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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3차 중동전쟁, 6. 전쟁의 결과

분쟁의 결말과 전후 상황

6월 10일,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의 최후공세를 종료하고 다음날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서안,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전에 비해 3배로 증가했으며 점령지에 거주하는 1백만명의 아랍계 인구가 이스라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종심은 남쪽으로 300km, 동쪽으로 60km, 북쪽으로 20km씩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67년 전쟁의 정치적 중요성은 심대하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뒤바꿀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도 있음을 확실히 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요한 교훈을 습득했고 자신들이 배운 것을 73년의 4차중동전에 활용했다. [각주:1]

전쟁이 끝나고 3주후에 이츠하크 라빈은 히브리 대의 명예학위 수여식 장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성공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스라엘 공군이 적 항공기를 그토록 정확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많은 사람들은 기술적인 이유를 찾거나 비밀 무기 등에서 이유를 찾았다. 더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적 기갑부대를 이길 수 있었듯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 병사들은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으며 요새화된 방어진지를 구축한 적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정함만이 아니라 전쟁에서 보여준 용기이며 그들이 당면한 최대의 위험에 직면하여 조국과 가족을 위해 승리를 얻으려 했고 패했다면 전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주:2]

체임 헤르조그에 의하면,

"1967.06.19, 이스라엘 정부는 평화협정의 대가로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의 반환문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여, 골란고원의 비무장화와 티란해협의 통항에 관한 합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의 협상 재개 등을 무기명 투표로 결의했다." [각주:3]

미국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안이 전달되었으나, 이집트나 시리아가 이에 대해 답신을 보냈다는 증거가 없고, 몇몇 역사가들은 아랍국가에 평화제안이 전달되지 없다고 보고 있다. [각주:4]

이 후, 카르톰에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는 평화, 협상, 인정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아브라함 셀라는 카르툼 회담은 아랍국가이 분쟁의 초점을 이스라엘의 합법성에 관한 문제에서 영토와 영역에 관한 문제로 바꾸었다는 점으로 11월 22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UN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받아들이면서 영역이 고정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각주:5]

6월 19일의 이스라엘 내각 결정은 가자지구를 이집트에 넘겨주는 것을 포함하지는 않았으며, 요르단 강 서안의 점령지를 항구히 유지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6월 25일,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을 기존의 이스라엘 관리 지역에 포함시켰다.

전쟁인한 또다른 변화는 점령지의 인구 문제로 서안에 10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30만이 요르단으로 이주했으나 난민 문제를 낳았고 [각주:6] 60만명이 잔류했다. [각주:7] 골란고원에서는 8만명에 달하는 시리아인들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주:8] 동 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의 거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합병한 1980년대 초에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었다. 요르단과 이집트는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의 반환에 대한 요구를 철회했으며(시나이 반도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의해 이집트에 반환되었고 골란고원 문제는 시리아와 여전히 협상중이다.) 이스라엘은 시로운 점령지역에 정착민들이 이주하여 이 지역에서 식량생산 증진을 꾀하고 있으며 많은 수의 이스라엘 인들이 이들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으나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 거주민 8,500명은 2005년 8월에 파혼계획(Israel's unilateral disengagement plan)에 따라 정착지를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 측은 예상보다 사상자가 많이 적어 이집트 전선에서 338명이 사망하였으며 요르단 전선에서 사망 550명에 부상 2,400명, [각주:9], 시리아 전선에서는 141명이 사망했다. 반면 이집트는 전체 군사장비의 80%를 손실하였고 1만여명의 병사와 1,500명의 장교가 사망했으며 [각주:10] 5,000명의 병사와 500명의 장교가 포로가 되었고 [각주:11] 2만명이 부상당했다. [각주:12]

요르단은 700명이 사망했고 부상자가 2,500명이었다. [각주:13] 시리아는 2,500명이 사망하고 5,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전차의 절반과 골란고원에 배치된 포병전력 거의 전부가 괴멸되었다. [각주:14] 이라크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10명에 부상자 3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주:15]

3차 중동전쟁은 지역 분쟁의 기초를 낳았다. 1967년 11월 22일, UN안보리 결의안 242조에서 “평화-영토 교환”(land for peace)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면 "모든 영토 주장과 교전사유가 종결"되도록 되었다.

