투르크의 토지과계 법류가 현대적인 토지 규제 체제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랍계의 토지 소유가 가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상황에서 UN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지역, 아랍인 지역과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등의 소규모 국제관리 구역으로 3분하려는 권유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은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을 각기 치외법권적 회랑지대로 연결되어 있는 세개의 핵심구역으로 구분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대인 지역은 하이파에서 르호봇(Rehovot)으로 이어지는 해안지대와 갈릴리 호변을 둘러싸고 있는 동부 갈릴리 지역, 그리고 남쪽의 움 라시라시(Umm Rashrash, 지금의 엘리앗)으로 이어지는 네게브 사막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아랍 국가는 아크(Acre)를 포함하는 서부 갈릴리와 사마리아 및 유대 고지 및 북 이스둣(Isdud, 지금의 아쉬돗)으로 이어지는 남부 해안지대와 이집트 경계선 근처의 가자 지구로 구성되었다.
이 UNSCOP 분리계획안을 약간 수정해서 총회 결의안의 분리계획이 구성되었다. 두드러진 차이점은 야파가 아랍 지역으로 바뀌었고, 브엘세바를 비롯한 네게브 사막 경계선 지역의 상당부분이 아랍측에 배정되고 사해 연안이 유대인 지역으로 배정되었다는 점이다. 아랍측에 배정된 지역(팔레스타인 전역의 약 43% )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고원지대와 해안의 1/3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고원지대는 팔레스타인의 대수층(우물을 파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 대부분에 해당했고 이것은 텔아비브를 포함한 중부 팔레스타인 해안가 도시에 물을 제공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유대인 지역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약 56%를 획득했으며 이것은 이 지역으로 이민이 진행중인 유대인 인구의 증가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해안가의 샤론과 제즈릴 계곡 및 요르단 계곡 상부의 비옥한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역의 대부분은 네게브 사막으로 구성되어 농경이나 도시 계획 등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고, 다만 홍해와 갈릴리 지역에 유일하게나마 접근로가 있었다. 유대인 측에 배당된 지역은 충분히 유대계 인구가 많은 지역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랍인 측에 배당된 지역은 인구가 거의 완전히 아랍계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 계획안은 전체적으로 최대한 많은 유대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노력한 것으로 많은 경우에 아랍계가 다수인 지역이 상당한 수의 유대인이 있다는 이유로 유대인 지역으로 배정되어 있었기에 유대인 지역 전체를 본다면 상당수의 아랍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네게브 사막처럼 인구가 희박한 지역들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유대인 지역에 배정되었다.
UNSCOP 계획안은 1945년 데이터에 기초한 인구분포 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이 데이터는 유대인, 아랍인, 오스만이나 다른 지역 소유자에 의한 실제의 토지소유 데이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 데이터는 트렌스 요르단 지역에 관한 정보를 배제한 것이다.
여기 표시된 것은 유대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지만 이 지역외는 아랍계가 소유라는 의미는 아니다.
UNSCOP 보고서는 이에 더해 "또 유대인 지역에는 건조기에 목초지를 찾아오는 약 9만명의 베두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획에 대한 반응
유대인과 유대계 집단 대부분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특히 사실상 유대국가의 대표그룹이었던 유대인 기구는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유대인 기구 내부에는 추가적인 토지를 위해서 논의가 있었지만 마침내 유대계가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지역을 관리할 수는 없다는 유엔측 제안 긍정론자들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영국에 저항해온 메나헴 베긴의 이르군 츠바이 레우미나 레히(슈테른 갱) 같은 소수의 극우단체들은 이것을 반대했으며 베긴은 분리안은 아랍인들이 이 작은 유대 국가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분리안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면서 "전쟁이 다가오면 우리는 홀로 싸워야만 하고 이것은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건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속적인 무기 금수조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기구가 지원하기로 약속한 3천정의 기관단총과 6백만발의 총탄, 25기의 비행기 등으로 신생 이스라엘 쪽에 유리하리라고 판단되었다.
UN 결의안 발표일 유대아 아르노스(Yedioth Ahronoth) 표제
수많은 기록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계들이 국제연합이 분리안을 표결하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날부터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11월 29일을 이스라엘 독립의 가장 중요한 날로 기록하고 있으며 많은 이스라엘 도시들은 이 날을 자신들의 거리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대인 지역이 지역적인 연결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에는 비판적이었다. 반면 아랍 지도층들은 팔레스타인 내외를 비롯하고 계획에 반대했다. 아랍계는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다수층이 가지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당시 이 지역의 비유대계는 유대계의 2배가 넘었다. 아랍 지도자들은 또 많은 수의 아랍계가 유대인 지역에 소수파로 남겨져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논의했다. 거의 모든 아랍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를 부정함을 원칙으로 하였고 이것은 아랍 연합의 정책에 반영되었다.
