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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note

페어플레이 1. 죽음의 시합

오늘날처럼 1930년대 소련에서 축구는 상당히 인기있는 스포츠였고 특히 비교적 기후가 온화한 우크라이나에서는 더욱 인기가 많았다. 그 시대에 우크라이나 최고의 팀은 발전소 노동자 체육위원회 소속의 다이나모 키에프 팀으로 1938년에는 소련 국내 리그 4위를 기록한 강팀이었다. 1939~1940 시즌에는 성적이 보다 낮았고 이듬해인 1940~1941 시즌은 1941년 6월 22일 나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중단되었다.

다이나모 키에프 팀은 해체되고 선수들은 군대로 끌려갔지만 1941년 소련은 독일군에게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있었고 키에프는 순식간에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다이나모 키에프 선수들 대부분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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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프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포로과 민간인들은 일상을 계속했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속에서 다이나모 팀 골키퍼 미콜라 트루세비치는 전부터 다이나모 키에프 팀의 열렬한 팬이었던 빵집 주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빵집 주인이 된 코르디크는 축구 광팬으로 그는 빵집 축구팀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1942년 봄이되자 트루세비치에게 과거의 팀원들을 모으도록 했다.

몇주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다이나모 키에프 팀 출신선수 8명과 로코모티프 키에프(키에프 철도노조) 출신 선수 3명으로 구성된 축구팀 FC Start가 결성되었고 급조된 팀이었지만 이들은 친독주의자(매국노)인 게오르기 세베스토프가 급조한 지역 리그에 출전하기로 했다.

비록 훈련시설이나 도구는 부실했어도 FC 스타르트는 점령군 팀들을 맞아 연전연승 기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6월 7일 대 루흐(게오르기 세베스토프가 거느리는 팀) 7 - 2 승.
6월 21일 대 헝가리 점령군 팀  6 - 2 승
7월 5일 대 루마니아 점령군 팀 11 - 0 승
7월 12일 대 군사철도 노동자 팀 9 - 1 승
7월 17일 대 PGS(독일군 팀) 6 - 0 승
7월 19일 대 MSG Wal (헝가리 팀) 5 - 1 승
7월 21일 대 MSG Wal (헝가리 팀) 3 - 2 승
8월 6일 대 플레클레프(독일 공군 팀) 5 - 1 승

우크라이나의 소련 팀이 점령군 팀을 상대로 7연승 기록을 쌓아나가자 독일 점령군은 추축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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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 장교들로 구성된 플레클레프는 3일 뒤 리턴 매치를 신청했다. 나찌 친위대 장교가 심판을 맡았고 판정이 공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FC 스타르트 관계자들은 비밀리에 만약에 이번에도 독일팀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스타르트 팀은 승부를 조작하느니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시합하기로 결정했고, 경기장에 들어가 나찌식 거수경례를 거부했다.

그리고 시합이 시작되었다.

fcstartxflakelf_276590.jpg

예상했던 대로 독일 심판은 플레클레프의 반칙을 모두 묵인했다. 제일 먼저 스타르트 팀의 골키퍼 트루세비치의 머리를 독일군 포워드와 레프트 윙이 걷어찼다 트루세비치가 쓰러져 있는 동안 독일군 팀은 1점을 올렸다. 플레클레프는 유니폼 붙잡기, 공 대신 선수를 걷어차기, 백태클, 옵사이드 등등 온갖 반칙을 다 저질렀지만 심판은 모두 묵인해주었다.

하지만 FC 스타르트는 쿠즈멘코의 장거리 프리킥으로 간신히 1점을 올렸다. 그리고 레프트 윙 곤차렌코가 독일 선수 대부분을 드리블로 돌파해서 전반전이 끝난 시점에서는 2 - 1로 FC 스타르트가 이기고 있었다.

후반전에 양팀은 2골씩 더 득점했고 경기가 끝날 때 쯤에 스타르트 팀이 1골을 더 성공시켜서 5-3으로 완승을 거둘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비수인 클리멘코는 독일팀의 수비수를 모조리 돌파하고 골키퍼까지 돌파해서 득점을 눈앞에 두었다.

클리멘코는,

슛을 하지 않고 공을 다시 중앙선 쪽으로 걷어내었다.

심판이 휘슬을 불고 시합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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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뒤인 8월 16일. FC 스타르트는 루흐와 재경기를 했고 이번에도 8 - 0으로 승리했다.

그 경기가 끝나고 FC 스타르트 선수들은 게슈타포에 끌려갔다. 체포된 선수들 중 미콜라 코로챠흐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쿠즈멘코와 올렉시 클리멘코, 골키퍼 미콜라 트루세비치는 이듬해 2월 처형되었다. 11명의 선수 중 전쟁이 끝날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페디르 튜체프와 미하일 스비리도프스키 2명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8년에 이브닝 키에프 신문에 이 사건을 다룬 기사가 실리면서 이 '최후의 결투'는 전 소련에서 유명해졌고 두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키에프의 제니트 스타디움에는 이 사건을 기념한 동상이 서있다.

http://kr.news.yahoo.com/service/cartoon/shellview2.htm?linkid=series_cartoon&sidx=7779&widx=74&page=8&wdate=20090130&wtitle=%C0%CC%B8%BB%B3%E2%BE%BE%B8%AE%C1%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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