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14. 서부전역 - d. 채터누가 전투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4. 서부전역 - d. 채터누가 전투

아르미셸 2009.07.17 00:34

스톤 리버에서 거둔 승리로 로스크랜의 컴벌랜드 군은 멀프리스보로를 점령하고 북군이 테네시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후 6개월간 북군은 더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스톤 리버 전투의 피해가 1만 6천명에 달하는 데다가 인구가 적은 산악지대인 이곳에서 보급은 단선철도에 의존했기에 다시금 기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기도 했다. 또, 미시시피의 그랜트는 빅스버그 공략에 나섰고 동부에서는 게티스버그 전투가 다가오는 상황이라 이곳에 지원을 집중시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북군의 다음 목표인 채터누가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계속 지체할 수도 없었다. 

테네시강변의 고지대에 위치한 채터누가는 주변 산악지대에 광석이 풍부해 남부의 전쟁수행에 중요한 철광석과 구리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는데다가 북쪽으로는 내쉬빌과 녹스빌, 남쪽으로는 애틀랜타로 통하는 철도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군 총사령부는 컴벌랜드 군에게 계속 공세를 요구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번사이드가 지휘하는 별도의 군으로 녹스빌을 공략해 이 지역에서 남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군의 브래그 장군도 툴라호마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며 넓은 방어선을 구축해 배후의 채터누가를 사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두차례에 걸쳐서 이길만한 전투를 실패하고 난 뒤, 휘하 장군들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4월 이후 북군은 기병대를 파견해 남군 배후의 보급선을 파괴하는 작전도 시도해보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로스크랜은 6월, 마침내 테네시 강을 넘어 채터누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바로 앞에 적을 두고 강을 건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로스크랜은 강의 상류지역으로 기병대를 파견해 남군이 관측할 수 없는 지역에서 교량을 만드는 것처럼 위장한 다음 실제로는 아래쪽에서 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남군의 방해없이 휘하 병력을 무사히 테네시강 너머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급선은 불안정했고 병력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었지만 북군이 강을 건너자 브래그는 북군과 싸우지 않고 휘하 병력을 후퇴시켰다.

툴라호마 전투


툴라호마 작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채터누가를 점령한 로스크랜은 남군 기병대에게 보급선을 위협받으면서도 여세를 몰아 브래그를 추격해서 조지아 주의 남군 보급선을 위협하려 했다. 8월 18일, 아직 보급 상태가 열악하고 휘하 병력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서 추격하기 어렵다는 토머스 군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추격을 명령한 로스크랜은 남군의 반격에 당황했다. 채터누가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남쪽에서 전열을 정비한 브래그는 북버지니아 군에게서 롱스트리트의 1개 군단을 지원받고 녹스빌을 방어하던 병력들을 포함해서 증원을 받자 바로 역공에 나선 상황에서 북군은 병력이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북군 선발대와 남군의 교전으로 시작된 치커모거 전투(1863.09.19~09.20.)에서 브래그는 토머스가 지휘하는 북군 좌익을 공격했다. 그런데 북군이 명령체계 혼란으로 증원병력을 이동시키는 와중에 전열에 큰 구멍이 발생하자 사태를 지켜보던 롱스트리트는 휘하 병력을 집중시켜 북군 우익을 강타해 대승을 거두었다. 후퇴명령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방어진지를 유지한 토머스 덕분에 북군은 포위섬멸되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전투는 서부전역에서 북군이 겪은 최대의 패배였다. 끝까지 용전분투해 다른 부대가 후퇴할 시간을 벌어준 토머스는 ‘채터누가의 바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패배를 당한 로스크랜은 공황상태에 빠져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채터누가 주변의 고지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북군은 보급선이 끊긴채로 도시에 고립되었다.

채터누가 작전


빅스버그에서 치커모거까지의 지도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북군 사령부는 즉각 빅스버그에서 병력을 휴식시키며 동진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랜트를 서부지역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채터누가의 캠벌랜드 군을 구원토록 했다. 10월 17일 애팔레치아 산맥 서쪽에서 미시시피강 동쪽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의 북군 전체를 총괄하게 된 그랜트는 스스로 채터누가로 이동하면서 그동안 캠벌랜드 군 사령관을 맡아오던 로스크랜을 휘하 토머스 군단장으로 교체하고 새로 보급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그와 함께 셔먼과 후커에게 즉각 증원군을 이끌고 채터누가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북군이 공세를 준비하는 동안 남군은 지휘관 사이의 알력다툼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건성으로 채터누가를 공격하고 있었다. 브래그는 툴라호마 전투에서의 지도력 부족을 이유로 그간 대립각을 세워오던 레오니다스 폴크를 해임하고 마찰을 빚고 있던 롱스트리트는 번사이드가 공략중인 녹스빌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휘권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남군은 열세인 병력이 더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셔먼이 강행군으로 휘하병력을 이끌고 채터누가에 도착하면서 북군은 채터누가를 훤히 바라다볼 수 있는 룩아웃 산과 미셔너리 능선에 포진하고 있는 남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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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터누가 전투

그랜트의 계획은 고지에 있는 남군 진지를 노려 후커와 셔먼에게 동시에 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1863년 11월 24일 시작된 채터누가 전투에서 후커는 룩아웃산을 점령했지만 북쪽에서 미셔너리 능선을 공격한 셔먼의 전진은 남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혀 돈좌되었다. 원래 계획대로 남군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그랜트는 중앙을 맡은 토머스에게 남군의 방어진지에 공격을 가해 셔먼에게 가해지고 있는 압력을 덜어주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처음에는 적극적인 공격계획이 아니었는데도 치커모거 전투의 패배로 인한 불명예를 극복하겠다는 열정에 휩싸인 토머스 군은 능선에 맹렬한 돌격을 감행해 (이 돌격의 선두에 섰던 것이 약관의 아더 맥아더 대위였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인 그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나중에 의회 무공훈장을 수상한다.)남군의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채터누가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국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페리빌과 스톤리버에 이어 또다시 패배를 당한 브래그를 해임하고 조셉 E. 존스턴 장군으로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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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10 22:45 신고 후커가 어떻게 록아웃마운틴을 쉽게 접수했는 지가 잘 이해가 안갔던 전투죠.

    토마스 군단의 정면 돌파는 제가 알기로는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세리단이 남군에 건배제의했는 데 남군이 포격으로 응대하자 화가 나서 '저 놈의 대포를 끌어내!'라고 소리쳐서 휘하 북군이 돌격하고, 다른 토마스 군단의 병사들도 엉겹결에 따라 돌격하고, 그러다가 일이 확대된 것입니다.

    처음 북군 공격이 시작될 때 그랜트는 토마스에게 엄청나게 화가 났었다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남군 패주가 되자 뭐라 말은 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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