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
6일전쟁 중에 IAF는 사막전에서 현대적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전술적 기습이 된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공격 이후에 (공격이 시작된 시점에 이집트 공군의 비무장 훈련기 4기만이 비행중이었다.) 이스라엘은 잔존 아랍 공군을 파괴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전술지원 활동으로 첫공격의 전략적 효과를 더욱 확대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체로 저공으로 침투하여 일출 무렵에(전술적으로 태양을 등지고 싸움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기습을 가하는 전법을 이용했고 초기의 타격으로 적 공군의 전술적 저항력을 제거하였으며 제공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부분의 전장에서 육군의 전진을 도왔으며 특별히 요르단 군의 예리고 근처에 주둔한 60기갑여단의 기동을 파괴하거나, 요르단을 거쳐 이스라엘로 진격하던 이라크 기갑군을 격파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
반면에 아랍 공군은 효율적인 공격에 서공하지 못했다. 요르단 전투기나 이집트 Tu-16폭격기의 이스라엘 후방에 대한 공격이 개전 2일동안 이루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로는 공군력이 괴멸되어버렸다. (이집트 폭격기들은 격추되었으며 요르단 전투기들은 비행장 공격중에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승리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전쟁 발발 이전에 자국에 불만을 품은 아랍 조종사들이 수차례 자국기와 함께 이스라엘에 망명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제공한 기체를 시험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은 상대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랍국가 조종사들의 주요 망명사례는 다음과 같다.
1964.01.19, 이집트의 무하마드 아바스는 엘 아리쉬에서 야크-11 연습기에 탑승하여 이스라엘의 핫초 비행장으로 귀순했다. 2 3
1965년, 시리아 공군의 조종사가 MiG-17F를 몰고 이스라엘에 귀순했다.
1966년 이라크 공군대령 무니르 레드파가 3기의 MiG-21F-13과 함께 귀순했고, 이스라엘의 엘 아리쉬 비행장에 실수로 착륙한 알제리 소속 MiG-17F를 최소 6기 정도 압수했으며 그 중 1명은 서방진영에 정치적으로 망명했다.
무니르 레드파 대령의 귀순 이후에도 최소한 2회 이상 이라크 공군이 요르단으로 망명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요르단은 그들의 정치적인 망명은 받아들였으나 공군기는 이라크로 돌려보냈다.
6월 6일, 개전 2일째에 후세인 국왕과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 공군이 이스라엘의 공격을 도왔다고 발표했다.
해전
6일전쟁에서는 해전이 매우 제한되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군 모두 자국 해군으로 상대방을 위협했지만 어느쪽도 해전에 응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은 특수부대원 6명을 투입하여 알렉산드리아 항에 기뢰를 매설하여 소해정을 침몰시켰지만 포로가 되었으며, 6월 7일에는 시나이 반도 최남단의 샬름 엘 세이크에 이스라엘 군의 경보트 부대가 돌입하여 무혈점령하기도 하였다.
