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의 진행과 이유
기원전 6세기 경의 바빌론 유수 이후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랍 각지에 흩어져서 수천년을 지내왔다. 유럽의 기독교 사회보다 비교적 유대교에 관대했던 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살아왔지만 19세기 말 중동에 유입된 민족주의는 아랍과 유대인의 관계를 근본적인 부분에서 바꾸어 놓았다.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예멘 출신의 유대인 중 약 10%가 1881년부터 1914년 동안에 이주했던 것 처럼 20세기 이전에도 박해를 피해 이주한 경우가 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격화된 아랍의 민족주의는 중동각지에서 유대인 박해를 가속화시켰고 유대인의 이주는 급격히 가속되었다. 그와 함께 시오니즘의 이상이 구현화 되면서 유대인들은 아랍국가에서 소수자로 지내는 불안정한 삶 이외에 새롭게 시오니즘의 이상이라는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투르크와 유럽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 아랍 각국은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반발해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쳤고 이로써 아랍 각국의 유대인은 재산을 몰수당한채로 추방당한다.이에 더해 2차대전 중 나찌는 비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에서 유대인의 안전을 위협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의 아랍인들을 겨냥한 다양한 선전활동을 실시했다. 이러한 선전, 선동은 아랍권의 반유대주의에 기름을 붓는격이 되어 아랍의 유대인 사회는 기초부터 흔들렸다. 1941년 6월 이라크에서 친나찌 쿠데타가 일어나 신정부가 수립되어 반유대정책을 실시하면서 18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945년 리비야에서는 반유대 폭동으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반유대주의 움직임은 1947년에는 예멘과 이집트로 파급되었고 1948년에는 모로코와 이라크로 확대되었다.
독립한 아랍국가들은 자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아랍권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것을 우려해 이들의 인권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을 종용했다. 이집트와 리비아는 유대인을 추방했고 이라크와 예멘, 시리아, 레바논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은 신체적, 정치적 위협으로 오랫동안 지내온 고향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한채 추방당했다. 1948년부터 신생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예멘에서 5만명의 유대인을 공수해왔고 이라크에서는 1950년부터 2년간 13만명의 유대인을 항공편으로 데려왔다. 리비아에서는 1949년부터 2년동안 3만명의 유대인을 데려왔으며 매번 아랍 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약 90%가 모든 재산을 남겨둔채 추방당했다.
아랍 각국에서 대규모 유대인 이민이 발생하게 된 주 원인은 중동전쟁으로 인한 아랍각국의 반유대주의지만 시오니즘의 영향도 크다. 이에 관한 심도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적은 없으나 아랍 민족주의와 시오니즘은 같은 지역에 오랜동안 거주해왔고 역사와 문화, 종교가 상이한 두 민족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각 요인을 분리해서 평가할 방법도 없다. 이 외에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아랍계 유대인의 이주를 촉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이 있으나 논란이 많다. 아랍측이 선호하는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회당과 사업체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하지만 역사가 모세 가트에 의하면 이라크에서 일어난 폭탄테러에 사용되었던 폭발물의 출처가 시오니스트라는 주장에는 물질적인 근거보다는 주관적인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이라크계 유대인 난민이 발생한 것은 폭탄테러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라크의 유대인 추방법에 의한 것이므로 근거가 희박하다.
1948년부터 1970년대까지 856,000명의 유대인들이 아랍국가를 떠났으며 <1948년부터 1951년까지 3년동안만도 26만명이 이스라엘로 유입되었다.> 1967년의 6일전쟁 이후 수년동안 아랍각국의 잔존 유대인 공동체들은 구성원 대부분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소멸했다. 1948년 아랍 각국에는 80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했으나 1991년에 아랍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16,000명으로 감소했다. 1948년 이후 발생한 9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난민 중 68만여명이 이스라엘에 흡수되었고 나머지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로 유립된 유대 난민들은 이스라엘 각지의 마바롯(ma’abarot)이라 불리는 임시 거주시설에 정착했고 이 시설들은 1963년까지 존재했다. 2003년 현재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41%에 해당하는 3,136,436명이 주변 아랍국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과 그 후예로 추산되고 있다.
