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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1차 중동전쟁, 7. 분쟁의 주역들

이슈브

베니 모리스는 이슈브의 목표가 전쟁을 통해서 서서히 변해갔다고 지적했다. [각주:1] 전쟁 초기에 이슈브의 목표는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계와 주변 아랍국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깊이, 진정으로 중동에서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가 재현될 것을 우려했고 아랍의 공공연한 발표들은 그들의 공포를 부추켰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슈브의 목표는 유대국가의 영역을 국제연합 분리안 너머로 확장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우선 고립되어 있는 유대인 정착지들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점진적으로 방어가능한 경계선 속에 궁가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4~5개월 후에 정치, 군사 지도자들 간에 세워진 세번째 새로운 목표는 "이스라엘에 장래의 강력한 제5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적대적이고 거대한 아랍계 소수파의 규모를 전쟁과 배제로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각주:2]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Abdullah)

제1차 중동전에 참가한 아랍군의 최정예 요르단 군은 영국에게 훈련받고 지휘되는 1만명의 병력으로 아랍군단(Arab Legion)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1946년부터 47년까지 압둘라는 그가 "유대인 국가의 형성이나 팔레스타인 분할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발표했다. [각주:3] 압둘라가 영국 식민성이 팔레스타인을 요르단이 합병케 해주기를 바라는 의도였기에 분리안을 지원했다고 불렸으며 압둘라는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의 골다 메이어 등과 접촉을 가지면서 국제연합의 분리안과는 별도로 영국 당국이 제공한 제안에 합의했다고 한다. [각주:4] 그러나 1948년 주변 아랍국의 압력을 받은 압둘라는 서방과 유대계 지도자들과의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로 인해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위상을 아랍권에서 회복하기 위해 신생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하는 "전아랍 군사 협약"에 가입하게 된다. [각주:5] 전쟁에서 압둘라의 역할을 잠재적인 것으로 그는 자신을 "아랍군의 최고사령관"으로 보았으며 "아랍 연합이 그를 아랍군 사령관으로 지지하기를"바랬다. [각주:6] 그의 지도하에 아랍은 1948년 전쟁에서 압둘라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싸우게 된다. 트렌스요르단 국왕 압둘라는 다마스커스에서 5월 13~14일간 열린 국제 아랍연합군 회의를 통하여 아랍연합군 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아랍 전략을 통괄하여 트렌스 요르단이 영국의 구 팔레스타인 식민지 지역을 통합하는 전략을 구상한다. 당시 영국은 압둘라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압둘라는 훗날 "당시에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침공하는 결정을 하면서 영국의 후원 문제로 걱정한 적은 없다."라고 술회한바 있다. 불행히도, 요르단 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압둘라 국왕의 의도를 아랍국가들이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랍연합군의 내부 불화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아민 알 후세이니의 아랍 최고 평의회

예루살렘의 최고법률고문이며 아랍 최고 평의회장 아민 알 후세이니는 2차대전 동안 나찌의 충실한 협조자였다. 1940년 그는 추축국에 아랍의 권리를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몰아낼 권리를 요구했고 "팔레스타인과 다른 아랍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랍의 국가적이고 인종적인 이해관계를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한 방법과 동일선상에 놓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2차대전의 후반기를 독일에서 무슬림들에게 공동의 적에 맞서 나찌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며 지냈고 방송을 통해 "아랍인들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궐기하여 신성한 권리를 위해 싸워라. 찾는 족족 유대인을 죽여라. 이것은 신과 역사, 신앙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대들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 신께서 함께 하시리라." [각주:7] [각주:8] [각주:9] 라고 발언했다. 홀로코스트가 끝나자 마자 아랍 지도자(특별히 법률고문의 폭력적이고 반유대적인)의 이러한 발언은 이스라엘이 새로운 "대량학살"에 직면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1948년 초 알 후세이니는 이집트로 망명했으며 1948년 2월 다마스커스의 회의에서 아랍 고위 지도자들과 팔레스타인을 군지휘관으로 임명하려는 고차원적 협상에 임했다으나 성전군의 지휘관인 하산 살라마나 아브드 알 콰디르 후세이니는 리다 지역과 예루살렘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은
아랍국가들은 아민 알 후세이니의 지위를 실추시켰다. 2월 9일, 다마스커스 회의 이후 불과 4일만에 카이로 회담에서 그가 팔레스타인 출신을 연합 총참모부에 임명하고 국가 위원회를 대신할 팔레스타인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영국을 축출하며 팔레스타인과 아랍 최고위원회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생긴 자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모두 거부되면서 아민 알 후세이니의 권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각주:10] 아랍 연합은 그의 징병도 막았지만 [각주:11] 아민 알 후세이니의 사촌이며 가장 카리스마적인 지휘관인 아브드 알 콰디르 후세이니가 4월 8일 죽으면서 이 제한은 해제되었다.

