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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3차 중동전쟁, 2. 티란해협 봉쇄

초기 군사활동

5월 17일, 가말 압델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UNEF병력 4,000여명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아바 에반의 절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UN 군은 수일 뒤 부대를 철수했다.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과 공보부는 당시 이집트가 북예맨 내전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대 이스라엘 전선에서 개전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각주:1]

그러나 나세르가 예맨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시나이 쪽으로 진출시키겠다고 선언하자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될 정도로 병역 대상자 일체를 소집했다. 요르단 국경선에서는 비상 시국 분위기가 없었으며 요르단 군단이 암만에서 유대아, 사마리아 등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는 중에 관광객들은 여전히 만델바움 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반면에 이집트는 샬름 엘 세이크를 점령했다. [각주:2]

이와 함께 이집트는 티란 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국적의 선박통행을 막고 이스라엘로 향하는 전략물자 운반선은 이스라엘 국적 선박이 아니더라도 통행을 금지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개전 이유로 인식되었다. 나세르의 움직임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에게 전쟁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었다. 크네셋과 대화하기 전에 이스라엘 수상 레비 애쉬콜은 아랍국가에게 이스라엘이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시킴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주:3]

이스라엘의 학자 아브네르 코헨은 이 시기를 이스라엘의 핵무기 정책에 치명적이었던 시기로 논평하고 있으며 핵무기에 대한 열망이 이스라엘에게 핵무장에 있어서 작전적 준비상태에 들어서게 했다고 논한다. [각주:4]

정치적 행동

예루살렘에서는 통합정부 수립의 요구가 커지고 있었으며 국가 종교당(National Religious Party)이 긴급 정부 구성을 요구했다. 오랜 정치적 라이벌 벤 구리온과 베나햄 베긴이 스데 보커(Sde Boker)에서 만난 자리에서 베긴은 벤구리온에게 에쉬콜 정부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비록 에쉬콜의 마파이 당은 초기에 연립 정권 구성에 반대했지만 급격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각주:5]

5월 23일, 총참모장 이즈하크 라빈은 벤구리온을 만나 재보증을 요청했지만 벤구리온은 라빈이 예비군을 동원하고 아랍국가 연합을 상대로 전쟁을 공공연히 준비하여 국가적인 사기를 위험하게 만들었고 비난하였으며 최소한 라빈은 11년전 2차중동전에서 벤구리온이 했던 것 처럼 외국의 지원을 얻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라빈은 이 회담에서 충격을 받고 "담배 중독"사건이라고 알려지게될 36시간 동안의 칩거에 들어갔다. [각주:6] 라빈은 다시 에제르 바이츠만을 만나 그에게 총참모장 직을 제의했지만 바이츠만은 IDF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각주:7]

반면에 에반은 미국으로 건너가 딘러스크 국무장관을 세차례 만났지만 워싱턴은 소련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만 이스라엘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대통령 린든존슨은 이스라엘에 석유 제공을 약속하면서 군사작전을 시작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각주:8]

국론 통합과 전쟁으로의 국론통일

5월 28일 저녁 에쉬콜은 라디오 방송을 발표했다. 연설 연습중에 몇가지 초고를 놓고 수정한 끝에 완성된 원고를 받으면서 "병력을 철수하다"는 단어를 "병력을 이동하다"라고 바꾸었다. 에쉬콜은 망설이기 시작했으며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 전국민이 생방송 마이크 앞에서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들었으며 [각주:9] 이 연설은 "더듬거리는 연설"로 알려지게 된다.

5월 29일, 하레츠 신문은 "에쉬콜은 수상으로 적합하지 않으며 현 시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취지의 사설을 쓴다. 에쉬콜은 크네셋에서의 연설로 항행 자유 원칙이 해협에서 효력을 발휘할 것이며 문제 없이 모든 국가들에게 통행이 허용되리라는 것을 대중이 믿게 하려고 했지만 국내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6월 1일 에쉬콜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모세 다얀에게 비밀 포트폴리오를 제공했다. 또, 정부의 메나헴 베긴과 요셉 사피르를 대변인으로 임명하고 포트폴리오 없이 내각을 구성했다. [각주:10]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수립된 연립정부로 이 시대에는 멤셀렛 리쿠드 레우미라고 불리웠다. 반면에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서 국민들은 모래자루로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각주:11]

6월 2일, 애쉬콜은 IDF 참모진과 함께 텔아비브에 최고사령부를 설치했다. 마파이 당의 잘만 아란이 공격에 반대했고 NRP의 헤임 모세 사피라는 "싸울 준비는 되어 있지만 자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모티 호드 소장은 그들에게 이스라엘 공군의공격이 필수적이라과 설득하려 했고 모세 펠레드는 어째서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 했으며 아리엘 샤론 소장은 이스라엘 군은 "지금까지 보다 더 이집트 군을 완전히 격파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애쉬콜은 여전히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각주:12] [각주:13]




