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의 출발
분데스리가의 태동은 1932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독립왕국 시절의 지역감정이 남아있어서 지역별로 리그를 만들어 소속팀들끼리 리그전을 치르고 챔피언들끼리 경기를 치르는 체제였는데 독일축구협회장 펠릭스 리네만이 독일 최고의 팀들을 모아 ‘왕국 리그(kingdom league)’를 창설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비록 각 지역 축구협회들이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축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사실 독일에서 축구는 전통적으로 지도층의 구미에 맞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축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잉글랜드의 영향력, 무질서함 등은 독일 지도층이 원하는 ‘건강한 국민’ 육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기계체조나 육상보다 효용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비추어 졌고 적어도 축구가 히틀러의 최우선 관심사는 아니었다.
2차대전이 끝난 1950년대에도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은 이미 전국규모의 프로리그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독일에서는 여전히 지역별 리그제를 유지했다. 독일팀들은 국제무대에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프로팀을 만났을때 상대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1954년 월드컵을 우승하며 한껏 위상이 고양된 독일 축구계는 분데스리가(연방 리그)의 필요성을 빈번하게 거론했지만 그 실현까지는 많은 장벽이 남아있었다. 당시만해도 독일 축구협회에는 운동경기는 시장경제와 무관해야 한다는 순진한 아마추어 의식이 깊게 남아있었고 어느 팀이 분데스리가에 포함되어야 할지도 복잡한 문제였다.
그러나 1962년, 칠레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 대표팀이 탈락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독일축구협회는 새로 헤르만 노이베르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도르트문트에서 103:26으로 분데스리가 창설을 결의하면서 빠르게 새로운 통합 리그 창설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켰다.
분데스리가의 구축
새로운 리그는 16개 팀으로 구성하기로 했고 남부리그와 서부리그에 5팀, 북부리그는 3팀, 남서부 리그에 2팀과 베를린 리그는 1팀이 배정되었다. 선발기준은 처음부터 리그의 흥행보다 독일 대표팀의 수준향상이 목표였던 만큼 1부리그 팀은 인기 이전에 장기적인 발전을 담보할 팀의 규모와 컵대회에서 거둔 장기간의 안정된 실력이 중시되었다. 게다가 최소한 35,000명이 입장할 수 있고 조명시설이 있는 홈 경기장이 필요하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전체 리그의 74개 팀 중에서 46개 팀이 분데스리가에 지원했지만 묀헨글라트바흐, 헤세카셀, 레버쿠젠 같은 훗날의 강팀들을 포함해서 15개팀의 지원서가 자격미달을 이유로 즉시 반려되었다. 마침내 1963년 1월에 FC 쾰른, 도르트문트, 샬케, 베르더브레멘, 아인트라흐트프랑크프르트, FC 뉘른베르그, FC 사부르켄, 함부르그SV , 헤르타베를린 이상 9개팀의 참가가 우선적으로 결정되었고 1963년 5월에는 메이데리헤 SV,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FC 카이저슐라우테른, 1860 뮌헨, VfB 슈투트가르트, 칼스루헤 SC, 함부르그 등 7개팀이 추가되어 총 16개 팀이 분데스리가1의 원년멤버로 선정되었다. 남은 13개 팀은 지역리그에 잔류했다.
이 선정은 나중까지도 많은 논란을 낳았는데 FC 사부르켄의 경우 실력미달인데도 당시 독일축구협회장인 동시에 사부르켄 구단주인 헤르만 노이베르거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북부리그에서는 오펜바흐가 칼스루헤나 슈트투가르트 보다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성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분데스리가에 합류할 수 없었다. 브라운슈바이크가 하노버 96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것도 문제였다.
화려한 출발
분데스리가 우승접시
1963년 8월 24일 분데스리가 첫경기가 시작되고 58초만에 도르트문트의 티모 쾨니체카가 베르더브레멘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 이날 8경기에는 무려 327,000명의 관중이 몰려들었고 FC 쾰른이 SV 메이데리헤에게 불과 6점 앞서는 치열한 경쟁 끝에 원년우승을 차지한 새로운 리그의 첫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바로 그 다음해에 강등위기에 몰린 칼스루헤 SC와 샬케04가 헤르타 BSC의 급료규정 위반 문제를 제기하면서 분데스리가는 위기를 맞는다.
헤르타BSC는 베를린을 근거지로 하는 전통의 명문이었지만 당시 동독과 분단상태에 있던 서독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서베를린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분데스리가에 있는한 선수들에게 동독지역을 계속 오고가는 위험을 안겨줘야 하고 그 결과 헤르타BSC는 다른 팀들보다 실질적으로 많은 연봉을 제시해야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헤르타BSC는 지역리그로 강등되었고 베를린 지역리그의 두번째 강팀인 SC 타즈마니아1900베를린이 억지로 분데스리가로 승격하고 1해만 강등없이 18개 팀이 경기하는 방법을 채택했지만 이런 미봉책은 타즈마니아에게 분데스리가 사상 최약의 팀이라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안겨준다. 승격 첫해인 65~66시즌에 타즈마니아는 최소득점(15), 최다실점(108), 최소승(2), 최대패(28), 최소 평균관중(827), 최다경기 연속무승기록(31경기) 등등 온갖 불명예를 떠안고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하지만 이 해에 승격한 묀헨글라트바흐와 FC 바이에른은 이윽고 이윽고 리그를 제패하는 강팀으로 떠오르게 된다.