하구다 항에서는 엘 미나(항구라는 뜻)로 알려진 이집트 소해정이 침몰했다. 4
리버티 호 사건
리버티호(USS Liberty) 사건은 1967년 6월 8일, 미해군의 기술조사함 USS 리버티가 시나이반도 북쪽 엘아리쉬의 미나렛 북서쪽 24km 거리 공해상에서 이스라엘 전투기와 어뢰정에게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 공격으로 34명의 미군 기술자가 사망했고 최소 173명이 부상당하여 2차대전 이후 미해군 함정이 입은 두번째로 큰 규모의 피해를 입게한 사건이며 단일사건으로는 미국 첩보부에 최대의 인명손실을 준 사건이다. 5
공격이 끝나자마자 이스라엘은 미국에 알리고 리버티 호를 실수로 공격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사고조사위원회는 공격이 IDF의 "전쟁중의 착오와 실수"로 일어났다고 밝혔다. IDF는 미국에게 해당지역내 미국선박의 존재를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리버티호의 존재는 듣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IDF 공군과 해군은 리버티호를 미확인 구축함이거나 이집트 화물선 엘퀴세어로 착각했다고 밝혔다. 6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스라엘이 중요한 우방국가의 선박을 기습적으로 공격할 신뢰할만한 동기가 없으며 그런 실수는 6일전쟁의 긴장된 분위기에서 일어날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 정부는 이러한 위험을 예측했고 리버티호에게 해안에서 거리를 두도록 지시했지만 명령은 일련의 통신장애로 제시간에 전달되지 못했다. 7 IDF 보고서는 "우방국가에 대한 군사공격은 지극히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사고는 전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라고 적고 있다. 8 9
반면에 리버티 호는 엘 퀴세어 호보다 2배는 크며 아라비아 문자가 아니라 라틴문자로 명확히 선박명이 기재되어 있고 미국기를 게양하고 있었기에 이 공격은 계획적인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리버티호 생존승무원 와 CIA국장 리처드 헴즈와 국무장관 딘러스크나 전해군작전부장 겸 합동참모본무 의장 토마스 힌맨 무어 제독 등의 전 미정보부 관료 들 중에도 이 설의 지지자이다. 10
이스라엘과 미정부는 사건을 수차례 조사했지만 리버티호를 착각한데서 생겨난 비극적인 실수였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987년 12월 17일,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양국 정부에 의하여 외교문서 교환으로 종료되었다. 이스라엘은 미정부와 유족에게 약 1천3백만 달러를 지금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여전히 논쟁에 쌓여있으며 이 사건의 관련자 일부는 여전히 공식적 조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1 12
진행중인 논쟁과 미해결 문제들
많은 첩보부와 군사장교들은 이스라엘의 설명에 의문을 제공한다.
- 전 CIA국장 리차드 헬름스 "조사단은 이스라엘이 리버티호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 [14]
- 전 미국무장관 딘러스크 "나는 이스라엘의 설명이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다. ... 외교채널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측의 설명을 거부했었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 공격은 무법행위였다." [15]
생존자중 일부는 이 사고가 미해군함정이 공격받고 의회가 조사하지 않은 유일한 케이스라고 주장하며 국회가 전체 조사를 하길 원한다. [10] 이들은 적절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미의외가 조사한 보고서도 불완전한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면죄부를 발부하기 위한 것이거나 공격의 과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2002년 와드 보스톤 대령은 조사과정에서의 침묵을 끝내고 이스라엘의 공격이 미국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언서를 통해 키드 제독이 그에게 정부가 허위 보고서를 통해 공격이 실수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도록 했다고 말했다고 했으며 그와 키드는 둘다 공격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증거는 명백하다. 키드 제독이나 나는 34명의 미국인 선원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던 그 공격이 미국 선박을 침몰시키고 전선원을 죽이기 위한 시도였다고 믿는다. ..."
하지만 키드 제독이 그런 견해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기록은 없다. [16]
보스톤 대령에 대한 비판은 그가 키드의 관점이나 정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해서는 사실을 말하지 앟는다는 점이다. [11].
미군 사건조사위원회 장교였던 A. 크리스톨을 비롯한 보스톤 비판론은 그가 "선서를 하고도 거짓말을 했기에" 조사위원회의 결론이 잘못된 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론자는 또, 키드 제독에게 압력이 가해졌다는 주장은 풍문에 불과하며 키드는 살아있을때 풍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키드 제독에 대한 보스톤의 진술서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점을 지적한다. 반면에 고의공격론 지지자들은 보스톤의 추후 진술이 법정에서의 진술을 무효화 하는 것이며 보스톤이 사실을 알고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비난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다음의 논지를 통해 공격이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사건 전날,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자국군 기갑부대를 실수로 오폭했던 적이 있으며 전쟁중에 이스라엘 공군이 자국군을 공격한 사례는 상당수 확인된다.