추방의 영향
아랍계 유대인 기구에 의하면 아랍각국에 남겨둔 유대인 재산의 가치는 오늘날의 통화가치로 환산하면 3천억 달러에 상당하고 아랍각지에 남겨진 부동산의 총면적은 이스라엘 국토의 4배에 달하는 1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재산은 상실한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아랍국가 출신 유대인 난민”의 개념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라크 출신으로 전 이스라엘 의원인 란 코헨은 “나는 난민으로서가 아니라 시오니즘에 대한 믿음과 보속을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누구도 나를 난민으로 규정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멘 출신으로 노동당 대변인이었던 이스라엘 에샤야후는 “우리는 난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에 이곳에 왔으며 우리가 이스라엘에 온것은 메시아에 대한 열망에 의해서이다”라고 발언했고 또, 이라크 출신으로 역시 노동당 대변인 출신의 시로모 히렐도 “나는 아랍 각국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을 난민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이 온것은 시오니스트로서 자신들의 바람에 의해서이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보수 세파르디 파 정당 샤스는 아랍국가에서 유대 난민들이 보상금을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주민들이 중동전쟁으로 고향을 떠나면서 상실한 재산문제와 함께 다루어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유대인 난민 후원그룹은 양자를 상호적인 관계로 보고있지만 같은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UN의 난민구호기구의 도움 없이 지역사회의 도움만으로 이스라엘 사회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착 과정에서는 난민들의 출신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와 생활 방식들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1971년 이러한 문제점들은 이스라엘의 블랙 판터 운동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이주해온 아슈케나지 유대인들과 달리 아랍 출신의 스파라디 유대인들은 아랍국가에서 오랜 기간 박해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주변 아랍국가나 팔레스타인에 대해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중동 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구의 변화
알제리
1870년에 알제리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소유한 유대인이 14만명 거주했으나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할때 1만여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프랑스와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90년부터 알제리 내전이 격화되자 이슬람 과격무장단체는 1994년 알제리에 거주하는 모든 비 이슬람 신자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했고 그 영향으로 알제리의 유대인 회당이 훼손되었다.
바레인
바레인에는 1900년대 초에 이라크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1948년의 추산으로 약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7년 11월 29일 UN이 팔레스타인 분리독립안을 가결하면서 가열된 아랍권의 반유대주의로 12월 5일 수도 마나마의 유대인 가옥과 상점들이 불타고 회당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이 폭행을 당하고 노인 1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약 20일동안 대부분의 유대인이 다른 국가로 이주했으며 2006년에 바레인에 남아있는 유대인의 숫자는 36명으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바레인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국가들 중에 유일하게 유대인 사회와 회당을 인정하는 국가로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용적이다. 유대인 사회의 일원인 르우벤은 번화가에서 전자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95%의 고객은 바레인 사람으로 바레인 정부는 최대의 고객중 하나이며 매우 친절하다”라고 증언했고 에브라임 노모는 2002년 바레인 의회의 상원의원으로 인권운동 그룹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집트
1948년 이집트에는 약 7만5천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카이로에 약 100명만이 남아있다. 1948년 6월 카이로에서 폭탄테러로 22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1948년 7월에는 카이로의 유대인 상점들과 회당이 습격당해 19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같은 기간에 수백명의 유대인이 체포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1954년의 라본 사건은 이집트 유대인의 축출을 가속화 시켰고 1956년 10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1,000여명의 유대인이 투옥되고 500개소의 유대인 사업체가 이집트 정부에 몰수되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모스크에서는 유대인을 “이집트 정부의 적”을 규정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유대인의 모든 은행계좌는 압류되었다. 법률가, 기술자, 의사, 교사로 일해온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었고 회사에서도 쫓겨났으며 1967년 6일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고문을 당했고 집은 파괴되었다.