양강체제
1960년대 분데스리가는 매년 챔피언이 바뀌고 있었지만 69~70 시즌과 70~71 시즌에 묀헨글라드마흐가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하며 명문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1970년대는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양강체제가 구축되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71~72 시즌부터 분데스리가 최초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리그 최강의 팀으로 부상했지만 당시 분데스리가는 급격하게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71년 6월 6일, 분데스리가는 구단주 카넬라스가 승부조작 의혹을 폭로하면서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고 독일축협의 면밀한 조사 끝에 70/71 시즌에서 마지막 8번의 승패가 조작되었다고 결론이 나오자 이와 관련된 52명의 선수와 코치 2명 및 축구협회 관계자 6명을 독일축구계에서 영구추방시키고 벨레펠트와 오펜바흐의 분데스리가 면허를 취소해버리는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한번 잃어버린 대중의 신뢰는 쉽게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창설이래 초기효과를 잃고 서서히 관중이 감소되고 있던 분데스리가는 70~71시즌의 630만 관중이 71~72시즌에는 540만으로 72~73시즌에는 500만으로 급락하면서 인기를 잃어갔다. 경기당 평균관중 수는 16,372명까지 축소되었다. 74년 월드컵에서 서독이 당대 최강 네덜란드를 꺽고 우승하고서야 관중이 다시 늘어나고 각팀은 이윤을 내는 등 분데스리가는 승부조작 스캔들의 여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는 별도로 국제무대에서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 매년마다 UEFA 무대에서 1팀은 준결승에 진출했으며 바이에른 뮌헨은 74년부터 유러피안 컵 3연패를 달성했으며 함부르크SV는 컵위너스컵을 제패했다. 묀헨글라트바흐도 UEFA 컵에서 1975~1979까지 4년동안 3번 우승하는 등 60년대까지 한번도 우승에 가지 못하고 4강 언저리를 맴돌던 독일팀들의 성적이 급상승 한것이 이 시기의 최대 성과였다.
북부 대 남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데스리가의 평균관중수는 다시 감소세로 돌아선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19976년 로저 반 굴이 받은 백만 마르크가 최고 연봉기록이었는데 반해 칼 하인츠 루마니게를 비롯한 최고의 스타들이 세리에 이적으로 받은 연봉은 천만 마르크가 넘었다. 분데스리가의 최고 스타들은 더 많은 돈을 찾아 외국으로 향했다. 게다가 보리스 베커와 슈테프 그라프가 테니스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언론의 관심은 축구를 떠나갔다. 1982년과 1986년에 독일국가대표팀은 연속으로 월드컵 결승전에 올랐지만 수비성향의 독일팀은 승리하는 축구이긴 했어도 관중을 흥분시키는 축구는 아니었다.
변화의 흐름은 분데스리가에도 영향을 주어 선수들의 몸값이 급격히 상승하는 가운데 70년대 바이에른과 함께 분데스리가를 양분하던 묀헨글라트바흐가 몰락해갔다. 80년대 초까지만해도 묀헨글라트바흐는 강팀이었지만 34,500명이라는 홈구장 최대수용인원은 입장료수익의 최대장애물이 되어 재정적인 압박을 강화했다. 결국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테우스를 비롯한 대표선수급 핵심맴버들을 차례로 방출하면서 묀헨글라드바흐가 중위권으로 하위권으로 밀려나 버리자 새롭게 바이에른의 경쟁자로 뛰어오른 것은 함부르크 SV였다. 80년대 분데스리가를 상징하는 북부의 HSV 대 남부의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신 라이벌 구도가 시작된 것이다.
함부르크 SV 와 FC 바이에른의 경기 1981
외국인 코치 에른스트 하펠의 지휘아래 1979년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거머쥔 함부르크 SV는 호르스트 흐루베흐, 만프레트 칼츠, 펠릭스 마가트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3번의 우승을 달성하면서 황금시대를 열었다.(83~84시즌에 슈투트가르트에게 우승을 내주면서 3연패는 실패) 바이에른은 여전히 강팀으로 군림했고 그동안 중하위권에 머무르던 레버쿠젠이 UEFA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등 분데스리가는 지각변동을 겪었고 그러는 동안 국제무대의 성적은 서서히 하락해갔다. 세계 축구계는 80년대를 맞아 빠르게 상업화 되었고 그에 발맞추어 분데스리가의 경쟁 리그들은 수준을 높여가는 가운데 여전히 분데스리가는 유럽무대의 강자였지만 70년대의 위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독일통일과 상업화
1990년 독일은 월드컵에서 세번째로 우승했고 1996년에는 유럽 선수권에서도 3회 우승을 달성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와 함께 분데스리가는 중계료 라는 새로운 수입원에 눈을 돌렸다. 과거에 축구는 한정된 채널 안에서 방송중계를 따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지만 90년대에 위성 케이블 방송이 활성화 되자 이 관계가 역전되면서 각 방송사들이 한정된 컨텐츠를 따내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편, 독일의 통일로 서독과 동독의 축구협회가 통합되면서 한자 로스토크, 다이나모 드레스덴, 에네르기 코트부스 등 동독의 강팀들이 분데스리가에 새로 편입되었다. 그동안 FC 바이에른 뮌헨의 독주와 그를 견재하는 라이벌 구도로 진행되던 리그의 판도는 점차 평준화 되어 도르투문트, 샬케, 바이에른, HSV, 레버쿠젠 등 5개팀이 치열한 우승 경쟁에 뒤어드는 새로운 구도가 만들어졌다.
