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드리드의 이정표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제1협약 : 실패가 예언된 원칙 선언 : 미국과 러시아가 후원한 이스라엘과 PLO 간의 비밀 노르웨이 협약에 의함. 2년의 기한을 두고 자치정부를 구성
1994년 5월 4일 - 가자와 예리고를 우선으로 하는 카이로 합의 :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5년 기한의 전환 작업이 시작됨.
1995년 9월 28일 - 오슬로 제2협약 : 준비협약으로 A, B, C 지역으로 세분화된 지역에서 최종 협약 타결을 위한 준비기간
1996년 1월 -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당선됨
1996년 5월 - 항구적 평화합의를 위한 기념할만한 출발 - 이스라엘 선거로 실질적 협상이 지연됨
1991년 4월 1일 - 이전 기간 완료 예정일
1999년 10월 - 최종 협약 타결 예정일
주요사항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협상지역에 대한 기본틀을 만들고 가자지구와 예리고를 자치정부에 신속히 넘기기 위한 초안을 작성
카이로 협약의 ”가자와 예리고” 조항에 대한 세부사항이 확정되고 조건부 목표 충족에 따른 단계별 시간계획에 의한 자치권 확대 계획이 수립되었다.
예루살렘, 서안/유대 사마리아의 이스라엘 정착촌 및 48년과 67년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같은 근본적이로 논란이 있는 지역에 대한 영구 상황 협상안
핵심문제
자치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이슬람 지하드, 하마스, PFLP등 과격 테러단체의 지속적인 저지활동
이스라엘 사회에 위협이 되는 일련의 자살폭탄 테러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스트 인도 거부
안전 문제와 순찰 노선 및 거점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려
주요 관련 국가들의 자치정부에 대한 기반시설 확립 및 발전을 위한 재정지원 약속이 수립되지 않음
팔레스타인 정부의 반이스라엘 활동 금지 문제에 대한 문서보장 거부
자치 구역의 봉쇄로 경제적인 붕괴와 반 이스라엘 감정 확대
1996년 5월 이스라엘 선거에서 헤브론 재배치가 중단되면서 소요사태로 인명피해 발생함에 의한 정권 변화
특권 남용으로 인한 가자와 예리고 간 자유통행 보장이 충족되지 않음
상황의 전개
요르단과의 평화
1994년 10월 26일,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완전한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이스라엘의 가장 긴 국경선에 평화가 확립되었으며 1978년 이후 이집트와의 합의 이후 이스라엘의 지형학적 고립상태가 해소될 희망이 생겼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국이 유지해온 선린관계와 1973년 욤키프르 전쟁에서 요르단이 중립을 유지함에 따른 양국관 화해 무드의 논리적 결론이기도 함.
양국이 유지하던 냉랭한 평화가 개방된 합의로 나아가게 된 1991년 걸프전에서 요르단 경제가 타격을 입음으로써 경제적인 필요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요르단의 주요 무역상대국이며 강력한 우방국가였던 이라크가 국제사회의 무역 금지 제제를 당하면서 요르단을 경유하는 석유무역이 타격을 당함에 따라 경제가 안정을 읺었다. 요르단은 중동지역의 경제대국인 이스라엘과의 무역을 증대하여 갈릴리 호수에서 수자원 공급을 개선하는 반대 급부로 농경지역의 교환과 남부 및 2개 공항 지역에 대한 협동 개발 사업을 제안받았다.
이러한 평화협정에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국왕 간의 개인적 친분관계도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경제적 효과가 기대보다 저조했다는 점과 후세인 국왕의 사망 및 잠재적인 위기(하마스의 암살 시도; 나하라임에서 이스라엘 민간인 소녀 7명을 죽이고 요르단에서 스쿨버스를 공격함) 들이 아랍국가들 중 이스라엘과 가장 선린관계를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1998년 11월 와이 협약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파기된 와이 협약은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체결된 두번째 합의이다. 와이 협약은 양측 간의 불신과 호마, 예루살렘 지역에 새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사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반대로 인해 중단된 평화 정책을 재시작하려는 계획이다.
1992년 9월 4일 샬름 엘 세이크 메모
1999년 5월 에후드이 당선되면서 평화 협상의 진전과정에 좌절한 팔레스타인은 큰 변화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살름 엘 세이크 협의는 이스라엘의 새 수상이 평화과정을 빠르게 추진하도록 했다.
2009년 5월 24일.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철수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12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남부에 난민촌을 건설한 이후 이스라엘은 레바논 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의 검은9월단 사건 이후 PLO 지도부는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김으로써 레바논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주요 거점이 되었고 1970년대에 이스라엘은 파타랜드로 불리는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테러리스트 공격에 시달렸다.
1982년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을 공격하여 PLO가 레바논을 떠나 튀니지로 이동하게 했다.이스라엘의 전쟁이 끝난 이후 남부 레바논에는 안전 지역이 수립되었다.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분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점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즉각적인 복귀는 여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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