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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3차 중동전쟁, 4. 전쟁의 전개

포커스 작전(Operation Focus)



시나이 반도에서 격추된 이집트 공군기를 이스라엘 공군장교가 조사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의 최중요 작전목표는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공격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소련제 신예기 450기로 구성되어 아랍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현대화된 공군으로 초기에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각주:1] [각주:2] [각주:3] [각주:4]

이스라엘 측은 군사 및 민간 시설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30기의 Tu-16 "배저" 중폭격기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판단했다. [각주:5] 이스라엘 시간으로 6월 5일 7시 45분, (이집트 시간 6:45), 이스라엘 전역에는 시민군 방어 경보가 울려퍼졌고 그와 함게 이스라엘 공군은 포커스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가능한 200여기의 제트기 중 12기를 제외한 [각주:6] 모든 이스라엘 공군기가 출격하여 이집트의 비행장을 폭격했다. [각주:7]

이집트 방어 시설은 대단히 열악한 수준으로 공군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벙커시설이 배치된 비행장이 없었다. IAF는 이집트의 레이더 방공망과 SA2지대공 미사일 기지를 피하기 위해 지중해를 거쳐서 선회해서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공격했다. 게다가 이집트 군은 아메르 원수와 시키 마흐무드 중장이 탑승한 비행기가 알 마자에서 수에즈의 비르 타마다에 주둔군 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중에 격추될 가능성을 우려해서 전체 항공 방어체계를 차단하는 바람에 더욱 방어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IAF 조종사들은 이집트 레이더의 관측범위 및 SA-2 지대공 미사일 발사대의 격추 가능 최저 범위 밑으로 저공 비행을 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있을 수는 없었다. [각주:8] 이스라엘은 주기되어 있는 항공기를 폭격하거나 기총소사로 파괴학, 테르밋 관통폭탄을 활주로에 투하하여 사용불능상태로 만들어서 남은 비행기도 이륙이 불가능하게 하여 다시 후속 이스라엘 공격제파에 표적이 되도록 복합적인 공격전략을 채택했다. 공격은 예상보다 훨신 큰 성공을 거두어 기습을 거둔데 더하여 손해를 보지 않은채로 거의 모든 이집트 공군을 파괴했다. 니집트는 300기 이상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100명 이상의 조종사가 사망했고 [각주:9] 30기의 Tu-16 폭격기 전체와 40기의 Il-28폭격기 40기중 27기, Su-7 전폭기 12기, MiG-21 90기, MiG-19 20기, Mig-17 25기를 비롯하여 약 32기의 수송기와 헬리콥터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의 손실은 19기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기계 고장이나 사고 등으로 입은 작전 손실에 불과했다.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남은 전쟁 내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전쟁 발발전, 이스라엘 조종사들과 지상요원들은 출격에서 재출격까지 정비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강도높은 훈련을 받음으로써 하루에 비행기 1대를 4차례 출격시킬 수 있었다.(반면에 아랍 공군의 경우에는 하루에 1~2회 정도 출격했다.) 이는 IAF가 전쟁 첫날 이집트의 비행장에 수차례의 제파공세를 가하고 이집트 공군을 압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 이때문에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 공군이 외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확신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랍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의 지원을 받았고,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원받은 항공기들도 전쟁 첫날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각주:10]

주요 이집트 공항에 대한 첫 공격과 이어지는 폭격이 성공함에 따라 그날 오후의 공격은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공군이 목표가 되었다. 후속제파는 이집트의 보조 비행장을 비롯하여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에 쏟아졌으며 대부분의 공군이 괴멸되었다. 첫날 저녁이 되자 요르단 공군은 20대의 헌터 전투기와 6기의 수송기 및 2기의 헬리콥터가 파괴되었으며 시리아 공군은 MiG-21 32기, MiG-15 23기, MiG-17 2기, 헌터 F6 5기 및 Il-28 3기가 파괴되었다. 이라크의 Tu-16폭격기가 홀로 그날 늦게 텔아비브를 공격하다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다. 그에 더해 레바논이 보유한 12기의 헌터 전투기중 1대가 이스라엘 공역에 진입했다가 격추되었다.