티란 해협



5월 22일,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적의 선박이나 전략적 물자를 선적한 모든 선박"의 티란 해협 출입을 23일부터 금지한다고 발표한다. [각주:14] 나세르는 "이스라엘 국적의 어떠한 선박도 아카바 만(지중해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중요 상업항)을 통과할 수 없다."고 발표하면서 유엔 해양법에 관한 합의를 어기고 자국의 해역을 12마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유엔의 합의 23조에서 자국 해역에서도 문서와 특별한 필수물품의 수송을 허가하고 있는 국제적인 합의를 위반한 것이었으나 이집트정부는 이집트 해역 내에서 위에 명시한 선박들은 허가를 받아야만 통행할 수 있고, 국제적인 합의는 이집트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집트 정부의 입장으로, 티란 해협은 불과 넓이가 5km에 불과한 것으로 내해에 해당하며 이집트는 이 지역의 해운활동을 통제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이집트는 티란 해협을 거쳐 자국 해역으로 진입하는 외국 선박에 대하여 선적물을 점검할 권리가 있다는 [각주:15] 것이었으며 나세르는 이에 대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한 선박이 아카바 만으로 진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상업선박은 지중해 측 항구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존 퀴글리에 의하면, 1967년 6월까지 2년동안 이스라엘 국적의 선박이 엘리앗 항구를 이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봉쇄의 영향 문제를 떠나서 국제법적으로 비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한 선박까지 봉쇄된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각주:16] 이스라엘은 해협 봉쇄가 부당한 것으로 보고 이러한 봉쇄행동은 시나이와 가자 지구에서의 철군에 합의한 1957년의 휴전협정 상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각주:17]

이집트와 다른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영토에 대한 사실상의 무장 공격 행동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헌장 51조에서 규정된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집트는 아카바 만에 대해 그 해안지역을 합법적으로 영유하고 있는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만이 접근권한을 갖는 국내 수로이므로 이상의 3개 국가는 적성국가 선박의 통항을 금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대표부는 "이스라엘이 움라시라시를 포함한 수마일의 해안선을 점유하고 있지만 1948년 이집트-이스라엘 간 일반휴전협정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불법점유이므로 이스라엘 측의 주장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각주:18]

아랍 국가들은 국가해역 및 인접지역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Territorial Sea and Contiguous Zone) 16조 4항 [각주:19] 을 비준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스라엘 측의 통행권을 방해했으나, 내해에서의 무사통항권 문제는 국제법 분야에서 상당기간 논쟁이 되었다. [각주:20] [각주:21] 이집트는 장기간에 걸쳐 이 지역에서의 통행권을 인정해 왔기에 무사통행권에 대한 법적 신뢰(opinio juris)가 형성되었다. [각주:22] 게다가 이집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나피르(Sanafir) 섬과 티란 해협을 점령한 1950년, 미국에 이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으로 평화로운 통행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며, 이 지역에서의 통항행위가 “국제 현실상 인정되고 있는 것이며, 국제법상의 원칙으로 인정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각주:23] 1949년 국제사법재판소는 Corfu Channel Case (영국 대 알바니아) [각주:24] 에서 비록 내해와 연결된 수로라 하더라도, 군함을 포함한 외국 선박이 대해를 이용하는 항로의 일부로서 일상적인 통행을 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나, 1958년의 해당협정이 발호되기 까지는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각주:25] [각주:26] [각주:27]

UN총회는 전후에 이 사건을 논의하여, 아랍연합은 설령 국제법 상 이스라엘의 통행권이 인정되더라도 봉쇄는 유엔 헌장 51조에 의한 국제법상의 “무력공격(armed attack)”이 아니므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공격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국제법 학자인 존 퀴글리 교수는 비례의 원칙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통항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준의 무력행동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각주:28] 이 사건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으며 국제사법의 중추를 이루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국제사법위원회의 견해가 엇갈리는 케이스로, 국제형사재판소는 봉쇄를 전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에 따라 전쟁행동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국제 사법위원회는 UN 51조에 규정된 대로 “무력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각주:29] [각주:30]

게다가 이스라엘은 1956년 전쟁(제2차 중동전)에서 샬름 엘 세이크를 점령하고 봉쇄를 해제했지만 점령한 영토를 이집트에게 반환하고 철수했었다. 이 시점에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 다시는 티란해협의 통항이 금지되지 않을 것을 보장했었다. 예를 들어 UN프랑스 대사는 티란해협의 자유통항을 방해하는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발표했으며 미국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제나워는 공적으로 티란해협 봉쇄 행위는 이스라엘이 UN 헌장 51조에 의거해 자국의 해운권을 보호하게 하는 공격적 행동이라고 인정했었다. [각주:31]

나세르는 전쟁 전에 이집트 의회에서 “아랍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엘리앗 항구가 봉쇄되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영원히 말살하느냐에 관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각주:32]

이스라엘 측은 해협의 봉쇄를 경고로서 해석했고 1957년의 보장대로 미국과 영국이 티란 해협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으로 보았다. 국제해양위원회의 해롤드 윌슨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에게 이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제공할 것을 존슨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큰 도움을 받지 못했고 영국과 네덜란드 만이 선박지원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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