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10. 동부전역 - h. 게티스버그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0. 동부전역 - h. 게티스버그

아르미셸 2009.07.07 17:14

우리가 언덕(리틀 라운드 탑)에 도달했을 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가득한 연기와 불길 너머로 보이는 물웅덩이에는 주인을 잃은 말과 싸우고, 도망치고, 쫓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기는 화약냄새로 가득하고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격선의 외침소리, 덜컥거리는 총소리, 포탄의 폭발음 그리고 부상자들의 비명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마치 밀턴의 실낙원에 나올 듯한 지옥의 모습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 북군 대위 포터 폴리

1863년 6월 로버트 E. 리는 챈슬러스빌의 승리를 발판으로 1862년의 전략을 따라 북부로 진격할 계획을 세운다. 북부로의 진격은 전쟁때문에 피폐해진 버지니아의 농부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북부의 사기를 위협하면서 펜실베니아의 주도인 해리스버그나 볼티모어, 메릴랜드 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할 수 있을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작년에 경험한 바로는 북부로 진격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로 충분한 지리정보와 주민들의 호응이 없는 북부로 공격했을때 남군이 지금까지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미시시피 강에 남은 남부의 유일한 거점인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북군에게 포위당해 함락직전인 상태는 큰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리는 빅스버그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보다 워싱턴을 직접 위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또 작년에 맥클랠런이 그렇게 정확히 자신의 작전을 꿰뚫어본 것이 실수로 작전계획서를 잃어버린 것 때문임을 알게된 것도 같은 전략을 반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제공했다.

북진에 앞서 리는 자신의 오른팔과 같던 잭슨이 죽음으로써 그동안 2개 군단으로 유지해오던 북 버지니아군의 지휘체계를 3개 군단 체제로 바꾸었다. 그동안 1군단장 직을 맡아오던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은 유임하고 잭슨 밑에서 사단장을 맡아오던 리처드 S. 이월과 A.P. 힐이 각기 군단장이 되었다. 이들을 지휘해서 리는 프레데릭스버그로부터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블루 리지 산맥으로 병력 이동을 은닉한 채 북부로 남군을 이동시켰다. 한편 포토맥 군의 사령관 조셉 후커는 리가 병력을 이동하자 기병대를 파견해 북 버지니아 군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파견된 북군 기병대는 6월 9일 브랜디 스테이션에서 젭 스튜어트의 남군 기병대를 공격해 남북전쟁중 최대규모의 기병간 전투가 벌였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이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스튜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활용해 북 버지니아군 사령부의 통제를 벗어나 북군의 동쪽을 우회해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장거리 기병활동을 개시했다.


게티스버그 작전도

후커는 포토맥군 전체를 지휘해 리의 추격에 나섰으나 챈슬러스빌에서 입은 자신감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하퍼스페리 수비문제로 북군 총사령관 할렉과 언쟁을 벌인 그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고 6월 28일 링컨은 후커를 대신해 5군단장 조지 G. 미드를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미드는 갑작스럽게 지휘관직을 맡아 당황했으며 남군의 3개 군단이 어디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남군의 진격속도에 맞추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기병대가 없는 리는 북군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으나 첩보원들을 통해 북군이 남군과 병행해서 추격해오고 있음을 알자 당황했다. 포토맥 강을 넘어 북진한 북버지니아 군은 이미 메릴랜드를 넘어 펜실베니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태로 리처드 이월은 서스퀘하나 강을 건너 해리스버그를 향하고 있었고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챔버스버그의 산악지역에 있었다. 북군의 위치와 의도등을 알려주어야 할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는 장거리 파괴활동을 하느라 사령부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리는 장님인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리는 전군이 각개격파되기 일단 캐쉬타운으로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6월 30일 캐쉬타운으로 이동한 힐군단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이 게티스버그에 접근했다가 북군 기병대와 조우하면서 예상치 않게 게티스버그가 남군과 북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게티스버그 (July 5?14)

게티스버그에 집결한 양군 병력 16만명이 3일간 벌인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알려지게 된다. 


게티스버그 1일차 작전도

7월 1일 아침 5시에 전초부대간의 교전에서는 남군의 헨리 히스 사단이 뷰포드가 이끄는 북군 기병대와 존 F. 레이놀드 1군단에게 격퇴되었지만 게티스버그 북쪽에 반원형 방어선을 구축한 북군 6군단과 1군단이 오후에 이월과 힐이 방어선의 측면을 공격당해 게티스버그 남쪽으로 후퇴했다. 남쪽의 세미터리 힐에 북군은 재차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리는 이월에게 ‘가능하면’ 세미터리 힐을 점령하도록 지시했으나 잭슨의 직설적인 명령법에 익숙한 이월은 피해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보다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동안 휘하 장군들의 자율성을 존중해 좋은 결과를 거두었던 리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전투 2일째와 3일째에 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결과를 낳아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


게티스버그 2일차 작전도

7월 2일 리는 북군 좌익과 우익에 맹공을 퍼부었다. 낚시바늘 모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북군은 리틀 라운드탑, 데빌스 덴, 휘트필드, 복숭아 과수원과 세메터리 힐 동편, 컬프스 힐에서 남군과 치열한 교전을 거듭했다. 원래 리는 좌익과 우익의 공격순서를 조율해 북군이 방어병력을 재배치 못하게 하려 했지만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전장에 없었던 관계로 불확실한 정보에 기인해서 세워진 작전이 되었다. 챈슬러스빌에서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앞두고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가 작전 전체를 망친 경험이 있는 북군의 시클스 군단은 세미터리 힐 남쪽의 방어구역을 벗어나 보다 방어에 유리한 서쪽의 리틀 라운드탑으로 전진하다가 롱스트리트에게 집중 공격을 당했다. 이 때문에 리틀 라운드탑을 둘러싸고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으며 시클스의 제3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미드가 보낸 예비전력의 도움으로 북군은 결국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게티스버그 3일차 작전도

7월 3일 리는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북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노력했으며 양군 포병이 맹렬한 포격을 교환한 다음 피켓이 3개 사단을 이끌고 북군 중앙부에 돌격을 시도했다. 이 돌격으로 북군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북군 증원부대가 재빨리 방어선의 빈틈을 매꾸면서 결국 3개 사단을 투입한 피켓 돌격은 실패했다. 이 시점에서야 스튜어트가 돌아와 북군 배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주전장 동쪽에서 북군 기병대와 교전을 벌이느라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다.