가자 지구와 시나이 반도



이집투 군은 4개 기갑사단과 2개 보병 사단, 1개 기계화 보병 사단의 총 7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전역에 병력 10만에 900~950대의 탱크, 1.100대의 장갑차와 1,000문의 야포를 배치했다. [각주:11] 이들은 소련식 교리에 의해 보병이 방어태세를 갖춘 상황에서 전략적 종심에서 기갑부대가 기동방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국경선에 6개 기갑 여단과 1개 보병 여단, 1개 기계화 보병 여단, 3개 공수여단과 700대의 탱크를 포함한 약 7만여명의 병력을 집중시켜 3개 기갑사단(Ugda)으로 구성되었다. 이스라엘의 작전은 이집트 군을 기습하는 것으로 타이밍(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공군의 활주로를 파괴하는 시간과 정확히 맞추어서 공격이 개시되었다.), 장소(IDF가 중부와 남부 루트로 전진했던 1956년 전쟁과 같은 전개가 되리라는 이집트 군의 예측과 달리 이스라엘 군은 북부와 중부 루트로 진격했다.), 방법(탱크만의 전진이 아니라 부대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측면을 공격했다.)

맹장으로 유명한 탈(Israel Tal) 소장 지휘하의 북부사단은 3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가자 지구와 엘 아리쉬를 향해 큰 저항없이 저속으로 전진하였다. 반면, 아브라함 요페(Avraham Yoffe) 소장이 지휘하는 중부 사단과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 사단은 아부-아게이라-퀴시마 지역에서 대전차 포로 무장한 이집트 제2보병사단과 1개 대전차포 대대와 90대의 T-34/85와 22대의 SU-100 대전차포로 구성된 1개 전차 연대, 약 16,000 병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각주:12] 여기에 맞서는 이스라엘 군은 병력 14,000에 AMX-13, 센츄리온, 수퍼서먼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샤론 장군은 미리 계획된 대로, 아부-아게이라를 남방에서 돌파하기 위해 2개 연대를 각기 움-카테프 북부로 우회하고 엘 아리쉬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하여 아부 아게이라를 포위했다. 동시에 공수부대는 방어망 배후에 헬리콥터로 투입되어 기갑군 활동에 위협이 되는 포대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기갑군, 공수부대, 보평, 포병, 공병의 연계작전으로 이집트 군의 전방, 후방들이 동시에 혼란에 빠졌으며 통신이 차단되었다. 지뢰지대와 모래언덕에서의 돌파전투는 아부 아게일라가 점령되기까지 3일 반동안 계속되었다.

이집트 군은 대부분이 잔존되어 이스라엘 군이 수에즈 운하에 업근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아부 아게이라의 함락으로 당황한 이집트 국방장관 하킴 아메르 원수가 시나이의 모든 부대에게 후퇴를 명령함으로써 이집트 군은 실질적으로 패하게 되었다.

이집트이 후퇴하자 이스라엘 최고사령부는 이집트 군을 추격하기 보다 이들을 지나쳐서 서 시나이의 산악 지대에서 격파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6월 6일과 7일에 이스라엘의 3개 사단(샤론 사단과 탈 사단은 각기 1개 기갑여단씩이 증원되었다.)은 서쪽으로 돌진하여 통로지대에 도착했다. 샤론사단은 일단 남쪽으로 전진한 다음 서쪽의 미틀라 통로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요페 사단의 일부와 합류했고 요페사단의 다른 병력은 기디 통로를 차단했다. 탈 장군의 부대는 수에즈 운하를 따라 여러 지점에서 정지했다.

이스라엘 군의 차단작전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기디 통로는 이집트 군이 지나친 뒤에야 점령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이집트 군은 운하까지 안전하게 도달하는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승리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작전개시 불과 4일만에 이스라엘은 아랍의 가장 중무장되고 대규모인 이집트 군을 시나이 반도 곳곳에서 격파했고 수백대의 유기되거나 반파된 이집트 차량과 군사장비들을 노획했다.

6월 8일, 서부 해안의 라스 수다(Ras-Sudar)에 보병이 도달하면서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최남단의 샬름엘 세이크는 하루 전에 이스라엘 해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런 전술적인 대 성공의 원인은 공군의 완벽한 제공권 장악과 충분한 훈련으로 숙달된 창의적인 전술계획, 이집트 군의 협조 부족 등을 지적할 수 있었으며 다른 전선에서도 비슷한 요인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요르단 서안



전쟁 초기, 요르단은 참전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요르단의 참전에 대해서 나세르가 전쟁 초에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로 승리를 보장하고 있었던 데다가 요르단 레이다 망에 잡힌 이스라엘 공군의 제1제파 귀환을 이집트군이 폭격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각주:13] 요르단 서안에 주둔한 1개 여단이 헤브론 지역으로 파견되어 이집트 군과 호응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후세인은 전쟁을 결정했다.