1951년, 유명한 시온의정서가 권위있는 이집트 역사학자들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되어 반유대주의 분위기를 북돋웠고 이집트 국방장관 살라 다스키는 시온의정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65년에 이집트 정부는 영문으로 아프리카의 적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배포했으며 이 책자에는 시온의정서를 언급하면서 모든 유대인을 사기꾼, 도둑에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이라크
1948년 이라크에는 약 15만명의 유대인이 바그다드와 인근지역에 거주해 오랜 역사를 가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에 이라크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100명에 불과하다. 1941년 라시드 알리의 친-추축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바그다드의 폭동으로 18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240명이 부상 당했으며 586개소의 유대인 소유 사업체가 불타고 99채의 유대인 가옥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아랍 연합국들 처럼 이라크는 자국의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로 이주하도록 종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지만 외교적인 압력이 지속되고 반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강해지자 공포분위기 속에 반유대적인 정서가 지배적이 되었다.
1950년 3월, 이라크는 자국내의 유대인에게 1년간 이라크 시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민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라크는 이 법안으로 반유대 정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시오니스트를 포함한 유대인들을 제거해 잠재적인 불안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한편으로 이라크 경제에 일익을 담당하던 유대인의 재산은 몰수하려 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라크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을 데려오기 위해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을 입안하고 공무원을 이라크에 파견해 이민희망자를 등록하게 했다.
초창기에 이라크의 유대인 대표들은 향후 유대인의 법적지위 보장이 확인될 때까지 이주대상자 수를 제한하려 했지만 곧 제한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유대인의 이주를 허용해야 했다. 유대인 축출법이 발령된지 2주후, 이라크 내무장관은 치안기관에게 이주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조사령이 내린지 몇시간뒤에 바그다드의 아부 나와스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4명의 유대인이 부상당했다. 1950년 8월 21일 이라크 내무장관은 유대인을 운송하는 회사에 하루에 500명꼴로 이송속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했으며 9월 18일 누리 아스 사이드는 유대인 대표를 불러 이스라엘이 고의로 유대인 축출을 지연시키고 있다면서 당장 국경지대로 떠나도록 위협했다. 1950년 10월 12일에는 다시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속도에 유대인 난민 발생속도를 맞추도록 강요했다.
법이 효력을 상실하기 2개월 전까지 85,000명의 유대인이 이주했지만 마수다 세토프 유대인 회당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3~5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여러명이 부상당했다. 1951년 3월 법률을 효력을 잃었지만 이라크 정부는 법률의 효과를 연장시키고 남아있는 유대인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1951년 이라크 정부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반시오니즘 서약을 거절하는 유대인을 축출하도록” 지시했고 이후 수개월 동안 일련의 폭탄테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수천명을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유대인이 모두 이민을 마쳤다. 폭탄테러는 유대인의 이주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게된 뒤에도 4건이 더 발생했으며 결과적으로 12만명의 유대인이 이라크를 떠났다.
1951년 5월 1941년 폭동으로 유대인 사회가 피해를 입은 뒤에 이라크의 시오니스트 지하조직이 이스라엘에게 공급받은 무기를 보관해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었고 시오니스트 유스프 바사리와 이브라힘 사리가 교수형을 당했다. 이스라엘은 1960년에 이 사건을 비밀리에 조사했고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유대인들이 폭탄테러에 책임이 있다고 믿고있지만 이스라엘이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이라크에서는 이스라엘이 폭력을 사용해서 유대인의 이탈을 조종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즉각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했다. 역사가인 모세 가트에 의하면 1950년 이전에 유대인을 폭탄 테러로 위협해 가면서 까지 급격한 이민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스라엘이 폭탄 테러를 조종했다고 보는 역사가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이라크 정보국 쪽에서 시오니즘 지하운동을 이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남아있던 유대인들도 꾸준히 이라크를 떠났으며 1970년까지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라크를 떠났다. 1969년에는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공공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한 9명을 포함해 11명의 유대인이 사형 당했고 남아있는 약 2,500명의 유대인은 구심력을 잃고 소멸했다.
