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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1차 중동전쟁, 1. 배경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이라고 불리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알 나크바(대재앙)이라고 부른다.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아랍연합국과 신생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이후 지속되는 아랍 위기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1948년 5월 15일, 국제연합의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식민통치 종료와 분리안 발표를 신호로 이집트, 시리아, 트렌스 요르단을 비롯한 주변 아랍국의 지원하에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무대로 전쟁이 발발하여 곧 시나이 반도에로 전화가 번졌으며 그 결과 수백 내지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 난민이 발생했다.

배경

1차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패배하자 연합국 수뇌부는 이탈리아 산 레모(San Remo)의 빌라 데슈방(Villa Dechavan)에서 회담을 갖고 터키와의 평화회담 조건에 대해서 토론했다. [각주:1] 이 회담은 1920년 2월의 런던 1차 회담 내용을 승인한 것으로 1916년 5월 16일의 사이크스-피콧 협약(Anglo French Sykes-Picot Agreement)의 조건에 따라 오스만 투르크 식민지를 1917년 11월 2일의 벨푸어 선언에 따라 분할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각주:2] [각주:3] 산 레모 협정은 "다음의 식민지가 주요 연합국의 관리하에 들어간다. : 프랑스는 시리아,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고 선언하였으며 이 지역의 경계선은 주요 연합국의 결정에 따른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각주:4]

이 경우에 팔레스타인은 1920년 12월 23일의 영-불 협약(Franco-British Convention of 23rd December 1290)과 영국, 프랑스 정부간 지중해에서 엘 하마드에 이르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경계선 설정을 위한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협약(Certain Points Connected with the Mandates for Syria and the Lebanon, Palestine and Mesopotamia and the Agreement Between the British and the French Governments Respecting the Boundary Line Between Syria and Palestine from the Mediterranean to El Hamme, 1923) [각주:5] 이라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두개의 개별적인 협약에 의해 경계선이 설정되게 되었다.

1921년 3월 윈스턴 처칠과 에미르 압둘라가 카이로에와 예루살렘에서 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압둘라는 트렌스 요르단의 수장 직무를 받아들이면서 [각주:6] 팔레스타인의 절반을 관리하기로 합의했고 이에 1921년 여름까지 트렌스 요르단은 유대인 지역(Jewish National Home)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다. [각주:7] 그러나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은 영국의 팔레스타인과 트렌스요르단 위임통치를 승인하고 9월 16일, 국제연합은 정식으로 벨푸어 선언을 승인하여 트렌스 요르단의 유대인 지역 관리 조항의 배제와 영국 식민성에게 유대인 이민과 정착을 허용할 권한을 인정했다. [각주:8]

1922년 팔레스타인 식민지의 인구는 약 무슬림 589,200명 유대인 83,800명 기독교인 71,500명 기타 7,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922년 인구조사 [각주:9] ) 그러나 이 지역에서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이주하는 유대인들로 급격히 이민자가 증가하자 아랍계의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또 시온주의자의 유대인 국가건설 발언에 부분적인 영향을 주면서 아랍계는 유대인 단독국가가 일체의 비유대계를 배제하려는 계략이라고 보았다. 이에 예루살렘의 법률고문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아랍계는 영국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으며 반복해서 유대계 이주민을 공격했다. 우발적인 충돌들은 1920년 팔레스타인 폭동과 1921년 야파 폭동(Hurani Riots)으로 발전했고 1929년 팔레스타인 폭동까지 헤브론에서 67명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355명이 부상당했으며 112명의 아랍인이 영국, 유대계와의 충돌과정에서 사망했다.

아랍 대폭동(1936~1939)과 후속조치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팔레스타인 사회의 몇몇 분파들은 상호간의 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와 아랍 지도층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젊은 무슬림 협회(Young Men's Muslim Association) 등이 조직한 반영, 반유대 폭동이나 급진적 민족주의 독립당(Hizb al-Istiqlal)의 영향을 받은 행진과 불복종 운동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저항운동 대부분은 법률고문과 사촌 자말 알 후세이니(Jamal al-Husayni)를 비롯한 식민성의 명사들에 의해 통제되고 해결되었다. 그러나 교법사 샤이크 이즈 앗 딘 알 카삼(Shaykh Izz ad-Din al-Qassam)이 1935년 11월 제닌에서 영국 경찰에게 사망하자 하이파의 카삼 묘지에 성난 군중이 대규모로 모여들었다. 수개월 뒤부터는 아랍은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으며 1936년 10월까지 총파업이 계속되었다. 그해 여름,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유대인 농장과 과수원이 파괴되었고 다수의 유대인들이 폭행당하거나 살해당하고, 베이잔(Beisan)이나 아크레(Acre) 등지에서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각주:10]


필 위임회도 유대인 지역과 요르단에 부속된 아랍 지역의 두부분으로 분할할 것을 권고할 정도로 파업이 격화되면서 범위가 확대되자 이후 18개월 동안 영국은 예루살렘과 나블루스, 헤브론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1936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아랍대폭동 또는 대폭동(Great Uprising)기간에 영국군은 6천여명의 유대계 무장 보조 경찰의 지원을 받으며 [각주:11] 광범위한 폭동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아랍계가 사망자가 5,000명에 달하고 부상자가 1만명이 넘었으며 성인 인구의 10%가 사망, 부상, 투옥 또는 추방되었다. [각주:12] 유대계도 400명이 사망하고 영국인은 200명이 사망했다.

