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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레바논 내전 3. 시리아와 이스라엘

레바논 정부가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남부 지역에 파타랜드라고 불리는 PLO 지배 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테러활동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PLO는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이나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해서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남레바논 및 베이루트를 공격했고 이것이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기독교 마론파 소속의 팔랑헤당이 교회에서 집회를 거행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PLO지지자들의 버스가 교회에 발포, 팔랑헤당도 이에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하여 내전이 재개되었다. 또 같은 시기 남부의 시돈에서도 수니파의 어민이 마론파 수산회사가 설정한 어업권에서 조업을 하여 소란이 발생했다. 레바논 군은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무장한 어민에게 헬리콥터가 격추되자 이슬람 좌파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내전 자체는 저격, 로켓탄 공격등에 의한 산발적인 것이었으며 마론파, 이슬람, PLO 등의 민병조직은 교전 자체보다 각기 검문소를 설치하여 대립하는 파벌의 민간인들을 유괴, 고문, 처형하는 잔학행위에 열심이었다. 특히 주말은 블랙 먼데이라고 불리어 잔학행위가 빈발했고 자동차 폭탄이 베이루트에 등장하여 요인을 포함한 다수의 시민이 사망했으며 이로써 치안이 붕괴된 베이루트는 전투와 범죄로 황폐해졌다. 베이루트는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서베이루트와 마론파가 거주하는 동베이루트로 분열되었고 경계선에는 그린라인이라는 분리대가 설치되었다.


베이루트 그린라인


내전의 혼란은 시리아 정규군이 사태 수습 명분으로 국경을 넘어 개입하자 더욱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20년간 16명의 대통령이 취임할 정도로 정치가 불안했던 시리아에서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사드는 잔혹함과 인내심이라는 무기로 향후 30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시리아는 대시리아 추구하며 연고가 깊은 레바논을 합병하기 위해 레바논에서 독점적인 세력이 등장하지 않도록 세력균형을 조절해나갔다. 1976년 5월 레바논 정부의 요청에 의해 시리아 군은 레바논에 들어왔으며 범아랍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내전에서 기독교 마론파 공동체의 팔랑주 당을 지원하고 급진적인 PLO및 이슬람 두르즈파를 제압했다. 이 때문에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의 개입은 내전에 의한 혼란을 일시 억제시켰고 이른바 ‘시리아의 평화’가 레바논에 도래했지만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마론파와 시리아의 연합은 애초부터 불안정한 것이었기에 마론파는 1976년 9월 반시리아, 반팔레스타인을 기치로 삼아 레바논 군단(LF)이라는 민병연합조직체를 결성했으며 시리아 군과 LF는 산발적으로 충돌했고 PLO나 두르즈 파와도 전투를 펼쳤다. 열세에 놓인 LF 는 이스라엘의 지원과 개입을 모색하게 된다.



4차 중동전(욤키푸르 전쟁, 10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수도를 위협할 위치에 있었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여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정치권은 초기의 고전에 책임을 지고 집권 노동당 정부가 물러나는 변화를 겪어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3차 중동전으로 들떠있던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한번이라도 패한다면 이스라엘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각인시켰다는 점이었다. 전쟁의 승리가?이스라엘의 국제적 고립을 해결해주지는 못했고 중동에 쏟아진 오일머니는 국제무대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집권한 우익 리쿠드 당은 레바논을 이스라엘의 영향력에 편입하고 PLO 를 축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존투쟁에서 최종 라운드가 될 것이라는 논리로 노동당을 설득시켰다.


1976년 레바논의 세력권



1976년에 군사개입을 시작할 때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레드라인’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이는 베이루트 이남에 여단 규모를 웃도는 시리아군 주력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며 레바논에 이스라엘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장거리포, 미사일, 로켓탄을 배치하지 않으며 전투기나 폭격기는 일체 레바논 국내에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불문협정이었다. LF는 이 협정에 주목하여 시리아 군을 도발, 마론파의 거점인 동 베이루트에 포격을 가하도록 유도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중대한 협정위반으로 비난했고 특수부대와 공군기를 출동시켜서 리타니 이남의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으나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전 레바논군 장교였던 하다트 소령에게 점령지를 양도했다. 그는 점령지역에 자유레바논군이라는 민병 조직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의 괴뢰부대로 협력했다. 또 1980년에는 레바논 각지에서 시리아 군과 LF가 충돌하여? 베이루트와 베카 고원을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구축한 LF에게 시리아가 공격을 가하면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고 시리아는 보복으로 지대공 미사일을 베카고원에 배치하는 등 협정은 유명무실화 되고 레바논 내전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개입하는 것이 점차 가시화되었다.

비록 PLO 가 빈번하게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지만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손해는 1년에 전사자 1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은 고려사항이 못되었다. 이스라엘은 중동 최강을 자랑하는 자국의 군사력이 이집트의 압박에서 해방된 것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이 되었다. 1981년 7월 10일, 레바논 남부에서 교전이 벌어지자?이스라엘은 공습을 개시했고 5일 뒤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북부에 포격을 개시했다. 7월 17일,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 시내의 PLO본부에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여 약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800명이 부상당했다. 남 레바논의 PLO 거점들도 이스라엘 군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의 로켓공격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PLO는 비축된 탄약을 집적하기 보다 널리 분산시키는 전략으로 이스라엘 군의 맹공을 버텨내었고 계속되는 교전으로 레바논 접경지대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시민 수천명이 남부로 대피했다.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군은 일단 철수했지만 상황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1982년 1월 30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알 헤이그의 보고서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의 긴장상태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묘사했다. 이스라엘 군의 지원을 받는 남레바논 군은 국제기구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으며 1982년 4월 21일 남레바논군의 포대를 방문한 이스라엘 군 장교가 지뢰를 밟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공군은 팔레스타인이 통제하고 있는 다무르의 항구마을을 공격하여 2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5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은 레바논을 재차 공격했고 이날 UNIFIL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북부에 로켓공격을 가하는 것을 관측했지만 부정확한 사격때문에 이스라엘 거주지에 명중되지는 않았다.

UNTSO 사령관인 에르시킨 소장(가나)은 1981년 8월 부터 1982년 5월까지 2,096회에 걸쳐서 레바논 영공 침범이 발생했으며 652회에 걸쳐 레바논의 영해를 침범했다고 보고했고 PLO는 240회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이스라엘은 이를 정전협정 위반으로 규정했다.?


1981년 7월 16일 알 야툰의 UN군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