압둘라 국왕이 다시금 전에 접촉했던 바가 있는 유대인 기구와 양면 교섭을 재개하려한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이집트가 주도하는 아랍 연합은 9월 8일, 가자 지구에 아민 알 후세이니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내세워 순수 팔레스타인 이립계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비 샬레임은 "가자 지구에 순수 팔례스타인 아랍계 정부를 구성하는 결정과 미약하게나마 지휘할 무장부대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아랍 연합 구성원들은 전쟁수행권을 제거하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일부 여력을 제외한 군을 철수함으로써 제약을 가했다. 장기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미래가 무엇이었건 간에 단기적인 목적은 압둘라에게 반대하고 아랍지역을 트렌스요르단을 통합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집트 원조자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각주:12]

압둘라는 후세이니의 성전군(Holy War Army)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보았고 10얼 3일 그의 국방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모든 아랍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라고 지시했고 글룹 파샤는 그의 명령을 무자비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각주:13]

초기의 군사력 균형

군사력 평가

모리스는 1947년까지는 팔레스타인이 이슈브의 군사력을 건전하지만 사기가 낮다고 평가했으며 수십년이나 수백년내로 "유대인은 중세의 십자군 왕국들 처럼 궁극적으로는 아랍세계에 의해서 극복되어 버릴 것"이라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각주:14]

전쟁이 가까워지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아랍군의 규모는 팔레스타인 민병대와 이집트 1만, 트렌스요르단 4,500, 이라크 3,000, 시리아 3,000, 아랍해방군 지원병 2,000명 레바논 1,000명과 약간의 사우디아라비아 계로 구성된 약 2만 3천 명에 달했다.
한편 이슈브는 하가나 소속 35,000명의 병력과 3,000명의 슈테른 갱과 이르군, 수천명의 무장 정착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주:15]

5월 12일,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랍군의 규모와 병력 및 전력을 과대평가한 군사 보좌관에게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간신히 절반정보라고 들었다. [각주:16]

이슈브 군

1947년 11월의 하가나는 1920~21년 폭동이후 창설되어 1929년 폭동기간과 1936~1939 동안의 대폭동 기간을 거쳐온 [각주:17] 잘 조직된 지하 준군사 조직이었다. 하가나의 기동부대인 HISH는 2,000여명의 직업 군인(남녀 불문)과 18~25세의 예비군 1만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팔마흐는 2,100명의 직업 군인과 1,000명의 예비군이 있었다. 예비군은 한달에 3~4일 정도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이 기동부대는 25세 이상의 시민들로 구성된 HIM(Heil Mishmar, 방어군)이라 불리는 수비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슈브의 전체 병력은 15,000~18,000명의 병력과 약 20,000명의 수비대로 구성되어 총전력은 약 35,000에 달했다. [각주:18] 또 비밀단체인 이르군은 약 2,000~4,000명 레히는 500~800명의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또, 이런 지하 군사조직에 속하지는 않아도 전쟁기간 중의 중요한 군사 경험을 제공할 2차대전 기간 중에 영국군에서 복무한 수천명의 남녀가 있었다. [각주:19] 왈리드 카할리(Walid Khalidi )는 이슈브에 12,000명에 달하는 유대인 정착지 경찰과 가드나 유소년 대대, 무장 정착민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각주:20] 하지만 1947년 12월 전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각주:21]