게티스버그 후퇴도.

양군은 7월 4일까지 게티스버그에 머물렀지만 결국 리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빅스버그를 북군이 점령하면서 전황은 미시시피 강을 제압당해 동서로 분단되어버린 남부에 결정적으로 불리해졌다. 미드는 후퇴하는 남군의 추격에 나섰으나 결국 리의 후퇴를 막지 못했고 1863년 가을 브리스토와 마인 런에서 시작된 두번의 공세에도 모두 패배하면서 게티스버그의 승리를 전쟁 전체의 승리로 확대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7월 14일 양군을 합쳐서 5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게티스버그 전역은 종결되었지만 사망자 매장등 사후처리는 4개월이 지나 링컨이 게티스버그 추모연설을 할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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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 프로필사진 성현도사 2009.07.07 19:19 신고 드디어 게티스버그까지 왔군요. 언제나 잘 보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
  • 프로필사진 성현도사 2009.07.08 19:04 신고 그쵸. 그래서 반가운 나머지 댓글을. 아는 게 나왔으므로. ^^;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09 00:32 신고 게티즈버그 첫날 전투만 규모와 사상자면에서 남북전쟁 전체 20번째 격전이라네요.

    하물며 그런 전투가 3일이나 계속되었으니, 역사를 뒤집겠다고 남군이 얼마나 처절했으며, 그들을 막겠다고 북군이 얼마나 처절했는 지 알 수 있죠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09 19:29 신고 첫날 이웰이 '세미터리 힐과 컬프스 힐을 점령하라' 는 명령을 받았을 당시 이웰은 컬프스 힐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 가능한 부대를 찾아 봤지만

    존슨 사단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얼리 사단은 격전으로 지쳤다고 하며 로저스 사단은 리가 '예비대'로 남기도록 직접 지시했다네요.


    흔히 이웰이 아닌 잭슨이었다면 어떻게든 했을 거라지만 저런 상황에서는 사실 이웰 쪽도 나름 할말 있지 않았나 싶네요.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10 20:29 신고 '포기' 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휘하 부대가 각자 공격할 여건이 안됬습니다. 한명은 너무 늦게 오고, 한명은 격전으로 지쳤고, 나머지 한명은 총사령관이 예비대로 지시했고요.

    결국 다음날과 그 다음날 컬프스 힐 전투는 늦게 온 존슨 사단을 중심으로 치뤄졌지만, 첫날에 이 부대를 투입하기에는 남북전쟁 전례상 야습이 거의 없었고, 이 부대가 도착할 당시에는 북군도 어느 정도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컬프스힐의 지형이 방자에게 유리했다는 점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10 20:38 신고 흔히 게티즈버그의 패배 책임으로 첫날 이웰이 컬프스힐과 세미터리힐을 점령하지 않은 점, 스튜어트가 전투 당시 북버지니아군과 합류하지 못한 점, 혹은 리의 전체적인 작전 미스나 롱스트리트의 소극적인 셋째날 공격 등을 들지만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3군단장 A.P 힐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전체적인 교전을 꺼린 리의 계획을 첫날 헤스 사단 공격을 방임하여 그르치게 한 점,

    둘쨰날 세미터리 리지를 향한 공격에서 라이트 여단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전무한 점,

    셋째날 공격에 있어 거의 무관심하게 방임한 점 등입니다.



    당시 힐이 아파서 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제 견해로는 제대로 묻혔지만 사실상 힐이 롱스트리트나 이웰 반만큼만 했어도 게티즈버그에서 남군은 훨씬 선전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이긴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10 22:39 신고 '가능하면 점령하라'는 명령 그대로 한다고 실제 점령이 가능한 지를 따져봐야 이웰의 책임이 문제되겠죠.

    흔히 잭슨이라면 점령했을 것이다. 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설령 잭슨이라 해도 존슨사단이 늦게 도착하는 상황에서 로저스 사단을 예비대로 돌리라는 리의 지시를 받은 상황에서, 그날 격전으로 녹초가 된 얼리 사단을 동원한다고 해서 컬프스 힐을 쉽게 접수했을 지는 미지수라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로저스 사단을 예비대로 남긴 이유는, 스튜어트의 부재로 북군의 배치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리가 다른 방향에서 북군 군단이 나타날 경우를 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든 여단도 북동쪽 길을 차단했고, 7월 2일 전투 당시에도 피켓 사단이 서쪽 길을 차단하고 있었지요.

    이미 어두어지는 전장에 북군 군단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어디서 나타날 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웰은 사실상 존슨 사단 외에는 동원할 부대가 없었고, 이 부대의 도착은 북군이 야전 축성을 구축하던 밤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온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보입니다만
  • 프로필사진 jagsjj 2009.08.12 19:13 신고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요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요.

    그러나 그 요행에 기대야 될 정도로 낮은 확률을 포기했다고 '패배의 첫번째 연결고리' 소리 듣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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