UN안보리 결의안 242조의 기본틀은 일부 지역의 점령이 승인하는 듯하지만  [각주:16] 영문 공식판은 "전쟁중 점령한 지역"에 관한 언급이 삭제되어 있다.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버전에서는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의 철수"를, 이스라엘 버전에서는 "점령한 지역에서의 병력의 철수와 평화 보장"으로 되어 있다.) 1978년 이스라엘은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후 시나이를 이집트에 반환했으며 2005년에 여름에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하였으나 여전히 군사작전이 실시되고 있고, 항구나 공항등에서는 통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후, 몇가지 종교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요르단 점령시절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구 시가지와 통곡의 벽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각주:17] 이러한 "성지순례"가 널리 허가되었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합병한 이후 모든 종교집단이 자신들의 성역을 참배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알 아크사 모스크가 남아 황금사원으로 무슬림들이 관리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종교행사를 벌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각주:18]

이스라엘 군의 이집트 전쟁포로 사살

1995년 8월 16일 이스라엘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바 일랑(Bar Ilan) 대학의 아르예 이즈하키(Aryeh Yizhaki)는 자신이 이스라엘 군 역사 부서에서 근무했으며 67년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벤 엘레에젤이 지휘하는 정찰대가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이집트 병사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츠하키는 전후에 자신이 6~7건의 개별적인 사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이 천여명에 달하는 비무장 이집트 포로들을 살해했음을 확인했으며 이 내용을 참모총장 이즈하크 라빈에게 전달했는데 이를 알고도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자료를 없애야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츠하키가 라파엘 에이탄의 초멧 당원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그를 이스라엘군 연구기관의 보조연구원으로 고용했던 메이르 파일은, 이츠하키가 그 자신과 에이단이 1956년 전쟁에서 49명의 전쟁포로들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된 내용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바꾸려는 의도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고 비난했으며 이츠하키는 “무언가를 공론화 시키는 사람은 언제나 이런 종류의 음해를 받는다”라며 일축했다. 그의 진술은 제임스 뱀포드 저 “Body of Secret”를 통해서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각주:19] [각주:20]

이후에도 이츠하키의 주장대로 1,000명에 달하는 포로가 사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외에도 비무장 포로에 대한 처형을 목격했다거나 일반에 알리지 못했다는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타블로이드 언론인 이디오 아로노스에 의하면, 자신이 5명의 이집트 포로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며 [각주:21] 마이클 바 조하르는 3명의 이집트 포로가 요리사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고 [각주:22], 메이르 페일은 포로나 아랍 시민들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각주:23]

언론에 보도된 이츠하키의 주장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자 [각주:24] “이즈하크 라빈 참모총장은 그에 관련된 질문에 그 사건들이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들이라 밝혔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유명한 이스라엘 군사 역사가 우리 밀스테인은,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이 항복한 다음에도 사살당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상부의 지시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그런 행동이 일어나도 된다는 분위기였다. … 몇몇 지휘관들은 그런 행동을 용납했고 어떤 경우에는 거절되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각주:25]

뉴욕타임즈 1995.09.21 보도에 의하면, 이집트 정부는 시나이의 엘 아리쉬에서 30~60구의 이집트 포로 사체가 1967년 전쟁 기간 중에 사살당한채로 집단매장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외무성 관료 엘리 다얀을 통해 이집트와 이 문제를 논의했으며, 방문 기간 중, 희생자 가족에게 조의를 표했으나 20년 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책임소재를 추궁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집트의 일간지 알 샤브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대사 다비드 술탄가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100명의 이집트 포로가 살해된 사건에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으나 대사관 측과 이스라엘 외무부는 공식적으로 이와 관련된 사실을 부인했으며 술탄 대사가 군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지도 사실 불분명하다. [각주:26]