1996년 통합 분데스리가 로고
이는 곧 독일 클럽들의 국제무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면서 1990년대부터 분데스리가는 매년바다 유럽 대회 4강에 1팀씩은 올려놓았고 도르트문트가 챔스에서 우승하고 바이에른 뮌헨과 샬케 04가 각기 1회씩 UEFA 컵을 우승하는 등 과거보다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축구붐 시대
2000년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 6번 우승(2002년 도르트문트, 2004년 베르더 브레멘, 2007년 슈투트가르트, 2009년 볼프스부르그 우승 외에는 전부 바이에른 뮌헨)하며 여전히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우승을 향한 경쟁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1999/2000 시즌에 레버쿠젠은 마지막 경기에 비기면서 동일 승점에 다승 우선 원칙으로 리그 첫 우승 기회를 놓쳤고 2000/2001 시즌에는 샬케 04가 승점 1점 차이로 우승을 놓치는 등, 마지막 날에야 우승팀이 가려지는 박빙의 승부가 10년간 6번이나 연출되는 치열한 경쟁이 거듭되며 흥미를 더해갔다.
2003년 8월 24일에는 분데스리가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원년멤버인 동시에 단한번의 강등도 경험하지 않은 ‘공룡’ 함부르크 SV 와 최다우승을 자랑하는 챔피언 FC 바이에른 뮌헨의 개막적이 열리는 등 열기가 뜨겁던 분데스리가는 2005년 심판의 경기조작 스캔들로 또 다시 충격에 쌓인다. 로버트 호이저 심판은 자신이 분데스리가2와 독일컵의 경기 결과 조작에 관여해왔다고 실토했고 이에 따른 전면조사를 통해서 2004년 8월 21일 HSV가 승부차기 끝에 2:4로 패했던 독일컵 경기에서 고의로 퇴장 명령을 내렸음이 밝혀졌다. 호이처는 29개월 구금형을 선고받고 축구협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그와 연루된 다른 심판 도미니크 마르크도 18개월 형에 영구제명 처분을 당했다. 분데스리가2부의 선수들과 심판들 일부가 영구제명을 당하는 등 총체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분데스리가1부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함부르크 SV 는 감독소홀로 인해 독일컵에서 조기 탈락한 위로금으로 200만 유로를 받았다.) 이로 인해서 독일축구협회는 심판진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하는 한편 경고제를 실시하고 TV 판독제를 실시하는 등 심판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가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분데스리가의 열기는 점점 더 높아져갔다. 1990년대 이후 방송 중계료를 1부리그가 독점하게 된 EPL이나 각팀단위로 중계료 계약을 맺는 세리에와 라리가와는 달리 분데스리가는 중계료 수입을 축구협회가 관리하면서 분데스리가2를 비롯한 하부리그들에게도 분배하는 정책을 통해서 전체적인 경쟁력 강화를 추구했고 그 결과 전반적인 독일축구의 수준이 향상되었고 다년간 계속된 치열한 상위권 경쟁으로 분데스리가는 축구계에서 평균관중으로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분데스리가는 306경기에 1천2백만명 이상의 관중을 경기장에 모으고 있으며 경기당 평균관중의 수는 4만명이 넘고 매년 6.9%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세계 프로스포츠 전체에서도 호주럭비-인도크리켓-미식축구에 이어 4번째로 많은 평균관중으로 특히 도르트문트(72,850)나 바이에른(67,214), 샬케04(61,177), HSV(53,298)같은 인기팀의 평균관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2006년 월드컵에 대비한 전체적인 경기장 시설 개선사업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데스리가 2의 평균관중도 15,253명을 넘어서는 등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알리안츠 아레나. 이 경기장 수용인원이 69,901명인데 평균관중이 69,000명이다.
분데스리가의 성장세는 그동안 EPL, 라리가, 세리에 밑에 있던 분데스리가 팀들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UEFA랭킹에서 2010년에는 14,916점을 기록하면서 세리에와의 격차를 1.4점차까지 좁히는 등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09/10 시즌 분데스리가 팀들의 분포
자료 및 사진 출처
http://de.wikipedia.org/wiki/Fu%C3%9Fball-Bundesliga
http://en.wikipedia.org/wiki/Fu%C3%9Fball-Bundesliga
http://www.bundesliga.de/en/liga/news/2008/index.php?f=0000128159.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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