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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레바논 내전 6.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은 최신예 메르카바가 시리아군 T-72를 압도한데 힘입어 다시금 기갑부대간의 교전에서 승리를 장식했다. 이스라엘의 자국산 최신예 메르카바가 환상의 무적전차로 알려져 있던 소련의 T-72를 승무원 손실없이 제압해버리자?시리아 군은 더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메르카바는 히브리어로 전차(Chariot)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자국설계, 자국생산 전차인 메르카바는 두터운 전면장갑을 바탕으로 높은 생존성을 자랑하며 굴곡이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자국지형에 맞게 설계되었다. T-72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이미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군은 결국 11월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아랍세계에서 고립된채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벌이게 될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군은 불과 6일만에 레바논 남부의 4,500 ㎦를 점령하고 시리아와 PLO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또 한번의 6일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따라 이스라엘의 침공에는 전세계의 비난이 몰렸고 이미 시돈에서 격렬한 시가전으로 많은 민간이니 희생자를 낸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도 똑같은 속전속결을 시도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포위한채 직접적인 시가전에 돌입하기 보다는?확성기를 이용해서 항복을 권고했고?PLO는 이스라엘군의 정밀폭격에 맞서 지붕에 노약자로 만든 인간사슬을 올려놓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아라파트였지만 레바논 전체의 반응은 그와 같이하고 있지 않았다. 레바논 최대의 파벌이 된 시아파는 골치거리였던 PLO를 축출하기 위해?이스라엘을 방관했고 마론파 기독교는 자신들이 이스라엘군을 불러들인만큼 기뻐했고, 이스라엘군의 지원에 힘입어 적대시하던 이슬람 세력의 거점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PLO는 12살 어린아이에게 대전차로켓포(RPG)를 들려주면서까지 저항하고 있었지만 아랍권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할 뿐 어느나라도 나서지 않았다.


RPG공격을 받아 불타는 메르카바. PLO는 어린아이들에게 휴대가 간편한 RPG를 들려주고 이스라엘군을 공격하게 해서 RPG Kids로 유명해졌다.

시리아와 정전을 맺은 4일후,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스라엘 군은 보병과 포병을 투입해서 시가전을 벌였다.?PLO는 항복을 거부한채 서베이루트에서 저항했지만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농성은 한계가 있었다. 레바논의 이슬람 계파까지 나서서 PLO에게 명예로운 후퇴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베이루트는 스탈린그라드 [각주:1] 가 될 수 없었다.

1982년 7월 3일 아라파트는 PLO 지도부를 이끌고 레바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의 레바논 특사인 필립 하비브에게 전달한다. 레바논에 남겨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아라파트가 최후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비난했고 6일전쟁으로 나세르 주의가 빛을 잃었듯 아라파트도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8월 둘째주부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국제평화유지군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루트에서 철수했다. 소총과 수류탄뿐인 팔레스타인 해방군이 최신예 전차와 제트기로 무장한 시리아가 6일도 버티지 못했던 이스라엘 군을 상대로 2달을 버틴 것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도부의 후퇴로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레바논에서 오일머니와 70년대에 세워졌던 아랍 민족주의의 낭만시대는 무너져 내렸다. 레바논의 역사학자 케말 살리비는 베이루트 항에서 아라파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왈리드 줌블라트(드루즈파 지도자)는 그다지 친분이 없던 아라파트가 배에 오를 때까지 수행했습니다. 아라파트를 태운 배가 출항하려고 하자 그는 권총을 꺼내 예포 형식으로 허공을 향해 쏘았습니다. 그건 아라파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던 모든 것을 향한 예우였습니다. 서베이루트는 아랍민중의 양심이 담긴 저수지였고 PLO가 떠나기를 바랐지만 아라파트의 목까지 이스라엘에 주고싶지는 않았습니다. 서베이루트 사람들은 아랍의 존엄성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왈리드는 아라파트를 배웅하면서 ‘아랍놈들아! 우리가 마지막 남은 진정한 아랍인이다. 진정한 아랍인은 서베이루트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주:2]



베이루트를 떠나는 PLO 승리를 다짐하는 V사인을 하고 있다.

아라파트는 레바논 내의 난민들로 구성된 작은 팔레스타인을 잃고 튀니지로 거점을 옮겼다. 레바논에서 순교자가 되기보다 상징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는 비난이 아라파트에게 몰렸고?직속 무장조직인 PATA가 시리아의 원조를 받으며?PLO에 반기를 든 것은 근거지를 잃은 것만큼이나 큰 타격이되었다. 하지만 1982년 10월, 아라파트가 후세인 국왕을 방문했을때 팔레스타인은 아라파트에게 환호로 화답했다. 아라파트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1. 오늘날의 볼고그라드, 2차대전에서 소련은 독일군에게 포위된 이 도시를 역포위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본문으로]
  2.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p.13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