- 리버티 사건은 이스라엘이 아랍 3개국과 교전중이었던 6일전쟁중에 발생한 것으로 실수나 오인이 방생할만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사건발생 수시간 전이었던 11시 45분, 엘 아리시 해변에서 퇴각중인 이집트 군이 탄약고를 폭파하여 대폭발과 거대한 검은 연기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지역이 폭격을 받고있다고 보았고 그 시점에서 해변에 확인되지 않은 선박이 포격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 이스라엘이 리버티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려고 했다면 IAF는 30mm 속사포나 네이팜 대신 철갑탄을 사용해서 수분내로 침몰시켰을 것이다.
- 네이팜은 철제 선박에 실제적인 타격을 주기에는 부적절한 무기이다.
- 항공기의 공격을 받자 리버티는 근처의 포함에게 선제포격을 가했다.
- 이스라엘이 미국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예견될 대가를 고려하거나 이스라엘이 공격 즉시 미 대사관측에 사건을 알린 점 등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이 이 사건으로 얻을 수 있는 명백한 이익이 없다.
NSA 테입과 최근의 논지
2003년 7월 2일,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Agency)는 공격이 있었던 14:30~15:27 (시나이 시간으로 12:30~13:27)동안 근처에서 비행했던 EC-121기가 기록한 정보의 복사본과 요약본, 번역본을 퇴역 해군도선사 제이 크리스톨의 요청에 따라 정보공개법에 의해 공개했다. 대화를 하는 사람은 EC-121에 당시 탑승하고 있던 인물이며 2007년 6월 8일 배포된 내용외에도 2개의 추가적인 테입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13
미공군기가 녹음한 영어번역판 테입은 이스라엘이 공격이 중지된 후에도 여전히 이집트 수송선을 공격했다고 믿고있는 내용이다. [16] [17] 공격이 끝나고 구조 핼기가 긴급한 구조요청을 듣고 물에서 생존자를 구출하면서 국적이 어디냐고 질문하고 있으며 공격당한 배의 생존자들이 아랍어를 사용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18] NSA 보고서는 리버티호가 라디오 전파방해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근처의 미잠수함 앰버잭도 역시 전파방해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4
리버티호가 어뢰공격을 받은지 1시간 이내에 NSA 감독관 마쉘 S. 카터는 도청 기지에 공격이나 반격의 징후를 나타내는 모든 통신을 수집하도록 지시를 보내었지만 통신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미해군 소속의 EC-121 기는 2대의 이스라엘 헬리콥터 조종사와 하졸 공항간에 리버티호 공격에 관한 대화를 도청하는데 성공했다. [19]
NSA 테입은 이집트인을 구출하기 위해 헬기가 파견되었음을 보여주며 선박의 정체에 대해서 혼란해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5 16
크리스톨은 "이 테입은 헬리콥터 조종사가 국적기를 15:12에 관측했음을 입증하며 이스라엘 공군이 전에 보고한 것과 일치한다고 추가했다.
최근까지도 미공개 정보의 공개요청이 있으며, 리버티호 사건이 고의적으로 계획되었는지 우발적인 경우였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 114 [본문으로]
- 115 [본문으로]
- 116 [본문으로]
- 117 [본문으로]
- 1987년 5월 17일, 이라크의 엑소세 미사일에 USS 스타크가 공격받은 경우가 최대의 피해 [본문으로]
- 2 [본문으로]
- 2 [본문으로]
- 3 [본문으로]
- 2 [본문으로]
- 4 [본문으로]
- 5 [본문으로]
- 6 [본문으로]
- 6 [본문으로]
- Frequently cited by those making the case for mistaken identity is Yiftah Spector, the first Israeli pilot to attack the Liberty. In an interview with the Jerusalem Post in 2003, Spector states that, "I circled it twice and it did not fire on me. My assumption was that it was likely to open fire at me and nevertheless I slowed down [emphasis added] and I looked and there was positively no flag [emphasis added]." [본문으로]
- 관제탑과 헬기 815간의 12:34 대화 "이 배는 이집트 선박으로 확인되었다" [본문으로]
- 관제탑과 헬기 815간의 13:10 대화 "최우선적으로 선박 국적을 확인하고 즉각 보고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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