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9. 동부전역 - g.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스빌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9. 동부전역 - g.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스빌

아르미셸 2009.07.05 17:50

앤티텀에서 리의 북진을 막아내는 공로를 세웠음에도 맥클랠런이 리를 추격하기 보다는 재편성과 재정비에만 몰두하자 링컨은 1862년 11월 7일, 결국 그를 해임시키고 포토맥군 사령관직에 앰브로즈 번사이드를 임명한다. 앤티텀 전투에서 북군의 좌익을 맡았으나 돋보일만한 활약은 없던 번사이드는 장군으로서의 재능보다는 멋진 구렛나루와 후장식 총기 등 각종 무기개발 관련 능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편 리는 무리한 공세로 지쳐있는 북버지니아 군에 병력을 증원하고 재정비를 하며 북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두가지 있다. 첫번째는 언제나 가능한한 적을 착각시키고 기만해서 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보다 우세한 상황이 되어 공격할 때에는 힘이 남아있는 한 적군이 괴멸되기까지 추격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맹열히 추격하다보면 적은 당황하게 되고 그럴때는 절반의 병력만으로도 괴멸시킬 수 있다. 또 한가지는 승산없는 상황에서 일부라도 아군을 빼낼 수 있는 상황있다면 절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계속 승리를 거듭한다면 소규모 부대라도 능히 대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고 그렇게 승리를 반복하게 되면 무적의 군대가 된다.” ? 스톤월 잭슨

프레데릭스버그

링컨 행정부와 할렉 총사령관의 공격독촉을 받은 번사이드는 늦가을에 남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입안했고 11월 9일 할렉과 적전안을 검토했다. 번사이드가 세운 작전의 골자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육로를 통해 리치몬드로 접근하는 것으로 로버트 E. 리를 따돌리고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라파해넉 강을 건넌 다음 남군과 리치몬드 사이를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작전이 시작되자 계속해서 차질이 빚어졌다. 리의 북버지니아 군이 반응하는 것보다 먼저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작전상 기동속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강을 건너는데 필수적인 부교 도착이 계속 늦어졌다. 가을비로 라파해넉 강이 계속 불어나는 사이에 리는 남군을 집결시키고 프레데릭스버그 뒤편 고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다른 도하지점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번사이드는 결국 배후 고지에 위치한 강력한 북군 포병대의 지원사격을 믿고 남군 바로 앞에서 강을 건넌다는 대담한 작전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한다. 12월 11일 북군의 공병기사들은 6개의 부교를 설치했고 포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도강에 성공한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개략도.

프레데릭스버그를 약탈한 북군은 12월 13일 도시 후면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한 남군 우익의 작은 틈에 미드 사단이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기븐과 더블데이의 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미드 사단은 남군 우익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안개로 북군 포병의 지원이 어려웠던 데다가 주변 부대와 보조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 남군의 반격을 당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와 함께 마리예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북 버지니아 군 좌익에 후커와 섬너가 지휘하는 북군 6개 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병의 지원없이 좁은 통로를 통해 고지에 위치한 방어선에 돌격한다는, 이 지나치게 무리한 공격으로 북군은 6,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손실을 입으면서 작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날 하루동안의 작전으로 북군은 12,000명이나 되는 병력피해를 입었고 남군의 피해는 5,000명에 불과했다.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북부의 참패였다.


1862년 12월 13일 오후 1시 섬너의 돌격. 


1962년 12월 13일 오후 3시 30분. 후커의 돌격. 남군에 피켓이 증원되었다.

프레데릭스버그의 대패로 워싱턴은 좌절했지만 번사이드는 아직 지휘권을 유지했다. 프레데릭스버그 남쪽에서 공세를 재개하려고 했던 번사이드는 1963년 1월 전례없는 동계작전을 강행하던 중 3일간 계속된 겨울비 속의 ‘진흙 행군’으로 휘하 군단장과 격심한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때문에 번사이드는 자신이 사임하거나 휘하 군단장들을 모두 교체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워싱턴에 통보했고 결국 그를 대신해 조셉 후커 군단장이 포토맥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챈슬러스빌

스톤월 잭슨의 죽음

1863년 1월 26일 포토맥군 사령관이 된 후커는 그동안 군단급 지휘관으로 훌륭한 능력을 선보였다. 1863년 겨울 동안 패배로 좌절한 북군을 재조직하고 정비해 나가면서 후커는 장병들의 사기 증진과 건강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겨울이 지날 무렵 포토맥 군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병력을 증원받아 그야말로 정예군 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장비, 보급, 훈련 면에서 남군을 압도하고 있는데다가 병력면에서 북군은 남군과 5:2에 가까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북군 사령관들이 핑커튼 탐정단 같은 사설 정보조직에 첩보를 의뢰하고 있던 상황에서 새롭게 조직한 북군 정보국은 후커에게 남군의 열악한 보급상황과 절대적인 병력 우세 등등 다양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해진 후커는 공세적인 성향을 살려 1863년 봄 남군을 공격할 전략을 세워나간다.