레바논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은 적어도 기원전 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가 지속되어온 곳이다. 1948년에 레바논에는 베이루트와 레바논산 근처의 데이르 알 카마르, 바루크, 하스바야를 중심으로 약 24,000명의 유대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중에 유대인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비시 정권은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2차대전 이후 레바논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시오니즘에 대해서는 일관된 입장이 없었다. 레바논에서 반유대주의 입장은 1948년 이후에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967년의 3일 전쟁으로 레바논에 거주하는 유대인 대부분은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및 이스라엘 등지로 축출되었다. 남아있는 유대인 공동체는 레바논 내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1971년 69세의 레바논 유대인 평의회 의장 알버트 엘리아가 베이루트에서 시리아 요원에게 납치되어 다마스커스에서 시리아 거주 유대인의 축출에 협조하도록 고문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UN고등참사관 사드루딘 아가 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하페즈 알 아사드는 엘리아의 석방을 거부했다. 1980년대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유대계 사업가들을 여러명 납치했고 2004년 선거에서는 불과 1명의 유대인 만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 오늘날 레바논에는 1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있다.
리비아
리비아에는 1948년 약 38,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트리폴리에서 심각한 박해로 수일만에 36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13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000명이 집을 잃고 2,400명이 재산손해를 입은데다가 트리폴리시에서만 1,000개소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이런 박해는 15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유대인 가옥 280채가 파괴된 1948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뒤 1951년 12월에 리비아가 독립하기 까지 3만명 이상의 리비아계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7년 6일전쟁중에 4천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으며 18명이 사망하고 여러명이 부상당했다. 리비아 정부는 “유대인은 즉각 리비아를 떠나도록” 명령하면서 1인당 가방 1개와 50달러 이상의 물품을 소지할 수 없도록 했다. 6월과 7월에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4천명이 이탈리아로 탈출했으며 1,300명은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2,200명은 이탈리아에 남았으며 그 외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1970년 리비아 정부는 몰수한 유대인 자산에 대하여 15년 기한의 증서를 발행하는 신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기한이 경과한 후에 실제로 지불된 사례는 없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아랍 국가들의 적이므로 그들에게 배상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이를 정당화 했다. 비록 트리폴리의 유대인 회당은 1999년에 재건되었지만 개방되지는 않았고 2002년 2월에 리비야의 마지막 유대인 에스메랄다 메그나기가 사망하면서 리비아에는 단 1명의 유대인도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리비아계 유대인과 그 후손이 4만명 정도 남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모로코
1948년 모로코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25만에서 265,000명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2001년 남아있는 유대인의 수는 약 5,230명이다.
2차대전에서 비시 정권의 관리하에 있던 모로코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법을 통과시켜 일체의 통화 소지를 금지하고 유럽에 집이나 사업체가 있는 유대인은 추방했으며 각 지역별로 유대인의 진출가능 비율을 설정해 법률과 의료 부분에는 2%만을 할당했다. 하지만 국왕 무하마드 5세가 개인적으로 이 법안들을 싫어했기에 모로코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나 유대인 재산에” 결코 손대지 않겠다고 확언했다. 그가 실제로 모로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행동을 했는지 증거는 없지만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유대인을 보호했을 가능성이 있다.
1948년 6월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차 중동전쟁의 혼란속에서 오다와 데라야에서 폭동이 일어나 44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1948~1949 동안 18,000명의 유대인이 모로코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했다. 그후로 유대인 이민은 계속되었지만 1년에 천명 정도로 둔화되었다. 50년대 초기에 시오니즘 조직은 이민을 장려했고 특히 가난한 모로코 남부의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권장했다.