전쟁 전 요르단군은 11개 여단에 병력 55,000으로 구성되어, 서방제 전차 300여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중에 9개여단(병력 45,000, 전차 270대, 야포 200문)는 요르단 서안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요르단 계곡에 배치되니 최정예 제40기갑여단도 있었다. 아랍군단은 장기복무병을 근간으로 두는 전문적이고 비교적 장비와 훈련도가 뛰어난 군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은 요르단 군의 장교단이 상당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으나, 이스라엘 군에 비교한다면 언제나 "한발 정도 부족하다"라고 보았다. 게다가 요르단 군은 24기의 호커 헌터 전투기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미라쥬III를 장비하고 있는 이스라엘 공군에 비해 전반적으로 빈약했다. [각주:14]

서안의 요르단군에 대응하여 이스라엘 군은 이스라엘 군은 8개여단에 4만 병력과 전차 200대를 배치했다. [각주:15] 이스라엘 중부 사령부는 5개 여단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 여단과 하렐 기갑여단이 고정배치되었다. 모르드카이 구르 소장의 55 공수여단이 시나이에서 소환되었다. 총참모부 휘하의 1개 기갑여단이 라트룬에 배치되었고 제 10기갑여단은 서안 북부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스라엘 북부 사령부는 서안 북부에 배치되어 있던 엘라드 펠레드 소장 휘하의 1개 사단(3개 여단)을 제즈릴 계곡에 투입했다.

IDF의 전략안은 요르단 전선에서는 방어태세를 유지하면서 이집트 방면 작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5월 5일 아침 요르단이 서 예루살렘, 네타냐, 텔아비브 외곽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각주:16] 왕립 요르단 공군이 이스라엘 비행장을 폭격했다. 퀄퀼리야(Qalqiliya)에 배치된 요르단 군의 M2장거리포가 텔아비브를 향한 포격을 개시하였고 요르단 공군은 이스라엘 비행장을 공격하였으나 전반적으로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비상출격한 이스라엘 공군이 요르단 공군을 괴멸시켰으며 이날 저녁 예루살렘의 보병연대가 예루살렘 남쪽으로, 기계화 부대와 공수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요르단 국경내에 있었으나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절반씩을 분할 점령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격이나 폭격에 의한 피해를 거의 없었고 이스라엘은 요르단 군이 전쟁에 돌입하지 않는다면 공격에 대응하지 않겠다고 메세지를 전달했지만 후세인은 이미 너무 늦었다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답했다. [각주:17]

6월 5일 저녁 대응책 마련을 위해 이스라엘 내각이 소집되었다. 이갈 알론과 메나헴 베긴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할 기회라고 주장했지만 에쉬콜은 모세 다얀과 이츠하크 라빈과 토의하기 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고 했다. [각주:18]

우지 나르키스는 라트룬 점령을 포함한 군사작전에 관한 수많은 제의를 했지만 내각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스라엘 사령부는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군이 예루살렘 지역에서 전진하여 UN군 사령부가 지휘소로 사용하던 "정부 건물"을 점령하여, 예루살렘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된 시점에샤 작전을 개시했다. [각주:19]

6월 6일, 이스라엘 군은 서안의 요르단군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날 오후의 이스라엘 공군 폭격은 왕립 요르단 공군을 격파했고 저녁에 예루살렘 보병여단이 예루살렘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하렐 기계화 보병여단과 구르의 공수여단이 북부에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동부로 향하는 접근로를 감제하고 있는 이 지역은 참호로 방어되는 언덕지형으로 150명의 요르단군이 방어하는 반요새화된 진지에 2:30분부터 야간공격을 개시한 이스라엘 군은 공수부대가 증파되고서야 간신히 승리를 거두어 예루살렘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예비 공수여단이 탄약고 언덕에서의 혈전을 통해 예루살렘 포위망을 완성했다. 성지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한 다얀은 부대가 예루살렘 시가 그 자체에는 돌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각주:20]

6월 7일에 교전은 더욱 심해졌다. 보병여단이 라트룬 요새를 공격하여 새벽녘에 점령했고 베이트 호론을 통과해 서안의 관문인 라말라로 전진했다. 하렐 여단은 스코푸스 산과 헤브루 대학 교정으로 연결되는 예루살렘 북서쪽의 고지대로 압박을 가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라말라에 여단이 도착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요르단군 제60여단을 공격하여 증원군을 격파했다.

