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와 요르단
5월과 6월, 이스라엘 정부는 여러전선에서 동시에 공격받을 위험을 피하고, 요르단 서안의 팔레스타인 계 문제를 피하기 위해 요르단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범아랍주의 여론 때문에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1967년 5월 30일 이집트와 시리아 간의 군사동맹에 더해 요르단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후세인 국왕을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부르던 나세르는 "우리의 기본적 공동목표는 이스라엘의 파별이며 아랍인들은 모두 싸움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1 2
상호 방위조약에 서명하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1967년 5월 말, 요르단 군은 이집트의 압둘 무님 리아드(Abdul Munim Riad) 장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같은 날 나세르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군이 이스라엘 국경선을 포위하고 있다. .. 이 최전선 포위망 뒤에는 이라크, 알제리아, 쿠웨이트, 수단... 모든 아랍 국가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아랍 국가들은 전투를 위하여 잘 조직되어 있으며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은 경고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3 라고 선언했다. 4
이스라엘은 요르단에게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수차례 요청하였다. 무타위(Mutawi)에 의하면 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 군과의 전면전에서의 승산과 국내여론의 악화로 인한 정치사정 변화라는 문제 사이에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요르단의 참모총장 자이드 벤 쉐이커(Zaid Ben Shaker) 장군은 "만약 요르단 군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내전이 요르단에서 발생할 것이다."라고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footnote[ quoted in Mutawi, 2002, p. 102. [/fotnote] 하지만 아비 실레임에 의하면 후세인의 행동은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였다. 5
6월 3일, 전쟁 발발 직전 이집트는 암만에 2개 대대규모의 특수부대를 항공파견하여 이스라엘의 국경선을 침투하고 요르단 전선에서 IDF를 공격하여 이집트 방면에 대한 압력을 줄이려고 했다. 소련제 야포와 이집트 군수물자 및 운용요원들이 요르단에 비행기로 도착했다. 6
요르단의 역할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각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서안을 통제하고 있다는데 기인했다. 이 지역에 배치된 아랍군의 최선봉은 이스라엘 해안까지는 겨우 17km거리에 있었고 이 정도는 훈련된 기갑부대에게는 30분만에 주파하여 이스라엘을 일도양단할 수 있었다. 7
후세인은 지난 10년간 요르단군의 규모를 2배로 증가시켰고 1967년 초에 미국이 훈련관과 무기를 제공했었으며 이는 다른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작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변수가 되었고, 이스라엘 지도층에게 요르단 서안으로부터의 공격은 존망에 걸린 위협으로 비춰졌다. 8
같은 시기에 이라크, 수단, 쿠웨이트, 알제리 등 이스라엘에 간여하지 않던 다른 아랍국가들은 자국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나세르가 이스라엘을 아카바 만으로 걷어차고 있다. 1967년 레바논 알자리다 신문 만평.
5월 26일 아랍 무역연합에서의 연설에서, 나세르는 "이스라엘이 시리아나 이집트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개시할 경우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며, 우리의 전략적 목표는 이스라엘의 완전파괴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9 이스라엘 외무장관 아바 에반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나세르의 확신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으며, “나세르가 원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위협을 통해서 전쟁없이 승리를 얻고자했다”라고 적었다. 10 11 1967년 6월 4일, 이집트 주재 뉴욕타임즈 기자였던 제임스 레스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분위기는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 듯 하였으며 적어도 전쟁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전쟁발발의 가능성은 비록 그 시점에서의 승산은 충분하다고 보이지 않았어도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12 13
2002년 미국의 라디오 기자인 마이크 슈스터(Mike Shuster)는 "전쟁 전,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국가들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통치하는 이집트는 중동의 아랍 군대중 가장 강력했습니다. 급진적인 바티스트(Baathist) 당이 주도하는 시리아도 이스라엘에 압력을 증대하고 있었죠"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14
나세르는 티란 해협의 봉쇄, 동원 병력의 시나이 반도 내 배치를 통해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압력을 가하더라도 미국이 베트남 전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지도부는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으리라 예측했다.