...(모로코 유대인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흡수한 아랍계 난민사회 중에서 가장 양호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농업생산을 허용받고 있으며 농산물을 이스라엘과 교환하는데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으로 방해받고 있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의 정신적 요구가 충족되어 있으며 경제적인 문제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1956년 모로코는 독립했고 유대인들도 의석 셋을 확보하고 통신부 장관 직에 오르는 등 일정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통신부 장관 레온 벤자퀜은 첫번째 개편에서 해임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내각의 요직에 유대인이 임명되는 일은 없었다. 유대인 사회는 모로코 정부의 고위층과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하위계층과는 적대적이었다. 모로코는 점차 아랍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모로코 유대인에 대한 입지도 좁아져 갔다. 이스라엘에의 이민 수는 9,171명에서 1955년에는 24,994명으로 급증했고 이때문에 1956년에 이후 5년간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금지될 정도였지만 이 기간 중에도 불법으로 모로코를 떠난 유대인 수는 18,000명이 넘었다. 1961년 1월 10일, 모로코 북부 해안에서 유대인을 실은 보트가 도주하던 중에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무하마드 5세는 이민을 허용했고 이후 3년 동안 7만명 이상의 모로코 유대인이 나라를 떠났고 1967년에 모로코에 남은 유대인은 5만명에 불과했다.
1967년의 6일전쟁으로 아랍권에는 반유대 정서가 팽배해졌으며 이는 모로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에 유대인 인구는 25,000명까지 축소되었지만 이 시기에 이민은 이스라엘 보다는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및 캐나다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는 많이 줄었지만 유대인들은 모로코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안드레 아주레이는 국왕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고 유대인 회당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테러의 대상이 되어 있으며 급진적인 이슬람 집단들은 반유대주의 선동을 일삼고 있다.
시리아
1947년의 알레포 폭동으로 도시의 유대인 구역이 불타고 75명이 사망했다. 1948년에는 약 3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있었으며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 공동체를 가혹하게 제약했고 이민도 금지하고 있었다. 이후 약 10년간에 걸쳐 많은 유대인들이 시리아를 떠나려 했으며 주디 펠드 카를 비롯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일부 유대인들이 외부 세계로 탈출해 시리아 유대인의 처지를 알렸다. 1991년의 마드리드 회담에서 미국 정부는 시리아에게 유대인에 대한 제약을 완화하라고 요구했고 이듬해에 시리아 정부는 유대인에게 이스라엘로 이민하지 않는 조건으로 출국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당시 시리아에는 수천명의 유대인이 있었지만 오늘날 남은 유대인의 수는 백여명 정도이다.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미국과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남 브루클린에는 시리아계 유대인 공동체가 2004년에 구성되어 시리아 정부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어 10여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시리아를 방문할 수 있게되었다.
튀니지
1948년에 튀니지에는 105,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1,500여명만이 데바와 튀니스, 자지스 등지에 남아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튀니즈 정부의 반유대 정책으로 튀니지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반수는 이스라엘로 향했고 남은 반은 프랑스로 향했다. 1967년의 6일 전쟁 이후 유대인 이민은 더더욱 가속화되었고 1982년과 85년, 2002년에도 유대인 회당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1명이 사망했다.
예멘
1948년 예멘에는 약 63,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오늘날 남은 수는 200명에 불과하다. 1947년 폭동으로 아덴에서만 8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1948년 새로운 이맘 아흐마드 빈 야히야는 유대인들이 예멘을 떠나는 것을 허용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매직카펫 작전으로 1949~1950 동안 44,000명의 유대인을 항공편으로 예멘에서 데려왔다. 이민은 예멘 내전이 발발한 1962년까지 계속되었고 1976년까지 소규모 공동체가 남아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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