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오슬로 합의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설립된 이후부터 1993년 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폭력사건의 총칭. 투석 투쟁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인티파타라고 하면 제1차 인티파타를 의미하며 1차 인티파타라고 부르게 된 것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알 아크사 인티파타를 제2차 인티파타로 부르게 된 다음부터이다.
경위
발단
1987년 10월 1일,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의 가자출신 구성원 7명을 매복 사살하고 며칠 뒤에는 이스라엘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을 배후에서 총격하고 이에 대해 12월 4일에는 슈로모 사칼이라는 이스라엘 세일즈맨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스라엘 국방군의 트럭이 자동차에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고로 티베리아의 팔레스타인 사람 4명이 사망했다. 난민 캠프에서 열린 희생자 장례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수백명이 타이어를 태우면서 경비하고 있던 이스라엘 국방군을 공격했다. 폭동은 순식간에 다른 난민 캠프에 퍼져서 예루살렘까지 이른다. 12월 22일 UN 안보리는 인티파타가 일어난 처음 몇주만에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이유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제네바 조약 위반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PLO는 이 움직임을 지지하면서 해외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지원을 재촉하는 외교를 전개해 나갔다.
격화
인티파타 초기에 팔레스타인이 사용한 폭력수단의 상당수는 원시적인 것으로 다수의 10대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이스라엘 군의 순찰차에 돌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이윽고 전술이 격렬해져서 화염병을 던지게 되면서 격화일로를 달려 100회 이상의 수류탄 투척과 총이나 폭탄 공격이 500회 이상 실시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이스라엘 시민과 병사가 사망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국방군은 최신 병기와 방위수단에 더해 최신의 고문기술까지 동원하고 있다. 반면에 약 1,000명 정도의 이스라엘 정보 제공자가 아랍 민병대 손에 살해되었고 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권단체는 살해된 사람의 상당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협력자가 아니라 보복살해의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1988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징수하는 점령세에 대해 납세를 거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개시했다. 이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수감을 비롯해서, 점보, 공장, 주택 등의 기재 및 가구, 상품을 압류하고 매각한다는 높은 강도의 발척을 부과해서 보이콧을 억눌렀다. 같은 해 4월 19일 PLO 지도자인 아브 지하드가 튀니스에서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비폭력 저항은 다시 폭동으로 번져 16명의 팔레스타인 인이 사망했다.
1989년 10월에는 유대인 과격파가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를 습격하여 이를 발단으로 총격전이 벌어져 이스라엘 치안경찰이 팔레스타인 사람 22명을 사살한 사건이 일어나 UN총회는 대 이스라엘 비난 결의를 채택한다.
평화 합의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인티파타의 광경이 해외 미디어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보도되어 그 대부분이 “압제자에게 돌을 던지는 주민들과 이것을 최신병기로 아녀자까지 포함해서 소탕하는 이스라엘 군”이라는 구도가 부각되어 국제여론은 이스라엘을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정부나 군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PLO도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시에 이라크를 지지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비난했다.)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바이아서 지원이 중단되어 곤경에 처했고 걸프 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중동의 정치가 안정되고 미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직접 개입해서 이스라엘과 PLO 쌍방이 평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1991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평화회담이 개최되었다. PLO는 이스라엘의 거부로 참가할 수 없었지만 요르단-팔레스타인 합동 대표단 형태로 참가했다. 당초 이스라엘은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지만 때를 같이해서 소련이 붕괴하고 대량의 동유럽 유대인이 유입되면서 지지층을 확대한 좌파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 정권이 수립되면서 국제사회의 경제 원조를 목적으로 교섭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1993년에는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 - PLO간에 오슬로 합의가 조인되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되었다. 이 공롤 라빈 수상, 시몬 페레스 외상,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결과
오슬로 합의까지, 팔레스타인은 1,162명, 이스라엘은 16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인티파타의 최초 13주 동안 사망자는 팔레스타인 332명에 이스라엘 12명이었다. 초기에 팔레스타인의 사망율이 높아진 것은 폭동진압과 대중관리 부분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경험 부족에 기인한 것이 크다. 특히 데모군중을 대치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국방군의 병사들에게 폭동 진압용 장비가 지급되지 않아서 비무장 상태의 데모 참가자를 상대로 실탄 사격을 실시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임무에 종사했던 이스라엘 군 장병들은 심각한 사기저하를 맞이해서 결과적으로는 300명 이상의 장병이 지나친 폭력행위나 발포로 기소되었다. 인티파타가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측의 희생자를 경감하기 위해 다양한 폭동 진압용 장비들을 도입했지만 사망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 달했다.초기의 사망율이 높았던 것은 이 외에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이 팔레스타인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서 투석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국방부 훈령등을 발령한 책임도 있었다. 이 때문에 라빈의 후계자인 모시 아렌스는 진압에 보다 유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이듬해 부터 사망율이 낮아진 것은 여기에도 기인한 것이다.