외교 및 첩보
이스라엘 내각은 5월 23일, 회의를 가지고, 5월 25일까지 티란 해협의 봉쇄가 해제되지 않는다면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결정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 유진 로스토우는 비폭력적 해결안을 준비하기 위하여 10~14일 정도의 시간을 요청했다. UN사무총장 우 탄트(U Thant)는 카이로를 방문하여 양측에게 협상을 권하고 티란 해협의 봉쇄 대신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위기를 해소할 것을 권했으나 이스라엘이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집트는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나세르의 이 결정은 그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외교협상을 승인하는 것은 국제적인 정치적 지원을 얻는데 효과적이었으며 시간이 지속될수록 이집트의 군사적 준비상태와 다른 아랍국가들과의 협조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으며 동원령을 발령하기 까지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파악했다. 15 16
1967년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한 CIA보고서 "특별조사"
미국은 계속 협상을 위해 노력했고 나세르도 부통령을 워싱톤에 파견하여 외교적 협상안을 확인하도록 했으나 이스라엘이 공격을 시작했기에 더 이상의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몇몇 분석가들은 나세르의 의도는 정치적인 이점을 통해서 과거의 이스라엘군과의 교전에서 확실해진 이스라엘의 무력을 고려할 때 예측할 수 있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나세르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려는 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성과 효과적인 군사력을 저평가했던데서 기본적으로 비롯되었다. 17
이집트의 압델 하킴 아메르 원수는 5월 26일 새벽 엘리앗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1967년 5월 26일 이스라엘 외무상 아바 에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의 외교적 상황을 협상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도착했으며 에단이 도착하자마자 이스라엘 정부에게 긴급연락이 도착하여 48시간 내로 이집트와 시리아군의 이스라엘에 대한 “절멸전” 계획을 입수했음을 전달받았다. 에반은 국무성 장관 딘 러스크, 국방장관 맥나마라, 존슨 대통령을 차례로 만났지만 미국은 에단이 접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첩보를 받지 못했다고 확인하면서 이집트 군은 시나이 지역에서 방어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에반은 백악관을 혼란스러운 상태로 떠나야했다. 역사가인 마이클 오렌은 당시 그의 반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에반은 창백해진 상태로, 나세르가 공격을 결정했거나 공격할 의도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위협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자신들의 약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어, 대통령과 의회가 “현상황에서 모종의 적극적인 행동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고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견해를 긴급회선으로 이스라엘에 전하면서 그는 ‘지혜와 정확함, 전술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잘 되어가는 것이 없다’라고 적었다.” 2002년의 강의에서 오렌은 5월 27일 2:30, “존슨은 자신의 보좌관들과 함께, 이스라엘 첩보부가 우리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며 크레믈린의 알렉세이 코시킨에게 핫라인을 연결하여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전쟁발발위협에 대해서 중동에서의 그쪽(공산진영) 대리인인 이집트가 48시간 내로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미확인 첩보를 입수했소.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행동을 멈추도록 해주시오”라고 요청했고, 그날 소련의 이집트 대사 드미트리 포히다예프는 나세르를 방문하여 코시킨의 “이집트가 더 이상 중동에서 전쟁위험을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전쟁을 시작할 경우 소련측은 지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낫세르는 이에 낙심하여 이집트 공군 사령관 마흐메드 시키 중장에게 작전을 취소하도록 지시했다. 18 이집트 부통령 후세인 알 샤페이에 의하면 나세르는 아메르의 계획을 알자마자 작전을 취소했다고 한다. 19 20
5월 30일, 나세르는 11일전의 존슨의 요청에 따라 이집트 부통령 재카리야 무히딘을 워싱턴에 파견하기로 했으며 6월 7일까지 미국의 생각을 확인하도록 했다.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6월 5일 시작된 이스라엘 측의 선제공격에 실망하였고 만약 회담이 실제로 열렸다면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을 거라고 보았다. 21 마이클 오렐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러스크는 “미친듯이 화를 냈고”존슨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행동을 시작했을 때 내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22 23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이 행동하지 않고, 유엔은 행동할 수 없다면, 이스라엘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지어졌고 6월 1일, 모세 다얀은 이스라엘 국방장관에 취임했으며 3일, 미국에게 이스라엘이 전쟁준비를 계속하리라는 모호한 답변을 남겼다. 6월 5일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후일 6일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마틴 반 크레벨은 “…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는 개념은 이스라엘 국방군의 개념이 아니라, 후일의 역사가들이 덧붙인 것으로 이스라엘군 지휘관들의 반응은 1948년과 1956년의 승리에 기초한 것으로, 국방상 모세 다얀에게서 하달된 지시가 전의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은 “격렬하고, 빠르며 세련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바 레브 장군은 이를 글로 적은바 있고, 정부에게 전쟁이 가능한 한 빨리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