한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비무장지대 경비를 맡았던 유고 경비대대의 장교, 밀로얀 조르크 대령과 미오보르 스토식 대령은 이스라엘 측이 이집트 군 포로를 자신들이 주둔하는 지역에서 살해했다는 데 대하여, 엘 아리쉬의 이집트 마을 근처에서 250명의 전쟁포로를 살해했다면 자신들이 알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기밀해제된 이스라엘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1967.06.11, 참모본부는 포로들의 처우에 관련되어 새로운 명령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명령은 “전의 명령이 혼란스러우므로, 새로운 지침을 하달한다. a) 항복한 병사와 민간인은 절대로 해쳐서는 안된다. b) 무기를 소지하고 있거나 항복하지 않는 병사와 민간인은 죽일 수 있다. … 이에 응하지 않고 포로를 죽이는 병사는 강력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 명령이 모든 이스라엘 병사에게 확실히 전달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각주:27]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이집트 군 4,338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이스라엘 군은 11명 만이 포로가 되었을 뿐이다. 68년 11월 23일, 양국은 포로교환에 합의한다 [각주:28]

이집트-이스라엘 간 중간지대에 배치되었던 3,400명 규모의 UNEF 유고슬라비아 정찰 대대의 밀로반 조르크 대령(Capt. Milovan Zorc)과 연락장교 미오볼 스토식(Miobor Stosic)는 전쟁의 증인으로써 자신들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전쟁포로를 처형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군이 만약 이집트의 엘아리쉬 마을 근처에서 250명을 학살했다면 자신들이 알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각주:29]

아랍측의 미국과 영국의 지원논란

많은 아랍인들은 미국과 영국이 이스라엘 공군을 지원했다고 믿고 있다.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한 전쟁 2일째부터 아랍계 언론은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이스라엘이 지원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이집트 ‘라디오 카이로’와 정부기관지 알-아람에 의하여 수차례 제기되어온 것이며 대표적인 것은 미국과 영국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이집트를 폭격했다는 주장, 리비아의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미 항공기들이 폭격했다는 주장, 미국 첩보 위성들이 이스라엘에게 첩보를 제공했다는 주장 등이다. 시리아와 요르단 방송도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으며 이집트 언론들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직접 레이다 망을 통해 영국 항공모함에서 항공기가 출격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랍권 밖에서는 이 주장은 인정되고 있지 않으며, 미국, 영국,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한데 이어, 소련도 이집트 측에 미국이 이 분쟁에 관련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시켰다. 6월 8일 이스라엘이 도청하여 공개한 통화내역은 이집트 측 주장의 신뢰성을 더욱 훼손시켰으며 다음은 2일전 나세르와 후세인간의 대화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각주:30]

나세르 : … 미국측을 연관시킬 수 있을까? 미국이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후세인 : 안녕하시오. 들은바가 없소.(잡음. 주로 후세인 쪽 회선이 불분명하다.)

나세르 : 안녕하시오. 우리는 미국으로 해야하는 거요 아니면 미국과 영국을 둘 다 지명해야 하오?

후세인 : 둘다.

나세르 : 영국이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나요?

후세인 : (대답은 불분명)

나세르 : 좋소. 후세인 국왕이 발표하면 나도 발표하겠소. 고맙소. 전하께서는 미국과 영국의 참전에 대해 발표하시겠소?

후세인 : (대답은 불분명)

나세르 : 좋소. 신께 맹세하건데 나와 당신이 발언하고 시리아도 미국과 영국 공군기가 항모에서 작전을 수행했다고 밝힐 것이오. 이로써 문제를 좀 더 나아지겠지한편,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아랍측의 치욕적인 대패가 확실해지자, 아랍측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도왔다는 주장을 더욱 밀어붙였다. 나세르는 1967.06.09, 연설에서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미국과 영국 함재기가 이스라엘의 전쟁수행을 도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영국 공군이 폭격했으며 다수의 미국 항공기가 이집트의 방어진지를 정찰했다. .. 이스라엘 공군은 실제 전력의 3배 이상에 달하고 있지 않고서는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후세인 국왕은 후일 미국이 군사적으로 지원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6.30, 그는 뉴욕에서 자신이 안전하며, 미군기나 영국군 항공기가 참전한 일이 없음을 확인했다. [각주:31] 9월, 뉴욕 타임즈는 나세르가 카르톰 회담에서 다른 아랍측 지도자들에게 전에 자신이 밝혔던 바가 거짓임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각주:32]