또, 이 시기에 종교적인 이유로 시온주의를 지지하던 [각주:13] 찰스 오드 윙게이트(Chomrles Orde Wingate)에 의하여 영국군과 하가나 용병으로 구성되어 제즈릴 계곡과 갈릴리 저지에서 아랍 폭도를 진압하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던 [각주:14] "특별 야간 순찰대"로 아랍 정착지를 습격한 것도 주목할 부분으로 이 순찰대는 이스라엘 학자인 아니타 샤피라에 의하면 과도하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한 부대로 소문이 나있었다. [각주:15]

하가나는 2만명의 경찰관, 전투병, 야간 순찰대를 제공하였으며 이 중에는 훗날 이스라엘 군의 핵심이 될 이갈 알론과 모세 다얀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36~1945동안 영국은 안전보호를 이유로 아랍계에게서 몰수한 13,200정의 화기와 유대계에서 몰수한 521정의 무기를 협조적인 유대계 집단에게 제공했다. [각주:16]

라시드 칼리디에 의하면 폭동과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전반적인 효과는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능력, 사회적 결속력, 군사적 능력이 1948년에 약화되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팔레스타인이 1947~49동안 가장 치명적인 위협에 마주하게 되었을때 그들은 여전히 1936~39 동안의 영국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단합된 지도력의 부재로 고생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실제적인 지도부를 전혀 갖지 못한 상태였다. [각주:17]

아랍인들의 유대계에 대한 공격은 세가지 지속적인 효과를 낳았다. 첫재, 1948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하가나(The Defense)를 비롯한 유대계 지하 무장조직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이러한 공격은 이 지역의 두 사회가 융합될 수 없음을 명백히 했으며 분리라는 발상이 공고히 되었다. 세번재로 영국의 아랍 반발에 대한 대응은 유대계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던 1939년 백서를 공고하게 했다. 그러나 2차대전으로 인해 이민은 할당량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백서 정책은 전후에 급진적인 유대계 분파들이 영국에 더이상 협조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국 식민당국과 지역 아랍, 유대계 훈련

1936년부터 영국 정부는 유대계 대표부의 협조하에 일정한 범위의 안전 및 첩보팀을 운영하기 위한 훈련, 무장, 구성, 자금지원을 개시했다. 이로써 6,000~14,000 명의 강력한 유대계 정원외 치안대, [각주:18] 고도로 훈련되고 기동화된 6,000~8,000명의 유대계 정착민 경찰, [각주:19] 특별 야간 경비대 [각주:20] 영국 항공대 근무 [각주:21] 등의 형태로 유대인들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또 1,500명 규모의 수비 중대 (Field Companies) 또는 FOSH라고 불리는 정예 타격 부대 [각주:22] 가 구성되고 1939년에는 보다 대규모의 수비 부대(Field Force) HISH로 개편되었다. [각주:23] [각주:24] 또, 하가나의 첩보와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SHAI는 모사드의 모체가 되었다. [각주:25]

또 영국은 6천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를 2차대전 기간 동안 징병했고 1,700 여명의 팔레스타인 아랍계가 트렌스 요르단 지원군(Trans-Jordanian Frontier Force) T.J.F.F. 에서 복무했다. [각주:26] 이에 더해 영국은 요르단의 아랍 군단(Arab Legion) 사령관을 맡은 존 바이곳 글룹 파샤(John Bagot Glubb Pasha)를 비롯한 장교단을 제공하고 이집트 군에 트럭이나 소총, 항공기를 제공했다. 이러한 영국군의 훈련은 아이러니 하게도 양측이 훗날 더욱 분쟁이 심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2차대전

1940년 8월 6일, 영국의 전시 국무장관 앤소니 이든은 내각에 왕립 동 켄트 연대(the "Buffs")에 아랍과 유대인을 징병토록 조언했다. [각주:27] 9월 3일 윈스턴 처칠과의 점심 식사에서 체임 바이츠만은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구성하여 장교단을 훈련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에 팔레스타인 출신 3,000명을 포함한 1만명의 유대인들이 영국군에서 훈련을 받았다.

