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6. 동부전역 - d. 7일전투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6. 동부전역 - d. 7일전투

아르미셸 2009.07.01 17:04

“슬픔과 후회속에 빠져있을 수 없다. 남부는 조용한 결단과 냉정한 이성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두 위험을 각오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 매리 체스넛

7일 전투

리는 6월 23일 작전회의를 거쳐 휘하 북군을 버지니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휘하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조율했다. 치커호미니 강 북안에 방어선을 구축한 병력 3만의 북군 우익에 대해 롱스트리트, D.H.힐이 매카닉스 빌 전면에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는 중에 잭슨과 A.P. 힐이 비버 크리크로 기동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이어질 남군의 전략은 존스턴이 세운 계획과 유사할 정도로 복잡했고 리 휘하의 각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6월 26일 ~ 6월 27일의 전황도. 치커호미니 강 북안에 위치한 북군 우익에게 남군이 집중공격을 퍼부어 후퇴시키는 데 성공함.

6월 26일 남군은 매카닉스 빌에서 7일간 이어질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잭슨의 기동이 늦어지는 바람에 오후 3시 먼저 공세를 시작한 A.P. 힐은 북군 우익의 포터 군단과 2시간에 걸친 격전을 벌이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북군 우익은 방어진지를 포기했지만 포위되기 전에 후퇴했다. 이날의 전투는 북군의 전술적 승리였지만 포위를 우려한 맥클랠런이 포토맥군 전체를 동남쪽으로 후퇴시키면서 전략적 파국의 서막이 되었다.

주도권을 잡은 남군은 6월 27일 북군 우익을 추격해 다시 게인즈 밀에서 전투를 벌였다. 남북전쟁 중 남군이 시도한 최대규모의 공격이었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게인즈 밀을 사수하라는 명력을 받은 포터는 A.P. 힐과 롱스트리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좌익에 전개할 예정이던 잭슨의 도착이 또 다시 지연되어 북군은 각 방어선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오후 늦게서야 도착한 잭슨과 함께 일몰 이후에 남군 전체가 공격을 가하자 후드 준장의 택사스 여단이 북군전열 일부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6월 28일 오전 4시, 포터는 치커호미니 강을 넘어 후퇴하기 시작했고 맥클랠런은 그와 함께 피어오크스의 방어진지를 버리고 제임스 강까지 전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치커호미니 강 남안의 북군 진지는 견고했고 총 5개 군단중 포터의 1개 군단만으로도 남군에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잭슨의 계곡 작전으로 북군의 지원이 늦어지고 있기는 했으나 맥클랠런은 버지니아 군을 새롭게 파견해 지원하겠다는 육군성에 전보를 보내 ‘만일 내가 이 군대를 구한다 하더라도 워싱턴의 정치가들에게 감사하지 않겠다. 당신들은 이 군대를 희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비난하면서 스스로 패배를 자인한 것이다.

반도작전의 종말

포토맥군 전체가 제임스강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리의 남군이 북군을 추격함. 

6월 30일, 리는 후퇴중인 북군을 쫓아 화이트 오크 습지에서 다시 한번 총공격을 가했다. 이 전투에서 남군 3개 사단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공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잭슨이 또다시 부진한데다 롱스트리트가 병력을 분산시키는 바람에 북군이 제임스 강까지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지 못했다. 


맬번 힐 전투. 북군의 대포 250문 앞에 남군의 돌격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7월 1일, 남군은 마지막으로 맬번 힐에 밀집된 북군 방어선에 3개 사단을 투입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고지에 위치한 북군 포병의 화력앞에 남군은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아무런 소득없이 후퇴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다. - A.P.

이로써 7일 전투와 반도 작전은 끝을 맺었다. 북군 함대의 화력지원을 받는 한 제임스 강에 방어선을 구축한 북군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토맥 군은 이곳에서 8월까지 대기했으나 결국 링컨은 2차 불런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이들을 철수시킨다. 다시 이 지점까지 북군이 진출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급한 결정일 수도 있었으나 링컨은 맥클랠런에게 실망할대로 실망한 상태였다. 여전히 포토맥 군의 지휘관은 맥클랠런이었지만 1862년 7월 11일 링컨은 북군 총사령관 직에 맥클랠런 대신 헨리 W. 할렉 소장을 임명하고 앤티텀 전투까지 맥클랠런은 대기상태에 들어간다.

반도작전으로 남부와 북부가 치른 대가는 막대했다. 남부는 북 버지니아 군 9만 병력을 투입해 북군을 반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2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북부도 10만의 병력중 16,000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상륙작전에 들어간 비용 등을 고려하면 이 실패의 타격은 컸다. 버지니아 반도에 안전하게 상륙할 때만해도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 했지만 북부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전술적 공조 부족으로 인한 막대한 희생자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반도에 있는 북군의 위협을 덜어낸 리는 이제 북 버지니아와 매릴랜드 지역에서 북부에 공세를 취하려는 자신의 전략안을 실행할 기회를 잡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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