이 문제의 원인은 전쟁이 종결될 즈음, 아랍측이 군사적으로 치욕적인 대패를 당한 것이 확실해지자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대결하기 보다는 차라리 미국이나 영국과 싸우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7년 이후 이집트의 교과서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으며 67년 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이 아랍세계를 지배하려던 음모의 일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체로 중동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이 외부의 전반적이고 광범위한 지원을 받아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의견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맨 분쟁으로 이집트와 불편한 관계였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영국 대사관의 발표에 의하면,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발언은 … 당시 그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대부분의 아랍인들이 신뢰했다 … 우리방송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방송을 했지만 듣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우리측의 부인 내용은 보도 되지도 않았으며 방송으로 공개되지도 못했다. 우리와 친밀한 지식층 까지도, 영국측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으며 나세르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외무부 고위관료는 나의 공식적인 서신을 받고 사석에서는 우리 쪽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절대로 공개적으로는 발언하지 않았다. 나세르의 이 발언은 아랍국가에서 우리의 신뢰도를 심각하게 흔들었으며 영국에는 의혹과 반대가 쏟아졌다. 그 뒤로는 어떠한 부인도 아랍권에 널리 퍼져있는 반감을 종식시킬 수 없었고, 이 패배는 너무나 모욕적이었으므로, 누군가 적으로 삼아서 자신을 정당화 시켜야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집트 정부와 언론은 이스라엘과 영국, 미국에 대한 의혹을 계속 주장해왔으며, 라디오 카이로의 무하마드 하이칼은 주말논단에서 반복되어 전쟁과 관련된 “기밀”들을 밝혀댔다. 그의 주장은 요약하면 미국-이스라엘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한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가인 엘리 포드는 “1967년 이후 이집트의 모든 역사 교과서는 이스라엘이 영국과 미국의 지원하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1967년의 전쟁은 아랍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적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이집트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 반복되고 있는 주재로 공식적인 교리화 되어 있으며 이집트 학생들은 이런 내용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집트 교과서들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미국의 역할 :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을 혼자서 수행한 것이 아니다. 수백명의 지원자와 조종사, 장교가 지원되었으며, 미국의 과학적 최첨단 영상, 통신첩보장비들이 이스라엘에 제공되어 이집트의 방어시설을 교란했으며 이집트 지휘부의 명령체계를 방해했다.”

한편, 6일 전쟁과 관련하여 역사가 마이클 오렌은 아랍 지도부이 미국의 참전에 대해 허위사실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랍측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각주:33] 전후,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세가 명백해지자, 이런 주장은 나세르와 아랍 지도자들에게 쏟아진 비난을 해소해주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아랍 진영의 산유국들은 석유생산제한을 실시하여 석유파동을 일으키고, 아랍의 6개 국가는 영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단절했고 레바논은 대사관을 철수했다. [각주:34]

결국, 영국 언론들이 결론지었듯이,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간단하게 자신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줄 수 있었다는 것을 믿지않게 해줄 명분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었”다. [각주:35]

미국과 영국의 비전투 지원

1993년, 존슨 행정부 관련 인터뷰를 통해 로버트 맥나마라는 미국 제6항모전대가 지브랄타 근처에서 훈련중이었으며, 중동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경우, 이스라엘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밝혔다. 그는 “당시 시리아-이스라엘간 상황은 너무 급박했고, 실전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가 시리아를 지원하게 될 경우, 6함대는 지브랄타에서 동지중해로 재 배치되어 세력간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소련측의 코시킨이 핫라인을 연결해서 만약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할 경우, 소련도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하면서, “거의 전쟁위기였다”고 밝혔다. [각주:36]