롬멜 원수가 이집트로 진격해오자 영국 정부는 1941년 4월 15일 1만 명의 유대인들이 켄트 연대의 수개 중대를 편성되었고 6천여명의 보조 경비단을 포함한 1만여 명을 동원하는 한편, 4만~5만 명의 경비대를 구성했다. 이 계획은 존 딜 원수에게 승인되었고 카이로의 특수작전부서(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는 하가나에게 팔레스타인 북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도록 제의하였다. 팔마흐는 하가나의 주력을 구성하고 이츠하크 사다는 지역을 방어하는 유대계를 통해 낙타 정찰대를 구성하여 나찌 수송대를 습격하고 통신망을 교란하는 작전에 투입하려는 북부 계획(North Plan)을 세웠고, 필요하다면 영국 정보부가 모세 다얀의 지도하에 독일 침공시, 소규모 무선망을 형성하기로 했다. [각주:28]

많은 망설임 끝에 1944년 7월 3일, 영국 정부는 신중히 고른 유대계와 비 유대계 장교들로 구성된 유대인 여단을 구성했다. 1944년 9월 20일, 전쟁성(War Office)의 공식 소식통(official communique)은 영국군에 유대인 여단이 구성되었음을 밝혔다. 시온주의자들의 기가 공식적으로 표준화 된 것으로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지원자들이 3개 보병 대대와 수개 지원 부대를 구성했다. [각주:29]

전쟁이 끝나자 마자 영국의 정책은 전쟁전의 그것으로 즉시 전환되었다. 무기들은 모두 몰수되었고 몇몇 하가나 구성원들이 투옥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엘리후 샤하로프(Eliahu Sacharoff)는 화기 면허가 허용한 것보다 2개 이상의 탄창을 보유한 것만으로 7년형을 언도받아 유명한 케이스가 되었다. [각주:30]

지역에서 식민 통치의 명멸

그와 동시에 많은 주변 아랍국들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하시미트 왕조의 압둘라가 통치하는 트렌스 요르단은 1946년 영국에서 독립했으나 여전히 영국의 큰 영향력 하에 있었다. 영국과 이집트의 1936년 조약은 영국이 수에즈 운하에 경비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승인하고 있었다. 1945년 부터 이집트는 식민지로 취급받고 있는 모욕적인 조약의 내용을 협상해 나갔다. 레바논은 1943년 독립했지만 프랑스 부대는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까지 주둔했다.

1045년 영국은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트렌스요르단, 예멘이 아랍연합을 구성하여 아랍 국가들 간의 정책을 조정해 나가도록 종용했다. 이라크와 트렌스요르단은 밀접하게 정책을 협조하면서 방어조약을 결성하자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는 트렌스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합병하고 이곳을 시리아, 레바논, 히아즈 지역의 제압을 위한 기지로 사용할지 염려하기 시작했다.

  1. Geddes, 1991, pp. 79-81. [본문으로]
  2. Under the Balfour Declaration the British government had undertaken to favour the reconstitution of a Jewish national home in Palestine without prejudice to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본문으로]
  3. Karsh & Karsh, 1999, pp. 254-258 [본문으로]
  4. Geddes, 1991, pp. 79-81 [본문으로]
  5. Geddes, 1991, pp. 79-81. [본문으로]
  6. 초기에는 6개월로 한정된 직위였다. [본문으로]
  7. Gelber, 1997, pp. 6-15 [본문으로]
  8. Sicker, 1999, p. 164. [본문으로]
  9. Sicker, 1999, p. 164. [본문으로]
  10. Gilbert, 1998, p. 80. [본문으로]
  11. Gilbert, 1998, p. 85. The Jewish Settlement Police were set up and equipped with trucks and armored cars by the British working with the Jewish Agency. [본문으로]
  12. Khalidi, 2001 [본문으로]
  13. van Creveld, 2004, p. 45. [본문으로]
  14. Black, 1992, p. 14 [본문으로]
  15. Shapira, 1992, pp. 247, 249, 350 [본문으로]
  16. Khalidi, 1987, p. 845 (cited in Khalidi, 2001). [본문으로]
  17. Khalidi, 2001, p. 29. [본문으로]
  18. Bowyer Bell, 1996 , p. 33. [본문으로]
  19. Katz, 1988, pp. 3?4 [본문으로]
  20. Kaniuk, 2001, p. 19. [본문으로]
  21. Brown and Louis, 1999, p. 193. [본문으로]
  22. Katz, 1988, pp. 3?4. [본문으로]
  23. Oring, 1981, p. 14. [본문으로]
  24. Katz, 1988, pp. 3?4 [본문으로]
  25. Richelson, 1997, p. 238. [본문으로]
  26. Netanel Lorch, The Edge of the Sword: Israel's war of independence, Jerusalem: 1961, p. 21 [본문으로]
  27. Israel Foreign Ministry et al, 2000, p. 51. Approximately 26,000 Palestinian Jews served in the British Army. The three companies of Jewish volunteers in the Buffs became the Palestine Regiment. In September 1944 the Jewish Brigade was formed. Its 5,000 volunteers saw service in Egypt, Northern Italy and North-West Europe. According to Moshe Shertok by 1943 of the 500,000 Jews in Palestine 30,000 had joined the British Army; a further 20,000 worked for the army as civilians and another 20,000 worked on army contracts in factories. [본문으로]
  28. Israeli and Penkower, 2002, pp. 112?113. [본문으로]
  29. Beckman, 1999, pp. 42?43. [본문으로]
  30. "The Palestine Problem II?New Factors In The Racial Balance Of Power, Growth Of Jewish Underground Groups", From a Special Correspondent Lately in Palestine. The Times, Wednesday, 26 September 1945; pg. 5; Issue 50257; col F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