북쪽에서는 펠레드 사단의 1개 대대가 요르단 계곡의 방어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1개 여단은 요르단 서안의 서부지역을 점령하고 다른 부대는 제닌을 점령하였으며 프랑스제 AMX-13 경전차를 장비한 다른 여단은 M48패튼으로 무장한 요르단 군과 요르단서안 동부에서 교전을 벌였다.

다얀은 예루살렘에 병력을 돌입시키지 못하도록 명령했지만 UN의 정전선언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을 바꾸어 내각의 결정없이 예루살렘 점령을 결정했다. [각주:21] 모르드카이 구르의 제35공수여단은 장비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요르단군 제1왕실 근위사단과 시가전을 벌인끝에 사자의 문을 통해 예루살렘 구시가지로 진입했고 서쪽 벽과 성전산을 점령했다. 예루살렘 여단이 증원되어 아미티 대령의 지휘하에 이 혼성부대는 남부로 전진, 유데아, 구시 엣지온, 헤브론을 점령했다. 하렐 연대는 동부로 하렐여단은 동부로 진격하여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다. 서안에서 펠레드 사단의 1개 여단는 나불루스를 점령한 후 라말라에서 전진한 중부 사령부의 1개 기갑여단과 합류하여 반격부대를 형성 장비면에서 우위에 있는 비슷한 규모의 요르단 군과 교전했고 제공권을 장악한 IAF가 요르단군의 증파를 저지한 덕에 승리를 거두었다. 펠레드 사단의 다른 2개 여단은 중부 사령부의 제10여단과 함께 요르단 강을 건너 동안으로 진격했지만 암만까지 50km를 남겨놓은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요르단의 점령지를 추가적으로 점령하려는 시도는 없었고, 구시가지가 점령되자 다얀은 부대에게 참호를 구축해서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기갑여단 선도부대 사령관이 서안에 도달하고 여리고를 관측할 수 있다고 보고하자 다얀은 철수를 지시했다. 다얀이 휘하부대에 서안을 점령하도록 명령한 것은 후세인이 요르단군에게 강을 건너 후퇴하라고 명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각주:22]
나르키스에 의하면 "먼저,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 서안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 반대하고 있었다. 또, IDF점령지역에 대한 도발이 없었으며 세번째로 예루살렘의 안전에 대한 위험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고삐가 처음으로 느슨해졌다. 믿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6월 5일에 진실로 일어난 일이다. 결과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각주:23]

 

골란고원

 

이집트가 이스라엘 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이집트 포병이 곧 텔아비브를 포격할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한데 영향을 받은 시리아는 전쟁에 개입했다. 하지만 시리아군 지도부는 북부 이스라엘에 포격을 개시하기 보다는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의 작전을 완수한 이스라엘 공군은 이번엔 시리아 공군을 기습하여 작전 첫날에만 시리아 공군력의 2/3을 격파했으며 그제서야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 군사력을 괴멸시키고 있다는 방송이 거짓임을 알았다. [각주:24]

6월 5일 저녁 시리아 공군은 잔존 비행기를 활동반경 밖의 기지로 철수시켰으며 이후의 교전에서는 활약하지 못했다. 소규모 시리아 군이 2년전 긴장을 고조시켰던 텔단 수력발전소를 점령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몇몇 시리아 탱크가 요르단 강에 침몰된 것이 보고되었지만 결국 시리아군 사령부는 지상공격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대신 훌라 계곡의 이스라엘 민간지역에 맹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6월 7일과 8일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지도부는 골란 고원을 점령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군부는 골란고원의 요새화된 진지에서 방어하는 적을 공격할 경우 큰 손실을 입을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골란고원의 서쪽은 암석지형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500m이상 급경사로 솟아오른 천혜의 요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반대쪽으로는 낮은 능선을 따라 요르단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세 다얀은 그런 작전을 실시할 경우 적어도 3만명 정도의 희생이 예상된다고 보았으나, 레비 이쉬콜은 좀더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북부 지역 사령관 다비드 엘라자르도 열정적으로 작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한편, 남부전선과 중부전선의 상황이 훨씬 호전되자 다얀도, 작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결국, 골란고원 공격작전을 승인했다.

