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종전협정
이집트
1948년 1월 6일, 랄프 분쉐 박사는 이집트가 마침내 이스라엘과 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1월 12일부터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발표가 있은 직후 이스라엘은 팔루자(Faluja)의 포위되어 있던 이집트 여단을 해방시켰지만 그달 말이 되자 대화는 난황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집트는 48년 11월 4일 UN안보리 결의안 1070에 따라 11948년 10월 14일 점령하고 있던 영역으로 후퇴하겠다고 주장했다. 1949년 2월 12일, 이슬람 형제단의 지도자인 핫산 알 바나의 살해로 인해 이집트 내부의 긴장감이 상승한 것도 회담의 교착에 빠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2월 초, 이스라엘은 미국이 성공적인 결론을 도출토록 요구하는 상황에서 대화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고 2월 24일 이스라엘-이집트 휴전 조약이 로도스에서 체결되었다.
"휴전선은 이집트가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오늘날의 가자지구)을 제외하고 1906년의 국제 경제선을 따르기로 했으며 팔루자에 포위되어 있는 이집트군은 무장을 유지한채로 지역을 이스라엘에 넘겨주고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양측은 우자 알 하피르(Uja al-Hafeer Nitzana)의 중간지대를 비무장화하여 휴전협정 회담장으로 했다.
레바논
1949년 3월 23일,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1
조약의 골자는 그린 라인이라는 정전선을 국경선에 설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합의와는 달리 여기에는 이 휴전선이 국경선이라는 조항이 없었지만 이는 법률상(de jure)의 국경선으로 인정되었다.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기간에 점령했던 13개의 레바논 마을에서 전군을 철수한다.
요르단
1949년 4월 3일,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2
조약의 골자는 요르단 군이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동부시가를 포함한 요르단서안 점령지역에 남는다는 것으로 요르단은 샤론 평야를 관망할 수 있는 지역에 전초기지를 설치하고 전군을 후퇴시켰으며 이스라엘도 전에 이라크 군이 주둔하고 있던 요르단 서안 지역을 요르단군이 점령하는데 동의했다.
조약 6장에 의해 이스라엘은 와디 아라(Wadi Ara)와 리틀 트라이앵글(Little Triangle)을 헤브론 남쪽 언덕 지역과 교환했다. 3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예루살렘과 스코푸스 산의 히브리 대 사이에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였고 라트룬-예루살렘간 고속도로에 성지에 접근하는 목적을 포함해서 자유로운 접근이 보장되었다.
시리아
1949년 7월 20일,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4
시리아는 전군을 점령중이던 국제관리구역 서부에서 철수하고 이 지역은 비무장지구가 되었다. 조약은 휴전협정선이 "궁극적으로 국경선으로 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해서 규정하고 있다.(Article V)
이라크
이라크는 비록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고 주둔하고 있던 지역에서 1949년 3월에 철수했다. 이라크 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협의하게 되었고 이라크와는 개별적인 휴전협정이 수립되지 않았다.
사상자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인구의 1%에 해당하는 6,373명을 잃었고 그 중 4,000명은 군인이었으며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아랍측 손실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10,000에서 15,000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인구 변화
1947~1948 팔레스타인 내전과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약 75만명의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도주했거나 추방되었다. 1951년 UN의 팔레스타인 조정위원회는 이스라엘 영토에서 발생한 난민의 수를 약 711,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수치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의 수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 동안 400개 이상의 아랍계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10개 유대인 마을도 파괴되었다. 6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원인은 역사가 사이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는 주제로 아랍지도자들의 책임이라는 견해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계획적으로 수행한 것이라는 견해, "전쟁에 따른 결과"라는 견해들이 있다. 7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귀환에 관한 논의는 아랍 이스라엘 분쟁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랍계는 매년 5월 15일마다 집회와 저항운동을 벌이고 이 데모활동의 참여인구는 시대에 따라서 변화했으며 중동의 반이스라엘 분위기에 힘입어 점차 호응이 높아지고 있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실패로 인한 알 아크사 인티파타 이후로 반이스라엘 데모 참가인구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48년 전쟁 중에 10만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으며 3년뒤에는 아랍 지역에서 추방된 70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8 2차대전에서 살아남은 25만명의 유대인 중에 136,000명이 이스라엘에 정착했으며 9 1948년 전쟁부터 6일전쟁까지 아랍 각국에서 일어난 반유대 공격을 피해 758,000~900,000명이 이스라엘에 유입되었다. 10 11
- yale.edu/lawweb/avalon/mideast/arm02.htm [본문으로]
- yale.edu/lawweb/avalon/mideast/arm03.htm [본문으로]
- yale.edu/lawweb/avalon/mideast/arm03.htm#art6 [본문으로]
- yale.edu/lawweb/avalon/mideast/arm04.htm [본문으로]
- users.erols.com/mwhite28/warstat4.htm [본문으로]
- General Progress Report and Supplementary Report of the United Nations Conciliation Commission for Palestine, Covering the Period from 11 December 1949 to 23 October 1950, published by the United Nations Concilation Commission, October 23, 1950. (U.N. General Assembly Official Records, 5th Session, Supplement No. 18, Document A/1367/Rev. 1) [본문으로]
- See eg, Eugene Rogan and Avi Shlaim, The War for Palestine: Rewriting the History of 1948 [본문으로]
- Jewish Refugees of the Israeli Palestinian Conflict". Mideast Web. Retrieved on 2007-03-16. [본문으로]
-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chap.VI. [본문으로]
- Displaced Persons retrieved on 29 October 2007 from the US Holocaust Museum [본문으로]
- Stearns, 2001, p. 966. [본문으로]
'History > Arab Israeli conflict'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차 중동전쟁, 5. 리버티 사건 (0) | 2008.07.17 |
---|---|
3차 중동전쟁, 4. 전쟁의 전개 (1) | 2008.07.16 |
3차 중동전쟁, 3. 전쟁 전야 (0) | 2008.07.15 |
3차 중동전쟁, 2. 티란해협 봉쇄 (0) | 2008.07.14 |
3차 중동전쟁, 1. 분쟁재개 (0) | 2008.07.13 |
1차 중동전쟁, 8. 전쟁의 전개 (0) | 2008.07.11 |
1차 중동전쟁, 7. 분쟁의 주역들 (0) | 2008.07.10 |
1차 중동전쟁, 2. UN분리안 (0) | 2008.07.08 |
1차 중동전쟁, 1. 배경 (0) | 2008.07.05 |
4차 중동전쟁, 7. 머나먼 평화 (0) | 2008.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