1946년 벤구리온은 이슈브가 팔레스타인 아랍계와 이웃 아랍국가들에게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이에 의하여 "서방진영으로 부터 대규모의 무기 조달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47년 9월, 하가나는 "소총 10,489정, 경기관총 702정, 2,666정의 기관단총, 186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 [각주:22] 했고 전투가 시작된 첫 수개월 동안에 요구량은 더더욱 확대되었다. 이슈브는 또한 47년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능력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거두어 "9mm총탄 3백만 발과 수류탄 15만개, 기관단총(스텐건) 1만6천정, 3인치 박격포 210 문" 을 생산했다. 초기에 하가나는 중기관포, 야포, 장갑차량, 대전차 또는 대공무기가 전혀 없었고 [각주:23] 군용기나 탱크도 없었다. [각주:24]

이슈브가 식민지 말기에 보유했던 무기양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설들이 존재한다. 카르쉬에 의하면 바라크 작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부기 선적이 도착하기 전에 하가나의 무장상태는 대원 3명당 무기 1개라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각주:25] 콜린스와 라피에르에 의하면 1948년 4월, 하가나는 약 서류상으로도  35,000명의 병력이 존재하는데 2만정의 라이플과 스텐건을 확보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각주:26] 왈리다 칼리디에 의하면 "이들 부대의 무장은 충분했다." [각주:27]

아랍군

팔레스타인 아랍계에게 국가단위의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준군사적 청년단이 있었다. 친 후세이니 후투와(Futuwa)와 반 후세이니 나야다(Najjada)로 나뉘며 카르쉬에 의하면 그 집단들은 11,000~12,000명 정도의 구성원이 있었고 [각주:28] 모리스에 의하면 야파에 근거를 둔 나야다는 2,000~3,000명의 구성원이 있었으나 1948년 전쟁이 가까워짐에 따라 후세이니가 통제권을 획득하는 가운데 해체되었고 후투와는 수백명 단위를 넘어선 적이 없다고 한다. [각주:29] 전쟁 초기에 국가 방위대(National Guard)라는 새로운 지역 민병대 조직이 마을과 도시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났고 이들이 아랍 국가 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각주:30]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100여명의 시리아에서 훈련된 "아랍 성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한다. [각주:31]

영국이 1936~1939년 폭동 기간과 2차대전 중에 무장을 회수한 관계로 팔레스타인 군의 무장은 상당히 열악했다. [각주:32] 1942년 하가나 첩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대부분이 대단히 낡고 [footnot] Karsh, p. 27. [/footnote]  신뢰도가 낮았다 [각주:33] 고 한다.



아랍해방군(Jaysh al-Inqadh al-Arabi)은 아랍연맹이 다양한 아랍국가들에서 지원한 6천여명의 자원자로 구성한 조직으로, 화지 알 쿼크지의 지휘아래 사마리아를 포함하는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을 배정받았다.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단은 아랍 군 최정예로 인정받았으며 영국 장교들에 의하여 잘 무장되고 훈련된 8,000~12,000명의 강력한 부대가 4개의 기계화 보병 연대로 조직되어 있었고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48년 1월까지 요르단은 이에 더하여 지원자 3천명을 증원한다. [각주:34]

아랍군단은 1948년 5월에 참전했으며 이들은 압둘라 국왕의 명에 의하여 트렌스요르단이 확보한 요르단 서안과 동 예루살렘 지역에서만 활동했다.

1948년, 이라크는 12개 여단에 병력 21,000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고 영국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에 이라크는 3천여명 [각주:35] 정도의 4개 보병 여단과 1개 기갑 대대, 지원병력을 파견했다. 이들은 요르단의 지도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 [각주:36] 첫 휴전협정 중에 이라크 군은 병력을 약 1만명 규모까지 확장했으며 [각주:37] 최종적으로는 15,000~18,000까지 병력 규모가 증가된다. [각주:38]

1948년 4월에 뉘르 앗딘 마후무드가 지휘하는 이라크 군이 트랜스요르단에 배치되었으며 5월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도하하여 게세르(Gesher)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나블루스-예닌-툴칼람(Nablus-Jenin-Tulkarm)을 있는 삼각 지대로 이동한 이라크 군은 6월 3일 제닌을 방어하던 중 진지를 사수했지만 심각한 손해를 입었고 이 후로는 이라크 군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힘들었다. [각주:39]