시리아 군은 약 75,000여명으로 장갑차량과 포병에 의해 지원되는 9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은 2개 여단(알버트 맨들러가 지휘하는 1개 기갑여단과 골라니 여단)이 북부에 배치되어 있고, 다른 2개여단(1개 보병여단과 제닌에서 증파된 펠레드 사단중 1개 여단)이 중부에 배치되었다. 골란고원의 독특한 지형(동에서 서쪽으로 산악지형의 능선을 따라 기동로가 수km에 걸쳐 평행하게 구성되어 있음)과 기동로의 부족으로 각각의 부대는 제한된 움직임이 가능했고 측면에서 기습을 받을 경우에는 상호간에 지원이 불가능하고 시리아군은 고원의 북쪽과 남쪽 기동로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진입구 지역에서만 선택이 가능했다. 그나마 모사드가 시리아가 1965년에 처형한 엘리 코헨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의 방어진지 등의 위치정보를 입수해두었으며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에 의존해야 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4일전부터 시리아의 포대를 폭격하으며 전력을 다해 시리아군 방어진지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잘 방어된 포대는 대부분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골란고원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9개 여단 중 6개) 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했다. 9일 저녁 4개 이스라엘은 4개 여단을 투입하고 증원부대로 대체했다.

다음날인 6월 10일, 중부와 북부 집단이 고원에서 양익 포위를 형성했지만 시리아군은 대부분 후퇴한 뒤였다. 엘라드 펠레드 사단에 합류한 몇몇 부대가 남쪽에서 골란고원에 올랐지만 대부분의 방어진지는 비어 있었다. 그날 이스라엘 군은 전진을 중지하고 서쪽의 화산언덕 지형에서 기동하기 위한 공간을 형성했다. 동부지형은 완만한 내리막으로, 정지한 지점은 훗날 퍼플라인이라고 불리게 될 정지선이었다.

타임지는 "UN의 압력으로 정전이 이루어졌다. 다마스커스 라디오는 엘 퀴니트라가 실제로 점령되기 3시간 전에 저령되었다고 방송함으로써 오히려 시리아 군의 사기를 꺽어내렸다. 사령부가 항복했다는 성급한 발표로 골란고원에 남아있는 시리아군은 사기를 잃어버렸다."고 보도했다. [각주:25]

  1. “Gideon Rafael [Israeli Ambassador to the UN] received a message from the Israeli foreign office: ‘inform immediately the President of the Sec. Co. that Israel is now engaged in repelling Egyptian land and air forces.” At 3:10 am, Rafael woke ambassador Hans Tabor, the Danish President of the Security Council for June, with the news that Egyptian forces has ‘moved against Israel’” (Sydney Bailey, Four Arab-Israeli Wars and the Peace Process. London: The MacMillan Press, 1990. p. 225) [본문으로]
  2. [At Security Council meeting of June 5], both Israel and Egypt claimed to be repelling an invasion by the other…” (Bailey p. 225) [본문으로]
  3. “Egyptian sources claimed that Israel had initiated hostilities […] but Israeli officials ? Eban and Evron ? swore that Egypt had fired first” (Michael Oren, Six Days of Wa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196). [본문으로]
  4. “Gideon Rafael phoned Danish ambassador Hans Tabor, Security Council president for the month of June, and informed him that Israel was responding to a ‘cowardly and treacherous’ attack from Egypt…” (Oren, p. 198). [본문으로]
  5. Pollack, 2004, p. 58. [본문으로]
  6. Oren, 2002, p. 172  [본문으로]
  7. Bowen, 2003, p. 99 (author interview with Moredechai Hod, 7 May 2002). [본문으로]
  8. Bowen, 2003, pp. 114-115 (author interview with General Salahadeen Hadidi who presided over the first court martial of the heads of the air force and the air defence system after the war). [본문으로]
  9. Pollack, 2005, p. 474 [본문으로]
  10. Pakistan Air Force - Pakistan Navy - Pakistan Army [본문으로]
  11. Pollack, 2004, p. 59. [본문으로]
  12. Six Days of War, Michael B. Oren,p.181,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본문으로]
  13. Oren, 2002, p. 184-185. [본문으로]
  14. Pollack, "Arabs at War", p. 293-294 [본문으로]
  15. Pollack, "Arabs at War", p. 294 [본문으로]
  16.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p. 243-244. [본문으로]
  17.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p. 243-244. [본문으로]
  18.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 244. [본문으로]
  19.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 245. [본문으로]
  20.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 245. [본문으로]
  21. Shlaim, 2000, p. 244. [본문으로]
  22.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 245. [본문으로]
  23. Shlaim, Avi.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2001, ISBN 0393048160, p. 246. [본문으로]
  24. 112 [본문으로]
  25. 11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