당시 코시킨은 “우리가 항모를 지중해 근처에 배치했다”는 점에 대단히 분노했으나 맥나마라는 이 위기가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각주:37]

이와 관련하여 BBC의 저명 언론인 제레미 브라운은 1967.06.04, 이스라엘의 미리함 호가 기관총과 105mm전차포탄, 기갑차량을 선적한 상태로 영국의 Felixstowe를 출항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비밀리에 영국과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물자”라고 밝혔고, “이스라엘 수송기가 링컨셔의 영국공군 와딩튼 기지에서 물자와 인원을 실어나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각주:38] [각주:39]

소련의 개입

1967년의 전쟁은 서독과 아랍 국가들 간의 긴장상태를 강화하기 위하여 소련이 유도한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2003년 9월의 중동판 International Affairs에서, 이자벨라 지너는 소련 문서를 인용하여 이집트 군에게 소련군이 시리아 측 골란고원 주변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허위첩보를 전달하여 전쟁을 부추켰다고 밝혔다. 윌슨 센터의 냉전 관련 문서고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 수집하고 있다.


난민의 발생

아랍

이스라엘의 "신세대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자신의 저서 "정당한 희생자들"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루살렘 남서부의 세 마을과 칼킬랴(Qalailya)에서 가옥이 교전중의 사고가 아니라 난민을 쫓아내기 위해 파괴되었다." 이것은 다얀이 자신의 비망록에서 (가옥의 파괴가) 정부의 정책에 반해서 이루어진 행위라고 적은 것과 반대되는 일이다.
칼킬야에서 1/3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며 만여명 이상의 거주민이 소개되었으나 근처에 난민촌을 구축했다. 두 지역의 난민들은 일단 거주가 허용되고 나중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건 도구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길에 나앉았다. 아마도 약 여리고 주민 7천여명이 피난을 떠났으며 만여명이 다음달에 떠났고 서안 거주민의 1/4에 해당하는 20만 내지 25만명의 주민들이 추방되었다. 이들은 요르단 강을 건너 동안으로 건너갔으며 얼마나 많은 인구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추방되었으며 어느 정도가 공포 때문에 자발적으로 떠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IDF 군인들이 집을 떠나 요르단으로 건너가도록 명령했었다는 증거가 상당수 존재하며 일부는 동안지역에 친지나 생업수단이 남아있기에 그들과 영구적으로 통행이 두절될 것을 우려하여 동안으로 건너갔다.

수천명의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알렌비 교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지만 강압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967년 6월 11일에는 이스라엘이 제공한 무료 교통수단으로 1개월에 걸쳐서 이동이 이루어졌다. 알렌비 교에서 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 거주지를 떠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아마도 수천명의 주민들이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 각지로 이주한 것 같다.

7월 2일 이스라엘 정부는 8월 10일까진즌 1967년의 난민들이 복귀를 원한다면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밝혔고 기한이 9월 13일까지로 확장되었다. 요르단 정부는 많은 난민들에게 복귀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는 12만명 중에 14,000명만이 9월 초까지 서안지역으로 복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후로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총 3,000여명 만이 복귀가 허용되었다.

또, 약 8만~11만명의 시리아 인들이 골란고원에서 도주으며 [각주:40] [각주:41] 약 2만명이 크네이트라에서 피난했다. [각주:42]


유대인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둔 즉시 아랍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박해와 추방을 당했다.
역사가 마이클 B 오렌에 의하면

이집트, 예멘, 레바논, 튀니지, 모로코 등지의 인접 아랍국가에서 폭도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예배당과 거주지를 습격했다. 트리폴리와 리비야에서 유대인 박해(pogrom)이 발생하여 18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했으며 생존자들은 구치소에 이송되었다. 이집트에 거주하던 4,000여명의 유대인 중에 800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에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수석 랍비도 있었고 이들의 재산은 이집트 정부가 몰수했다. 다마스커스와 바그다드에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유대인 공동체로 자택에서 체포되었으며 유대인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과세를 당했고 약 7,000명이 축출되었으며 대부분은 단순한 학생이었다. [각주: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