겨우내 프레데릭스버그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온 남군을 앞에 두고 후커는 그동안 다양한 활약을 보여온 젭 스튜어트의 남군 기병대처럼 북군 기병대를 집중시켜 운용해서 남군의 보급선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그와 함께 대치상태에서 무리하게 강을 건너는 것보다 2배가 넘는 병력 우위를 살려 세드윅의 1개 군단은 프레데릭스버그에 남아 리의 주의를 끌고 나머지 부대가 은밀하게 기동해 리 뒤쪽으로 돌아가 측면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대치중인 리는 북군이 다른 지역에서 강을 건널 수 없게 하기 위해 가뜩이나 열세인 병력을 쪼개어 롱스트리트에게 병력 일부를 맡기고 사우스 버지니아까지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리는 57,000명의 병력으로 97,000에 달하는 북군을 상대해야 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전략은 나중에 남군에서도 그때까지의 북군 전략중 가장 탁월한 작전이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북군은 안개를 틈타 남군이 눈치채기 전에 상당한 거리를 우회했고 5월 1일 포토맥 군 주력이 라피단 강을 건너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기병대의 대부분이 후방교란에 동원되어 정보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과 경험이 부족한 신임 사령관의 잘못된 판단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었다. 버지니아 군의 리는 대치중인 세드윅 군단이 적극적인 공격이 아니라 양동작전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병력면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적을 앞에 두고 부대를 분할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챈슬러스빌로 급히 이동한 남군이 북군 일부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자 후커는 갑작스럽게 자신감을 상실하고 예정대로 공격해서 지금껏 전진한 지역 주변의 고지대를 점령하는 대신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리는 이 상황에서 재차 병력을 분할해 스톤월 잭슨에게 2만명의 병력을 주고 다시 우회 가동하여 북군 우익을 기습하도록 했다. 북군의 기병정찰 능력이 제한된 것 때문에 잭슨은 올리버 O. 하워드가 지휘하는 북군 6군단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조우전에서 북군이 교전없이 물러나는 바람에 고지대를 점령한 남군 포병대의 화력앞에 북군은 다시금 방어선을 후퇴시켜야 했다.


5월 1일과 2일 챈슬러스빌 주변의 상황. 시클스가 전진중에 후커의 명령으로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배후로 돌아온 잭슨은 와일더니스를 통해 하워드를 측면에서 기습해 북군을 몰아넣는데 성공. 그 와중에 스톤월 잭슨이 전사한다.

이제 주공을 맡은 포토맥군 주력은 방어에 묶였고 후커는 세드윅에게 강을 건너 공격을 나서도록 지시했지만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세드윅은 명령을 너무 늦게 받았다. 역시 기병대 부족으로 정찰이 어려웠던 세드윅은 강 건너편의 남군이 훨씬 더 규모가 방대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안개에 쌓인 강 너머에 있는 것은 얼리가 이끄는 1개 사단과 리가 만약을 대비해 남겨놓은 1개 연대 뿐이었다. 세드윅은 앰브로즈 번사이드가 그토록 원했지만 실패했던 프레데릭스버그의 마리예 고지 점령을 성공했으나 후커의 독촉으로 리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무리하게 서쪽으로 전진하던 중 후커가 방어선을 굳히는 것을 확인하고 주력을 돌린 북 버지니아 군에게 반격을 당했다. 서둘러 전진하느라 프레데릭스버그 주변의 진지도 점령하지 못한 세드윅은 큰 피해를 입고 도로 강을 건너가야 했고 이로써 후커의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5월 3일의 상황. 스튜어트가 잭슨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남군 좌익이 챈슬러스빌에서 북군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세드윅의 남군은 프레데릭스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지연작전에 말려들었다.


5월 4일의 상황. 다시 방어를 전환한 남군에게 세드윅도 포위됨.

5월 7일 결국 후커는 전군을 라파해넉 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리는 2배에 가까운 북군을 상대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군의 25%에 가까운 13,000명의 병력을 상실했다. 더 큰 손실은 자신의 휘하 장군 중 가장 공세적인 스톤월 잭슨이 북군 6군단을 공격하고 정찰하던 중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북군도 17,000명의 병력을 상실했지만 비율로 본다면 전 병력의 12%로 더 적은 피해였지만 실패한 작전이었다. 연이은 실패로, 특히 그동안 자신만만한 준비를 갖추었던 챈슬러스빌의 패전은 북부의 사기에 더욱 큰 상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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