표결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총회는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으로 분리독립안을 승인하였으며 최종적으로 경계선 상의 작은 수정이 가해졌다. 원래 표결일은 25일이었지만 미국에 강하게 의존적인 리비아, 필리핀, 하이티 등에게 로비를 통해 표결을 바꾸어 2/3 이상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표결 은 29일로 미루어졌다. 이 분리안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이 철수하는 그 날부로 효력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미국과 소련이 모두 이 결의안을 지지했다.
녹색 : 찬성, 갈색 ; 반대, 황색 ; 기권, 적색 ; 불참
찬성 33개국(58%)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볼리비아, 브라질, 벨로루시, 캐나다, 코스타리카,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도미니카 공화국, 에쿠아도르, 프랑스, 과테말라, 아이티, 아이슬랜드, 라이베리아, 뤽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니카라구아, 노르웨이,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필리핀, 폴란드, 스웨덴, 남아프리카, 우크라이나, 미국, 소련, 우르과이, 베네주엘라
반대 13개국(23%) 아프가니스탄, 쿠바, 이집트, 그리스, 인디아, 이란,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터키, 예맨
기권 10국(17%) 아르헨티나, 칠레, 중국,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에티오피아, 온두라스, 멕시코, 영국, 북아일랜드, 유고슬라비아
부재 1국 (2%) 타이
결과
분리안이 제안됨과 거의 동시에 전쟁이 시작되었고 1947년 예루살렘에서의 아랍폭동이 발생했다. 이 분쟁은 또한 아랍국가들의 유대계에게나 팔레스타인의 아랍계에게 모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표결이 있은 다음날부터 아랍계의 공격으로 7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으며 총격, 투척, 폭동이 며칠동안 이어졌다. 분리안에 표결한 폴란드와 스웨덴 대사관은 폭탄 테러를 당했으며 화염병이 투척된 유대인 회당은 불길에 휩싸였다.
1948년 1월, 영국은 아랍 연합이 시리아를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아랍해방군을 침입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영국은 분리안의 수행이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관여하지 않았으며, 준비기간 동안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위원회에 팔레스타인 관리권한을 넘겨주는 것도 거부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 관리는 1948년 5월 15일에 종료되었다. 훗날 기밀해제된 문서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이 "대 시리아"의 일부로 흡수되기를 원했으며 이라크가 통치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역사가 에브라임 카르쉬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영국은 트렌스 요르단을 통해 아랍계 지역을 합병하고 유대인 지역도 트렌스요르단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다고 주장하며 그 외에 트렌스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아랍계 지역을 합병하려는 의도였다고도 본다.
1947년 11월과 12월에 카이로에서 만난 아랍 연합 수뇌부들은 분쟁은 군사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일련의 결의안들을 발표했다. 이들은 아랍해방군을 조직했고 아랍 연합은 아랍 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단행해서 아랍 각국에서 상당수의 유대인 피난민들이 발생했다.
12월 3일,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지도자들이 선동함에 따라 대규모의 아랍계 폭도들이 예루살렘 신시가지의 유대인 상업 지구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상가를 불태웠으며 심한 폭행과 투척을 자행했고 다음날에는 120~150여 명의 무장한 아랍인들이 텔아비브 외곽의 에팔 키부츠를 공격하여 처음으로 유대인 정착지와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이로써 테러 공격이 각지에서 심화되었다. 아랍계는 예루살렘을 봉쇄하고 물자의 차단을 막으면서 다른 유대계 지역들과 수송차량 등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 들을 학살했다. 유대계 소수파들도 반발하여 이르군은 예루살렘과 야파 등지에서 폭탄테러를 가했다. 하가나는 초기 단계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편 ,이르군은 1947년 12월 12일, 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문에 폭탄테러를 가했고 12월 30일에는 하이파의 정제소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48년 1월 16일에는 구쉬 엣 지온으로 향하는 수송차량이 공격을 받아 3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2월 22일의 벤 야후다 거리에서 폭탄 테러 1948년 3월 11일에 일에는 유대인 기구가, 27일에는 네비 다니엘과 예히암으로 향하는 수송차량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
4월 9일에는 데이르 야신 학살사건이 발생했으며 4월 13일에는 하다시 의료단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기가 되자 다툼은 연대단위의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하가나는 나흐손 작전을 통행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했으며 1948년 4월 1일, 안전보장 이사회는 44호 결의안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미래 정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의안 44호를 채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