인티파타는 통상적인 의미로의 군사적 행동이나 게릴라 활동은 아니었다. PLO의 영향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인티파타를 이용해서 이스라엘 정부에서 직접적인 성과를 거둘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인티파타는 민중운동이었고 PLO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결합되어 팔레스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 이스라엘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랍제국의 권위와 원조가 아니라 자결에 적합한 독립적
민족으로 세계적인 지반을 굳히는데 성공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이 주장하던 팔레스타인을 남 시리아인이나 요르단인에 포함시키고 독립적인 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 이스라엘의 격렬한 보복행동은 역설적으로 국제사회에 팔레스타인의 상태를 “자기땅에 갇힌 죄수”로
인식시켰다. 특히 16세 이하의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희생자가 되어(대부분 이스라엘 군에게 돌을 던지다가 총격을 당했다.)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특히 미국의 미디어들이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특징적이라서 이스라엘 국내나 미국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으로 논의되던 처음 단계로 되돌아가 아랍국가들이나 미국 및 유럽 사회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은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주요 경제원조국이 되었고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와 지지도 이전보다 제약이
심해졌다.
- 인티파타는 이스라엘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 은행은 수출에서의 손해를 약 6억5천만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이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의 보이콧과 현지의 영세산업과 주요 관광업을 포함한 서비스 부분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
- 폭동은 직접적으로는 오슬로
합의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PLO가 망명지인 튀니지에서 복귀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PLO는 교섭으로 목적하던 바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제1차 인티파타가 없었다면 팔레스타인이 국가로서 수립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슬로 합의 이후에 장래에 몇단계를 거쳐서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실현하려고 하는 시도가 정상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측 진영의 혼잡과 팔레스타인인 전체에 대한 강경정책등을 통해 인티파타의 진압에는 성공했다. 최신장비를 갖고 잘 훈련된 이스라엘 국방군과 비교하면 팔레스타인 측은 열악한 조건이고 비무장이었지만 인티파타는 이스라엘 점령지에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문제들을 표면화 시켰고 전술, 작전행동에서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이 때문에 국제 여론과 이스라엘 언론등이 쌍방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국론도 분열되게 되었다.
요인
제1차 인티파타의 요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중동전이나 팔레스타인 문제 전반이 그렇듯이 다양한 논의가 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 1967년의 제3차 중동전 이후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이 인도적 권리나 민족주의적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불만이 높아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PLO는 1960년대 이후 이스라엘에서 눈에 띌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82년에는 레바논 내전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나 튀니지로 이전했다. 이집트는 제4차 중동전 이후에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도 다른 아랍제국들은 적대관계는 유지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전체적인 긴장의 강도가 낮아지면서 팔레스타인은 아랍제국에서도 고립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 남레바논의 이스라엘 군 주둔과 가자 서안지구에서의 이스라엘 군정등도 현상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켰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인티파타가 이스라엘의 가혹한 억압, 예를 들어 즉결심판, 대규모 구금과 구류, 주택제한, 무차별적인 고문, 추방등에 대한 이의제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티파타에는 이러한 정치 민족주의적 감정에 더해서 이집트의 가자지구에 철수 및 요르단의 서안 주권 포기 등도 배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거주지구는 빈곤지역이 되어 높은 출생율에도 불구하고 이스랄엘 지배하의 농지나 주택지에서의 신규 토지 배분은 한정적이었기에 인구밀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실업율이 증대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서 일을해 아이들을 교육시켰지만 졸업후에 취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또, 동맹국인 아랍제국에서 버림받았다는 감정도 중요하다. PLO는 이스라엘을 쫓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공약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고 1974년 이후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려 했지만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완전한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2급 시민 취급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요인들과 봉기의 규모 및 크기를 고려하면 반란은 한개인이나 조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PLO는 사태를 빠르게 배후에서 장악하고 선동하여 폭동을 지속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서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PLO외에도 이슬람 과격파 하마스, 팔레스타인 성전운동 등의 세력이 여기에 관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일반 팔레스타인이 주축이 된 지역 공동체가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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