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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레바논 내전 4. 작전명 갈릴리의 평화

1982년 PLO는 병력 15,000명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000여명이 남부 레바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기동중인 이스라엘 전차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차호에 은폐되어 있었다. 또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츄사 방사포 80문 및 120mm~ 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 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무장의 속도도 밀수의 천국이 된 레바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만에 3배 이상 증가한 250문으로 증강시킬 정도였다.


UNFIL 지역 내의 PLO 기지.

그러나 정식군대가 못되는 PLO가 장비나 규모에서 이스라엘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스라엘은 PLO 처리를 목적으로 했지만 레바논 침공시에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될 것은 시리아 군으로 예상했다. 시리아는 소련의 원조로 욤키프르 전쟁에서 괴멸되다시피한 공군력을 재건하여 MiG-23, 25, Su-22등의 공산권의 최신예 전투기를 도입했고 북한이나 소련, 베트남 등지에서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훈련을 강화했다. 지상군에 있어서도 당시에는 신비의 전차로 불리던 T-72를 도입해서 10년전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독립된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시리아 군은 1976년이래 항상 1개 사단전력을 레바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레바논의 시리아 주둔군은 베카계곡과 베이루트에 둘로 나뉘어 병력 3만에 전차 71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군비의 발전에는 이스라엘도 뒤쳐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부터 적대국가에 포위되어 있었고 국방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국방력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이스라엘의 잠재역량을 확실하게 저하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평시에는 적절한 소규모 기간병력을 유지하다가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아랍최강의 공군력이 지원하는 지상군이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예비군이 소집되어 병력을 완편하고 공세로 전환하는 것을 방어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방예산의 대부분을 공군력 강화에 투자했고 그런 전략의 허점이 4차 중동전에서 드러나기는 했어도 전략 자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데에 기여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1973년의 전쟁 이후에도 공군력을 강화하여 제공능력이 부족한 F-4는 전폭기로 돌리고 F-15와 F-16을 적극적으로 도입, 주변 아랍국가보다 최소 10년은 앞서가는 공군력을 구축했다.


레바논 전쟁(1982) 당시의 M60 베이스 마가크 6c 전차 반응장갑이 두드러진다.

그에 더하여 4차 중동전의 전훈을 철저히 연구하여 공군은 전자전기와 와일드 위젤 도입으로 SAM 대응력을 향상시켰고 지상군은 보병의 대전차화기에 대응하기 위해 반응장갑을 채용하는 한편 시리아 군의 소련제 최신예 T-72에 대한 대응으로 신형 메르카바 전차를 준비했다.

1982년 6월 6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에 대한 PLO의 테러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갈릴리의 평화’ 작전을 개시한다. 이스라엘 군은 약 6만~7만8천의 병력을 이즈하크 모르드카이 소장의 서부군(지중해 방면)과 아미르 드로리 중장의 중부군(레바논 산지 서쪽 능선), 아비그도르 벤갈 소장의 동부군(베카 계곡과 헤르몬 산지), 이상 3개 임무부대(Task Force)로 나누어 레바논 영내로 진입한다.



11일까지의 작전도

개전 첫날 가장 중요시된 목표물 중 하나는 PLO가 장악하고 있는 뷰포트 성채(Beaufort Castle)였다. 10세기경 십자군이 건축한 이 요새는 북쪽 능선을 제외하고는 깍아지르듯한 암반위에 높이 자리잡고 있어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장소였다. PLO는 이 성채를 이스라엘 영토 포격용 관측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폭격이나 포격으로는 거의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의 골라니 여단 소속 2개 중대 병사들은 갈고리를 이용해서 암벽을 기어 올랐고 Fatah는 참호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방어진지의 견고함을 추구한 나머지 야간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신형 갈릴소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은 격렬한 기관단총 사격이 난무하는 백병전 끝에 요새를 점령했다.

이튿날 이스라엘 군은 공격을 재개하여 티레를 고립시켰으며 북쪽의 시돈에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레바논 남부의 UNIFIL 지역을 돌파하고 각 거점을 우회하면서 빠르게 레바논으로 진격하고 있었지만 야간이 되자 진출선을 정돈하기 위해 후퇴한채로 8일을 맞았으며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점차 PLO 대신 시리아 군과 교전을 치르게 된다. 제진에 도달한 이스라엘 중부군의 선두 기동부대는 후속부대가 화력으로 이 거점을 점령하도록 맡겨두고 베이루트를 향해 진격했으며 이에 시리아 군은 이곳을 버리고 베이루트로 후퇴해갔다.

해안에서는 아침에 공중전이 벌어져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의 MiG 2기를 간단하게 격추시켰고 티레가 함락되고 시돈이 포위되면서 베이루트로 향하는 길에는 더 이상의 장애물이 없었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정면충돌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