양측 군
전쟁 전야, 이집트 군은 총병력 16만 중에 10만의 전력을 7개사단(4개 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 1개 기계화사단)과 4개 독립 보병여단, 4개 독립기갑여단으로 편성하여 시나이반도에 배치한 상태였다. 병력의 1/3은 예맨 내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고참병력이었고 나머지는 동원된 병력으로 총, 950대의 탱크와 1,100대의 장갑차량, 1,000문의 야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15,000~20,000명의 이집트 군은 여전히 예맨에서 전투중이었다. 25 26 27 28 자신의 목표와 과제를 달성하려는 나세르의 야심은 그의 군사적 명령에 잘 반영되어 있었으며 1967년 5월에만 해도 참모진은 4번이나 작전계획을 변경했고 그때마다 부대를 재배치하여 수많은 병력과 차량의 위치변환이 불가피했다. 5월 말,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의 공격 선봉을 보병전력으로 방어하고 이스라엘 군을 확인한 다음 반격작전으로 포위하기 섬멸하기 위한 쿼히르("Victory")작전을 중지시키고, 방어전력을 시나이 반도쪽으로 전진배치했다. 29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의 동원상태를 계속 강화시켜 이스라엘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30
시리아 군은 총병력 75,000명이고 요르단 군은 55,000명으로 31 3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 250대는 미국제 M48패튼이었고 상당수의 M113보병전투차량을 장비한 기계화 보병대와 신설 미국식 군사학교에서 훈련된 공수 대대가 있었다. 또, 12개 대대의 포병대와 81mm~120mm박격포대가 6개 있었다. 32 33
5월말 이스라엘 군이 다양한 요르단 사령부에서 입수한 기록은 야간에 하시미트 여단에게 라모트 부르예 비르 마인(Ramot Burj Bir Mai'in)을 체포하는 암호명 "칼레드 작전"이 있었다고 한다. 작전의 목적은 라트룬의 여단사령부로 로드와 라말레를 기갑부대가 점령하는 것이었다. 암호명 "고"는 사에크였고 마지막은 나세르였다. 요르단군은 또한 예루살렘 회랑의 전략적 요충지인 모차와 샬빔 점령계획을 세웠으며 모차는 말 아두밈 근처에 위치한 제27 보병여단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 예비 여단은 야간에 모차로 침투해서 기간시설을 파괴하고 남아았는 난민이 800명이 도기까지 떠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34
100대의 이라크 탱크와 1개 보병사단은 요르단 국경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호커 헌터와 MiG21을 장비한 2개 비행대가 요르단 국경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35
이스라엘 군의 총병력은 동원군을 포함할 경우, 264,000여명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아직 동원령은 하달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5월 23일, 뉴욕 타임즈 지의 제임스 레스톤 기자는, "훈련도, 임무숙지, 사기, 장비 면에서 볼 때,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이 없을 경우 아랍 제국가의 군대는 이스라엘 군의 상대가 되기 힘들다 … 설령 예맨 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5만여명의 병력과 공군 최 정예부대를 포함한다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라고 보았다. 36 37
6월 1일 저녁, 이스라엘 국방상 모세 다얀은, 이즈하크 라빈 참모총장과 남부방면 사령관 가비시 장군을 불러 이집트에 대한 계획을 보고받았다. 라빈은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이집트 군에게 티란 해협 봉쇄를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안을 제시한 반면, 가비시 장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얀 국방상은 시리아와의 초기 단계에서의 무력 충돌을 회피할 것에 강조점을 두면서도 가비시의 안을 채택했고 라빈 참모총장 또한 이에 합의한다. 38
6월 2일, 요르단은 모든 예비역 장교를 소집했고 성안에서 라말라의 지역 지도자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전쟁기간 중에 공조할 것을 요청했으며 3일내로 우리는 텔아비브에 도착하리라고 보증했다. 39
- "In May-June 1967 Eshkol's government did everything in its power to confine the confrontation to the Egyptian front. Eshkol and his colleagues took into account the possibility of some fighting on the Syrian front. But they wanted to avoid having a clash with Jordan and the inevitable complications of having to deal with the predominantly Palestinian population of the West Bank. The fighting on the eastern front was initiated by Jordan, not by Israel. King Hussein got carried along by a powerful current of Arab nationalism. On 30 May he flew to Cairo and signed a defense pact with Nasser. On 5 June, Jordan started shelling the Israeli side in Jerusalem. This could have been interpreted either as a salvo to uphold Jordanian honor or as a declaration of war. Eshkol decided to give King Hussein the benefit of the doubt. Through General Odd Bull, the Norwegian commander of UNTSO, he sent the following message the morning of 5 June: 'We shall not initiate any action whatsoever against Jordan. However, should Jordan open hostilities, we shall react with all our might, and the king will have to bear the full responsibility of the consequences.' King Hussein told General Bull that it was too late; the die was cast." Avi Shlaim,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0, ISBN 0393048160, pp. 243-24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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