1948년 이집트는 약 40,000여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으나 병역 대상자의 80%가 복무를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국경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초기에 병력 1만여명의 5개 대대로 구성된 파견군이 팔레스타인에 아흐메드 알리 알 무와위 소장의 지휘아래 파견되었으며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으로 무장했고 추가로 영국의 4호 전차와 마틸다 전차를 장비한 1개 기갑대대가 파견되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피트화이어와 4기의 호커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하였다. 2차 휴전협정 기간 중에 이집트는 13개 대대, 2만명의 병력과 135대의 탱크 야포 90문을 전개하고 있었다. [각주:40]

시리아는 1948년 전쟁 초에 3개 보병 여단과 1개 대대규모 기갑부대로 구성된 12,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시리아 공군은 보유 항공기 50기에 10대는 2차대전 모델 중 최신형이었다.

5월 14일, 시리아는 1개 장갑차 대대와 제1 보병여단으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으며 프랑스제 R35, R37 탱크와 1개 포병 대대가 지원하고 있었다. 15일과 16일에 걸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Tsemach)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공격을 개시하다가 데가니아스(Deganias)에서 며칠뒤 패하면서 이 마을에서도 후퇴했다. 그 후에 시리아 군은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6월 10일 미쉬마르 하야덴{Mishmar HaYarden)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소수의 노출된 이스라엘 정착지들에게 몇차례 소규모 공격을 수행했다. [각주:41]

레바논 군은 아랍연합군 중 가장 규모가 작아 병력 3,500으로 [각주:42] 겔베에 의하면 1947년 6월 벤구리온은 "레바논의 마로니트 종교 지도자들과 수천 파운드를 제공하면 레바논 군이 독립전쟁에서나 아랍군 연합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했다." [각주:43]
로간과 샬렘은 1천명이 침공해왔다고 하며 이들은 북부 갈릴리 지역으로 진출하다가 남부 레바논 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군에게 축출된 상태에서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footnot] Rogan & Shlaim, 2001, p. 8. [/footnote]

사우디 아라비아는 약 800 [각주:44] ~1200 [각주:45] 명의 자원자를 파견, 이집트와 요르단 군에 소속시켰다 [각주:46] 예맨도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

아랍 연합 국가들의 개입

당시의 아랍연맹 구성국 7개국 중에 이집트, 이라크, 트랜스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5개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맨 의 지원을 받아 지역을 분담하여 구 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을 1948년 5월 14~15일 밤에 침공했다. [각주:47] 침공의 공식적인 명분은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개입한다는 것으로 [각주:48] 1948년 5월 15일,
" 팔레스타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해 통합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국민 모두가 법앞에서의 평등을 누리고 소수민들도 민주주의적 입헌국가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보장을 확립받는 것이다. ...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 연합의 핵심 주장은 국제연합결의안 181조가 아랍 인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연맹 협약과 국제연합 헌장에 의거하여
(...)
팔레스타인의 안전과 질서가 붕괴되었다. 시오니스트의 침략으로 25만명의 아랍 거주민이 거주지에서 쫓겨나 주변 아랍국에 난민으로 유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연설들은 훨신 공격적이었다. 아랍연맹 사무국장 앗잠 파샤는 카이로 라디오 방송에서 "이 전쟁은 절멸전이 될 것이며 십자군이나 몽고 학살에 비견될만한 대규모 학살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각주:49]

요압 겔베에 의하면 아랍 국가들은 " 팔레스타인의 붕괴와 아랍해방군 및 아랍 국가들의 주요 목표가 팔레스타인의 전체적인 붕괴 및 더 많은 난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전했다. 그들의 견해로는 침공은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하가나의 공세를 감당할만한 전력이 없었다. [각주:50]

"이슈브는 아랍의 침공을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이해했다. 아랍의 진정한 군사적 역량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랍측의 협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사태에 대응하려 했다. [각주:51]

팔레스타인의 영국군

팔레스타인에는 영국 육상군 2개 사단과 2개의 독립 보병 여단, 2개 기계화 연대 및 수개 포병대와 왕립공군 대대로 1만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각주:52] 1947년 7월 최대규모 주둔시에는 팔레스타인에 70,200명의 영국군이 주둔하여 1,277명의 민간인과 28,155명의 민간 고용인들을 방어하고 있었다. [각주: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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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enny Morris, 1948, (2008), pp.397-3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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