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4. 동부전역 - b. 계곡작전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4. 동부전역 - b. 계곡작전

아르미셸 2009.06.27 11:30

“철이 들때까지 나는 집에 걸린 로버트 E.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의 초상화를 성부와 성자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 조지 패튼.

스톤월 잭슨

1862년 봄이 되자 불런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은 빠르게 사라지고 남부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서부 전역의 도넬슨 요새와 실로에서 북군에게 연패를 당한데 이어 조지 B. 맥클랠런이 지휘하는 포토맥군은 날로 강성해지며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맥클랠런은 1861년 겨울 동안 북부 정치가들의 독전을 무시하고 남군과 싸우기 보다는 신생 포토맥군의 훈련을 강화하는데 전념했다. 워싱턴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센트레빌에 주둔중인 조셉 E. 존스턴 장군의 남군을 우려한 링컨은 수차례 남부에 공세로 나설 것을 요청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존스턴 군의 병력 규모를 과대평가한 맥클랠런은 직접 존스턴 군과 교전하기 보다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몬드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버지니아 반도에 해로를 이용해 접근한 다음 그곳에서 리치먼드를 공략하고 동시에 북방에서는 어빈 맥도웰 소장이, 나타니엘 P. 뱅크스 소장은 곡창지대인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접근한다는 전략은 맥클랠런의 뛰어난 구상력을 보여주는 웅대한 작전이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남부의 상황은 버지니아 군사학교 교수 출신의 스톤웰 잭슨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다. 불런 전투에서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얻은 잭슨은 공세에 나서기에는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민병대를 이끌고 병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뱅크스의 북군과 대치중이었다. 정치가 출신의 뱅크스 장군이 포토맥 강을 건너기 전에 잭슨은 겨울동안 기병대 지휘관 터너 애슈비 대령에게 체셔피크와 오하이오 운하,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철도등을 습격하도록 지시했다. 뱅크스는 2월말 남군 기병대를 쫓아내기 위해 포토맥강을 건너 운하와 철도 지역에 병력을 전개했으며 이 상황에서 잭슨은 존스턴 군의 좌익을 맡고 있었으나 3월에 매너사스를 떠나 컬페퍼로 존스턴이 후퇴하면서 윈체스터에 있는 잭슨은 고립되어버린 상태였다.

3월 12일 뱅크스가 남쪽으로 전진해 윈체스터를 점령하자 병력에서 밀리는 잭슨은 스트라스버그로 후퇴했다. 맥클랠런의 전략에 의하면 뱅크스는 잭슨을 섀넌도어 계곡에서 완전히 몰아낸 다음, 보다 워싱턴에 가까운 지점으로 철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맥클랠런은 3월 17일 뱅크스가 윈체스터를 출발해 남쪽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과 맞추어 버지니아 반도에 상륙했다.

잭슨은 현저한 병력차이 때문에 가능한한 교전을 피하되 뱅크스가 맥클랠런을 지원할 수 없도록 계속 붙잡아 두라는 어려운 명령을 존스턴에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뱅크스는 잭슨이 이미 섀넌도어 계곡을 떠났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고는 동쪽으로 전진해 워싱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막아야만 하는 잭슨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전을 결심한다.

1862년 3월 23일 북군은 컨스톤에서 남군과 전투를 벌여 잭슨의 섀넌도어 군 좌익에 역습을 가해 후퇴시켰다. 잭슨은 비록 전술적으로는 계곡작전 유일한 패배를 당했지만 링컨 대통령의 주의를 끌어 뱅크스의 군을 계곡에 잔류하게 하고 프레데릭스버그 주변에 주둔한 맥도웰의 3만 병력을 끌어내어 맥클랠런이 5만명의 병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전략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7,000명으로 병력이 증원된 잭슨은 계곡에 흩어져 있는 북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험난한 기동로를 선택한 잭슨은 5월 8일 맥도웰 군을 만나 치열한 격전 끝에 북군을 격파했다. 프레데릭스버그로 후퇴한 맥도웰의 군을 증원하기 위해 뱅크스는 1개 사단을 파견해 병력이 8,000명으로 감소하자 버지니아의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북군 방어선까지 후퇴했다.

5월 21일, 잭슨은 뉴마켓에 있는 사령부를 동부로 이동한 다음 북쪽으로 신속하게 전진했다. 작전중 보여준 엄청난 속도의 기동은 잭슨이 지휘하는 보병부대에 ‘잭슨의 도보기병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으며 북군을 각개격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잭슨은 기병을 북쪽으로 파견해 뱅크스가 잭슨의 의도가 스트라스버그를 공격하는데 있다고 기만하게 한 다음 주병력은 프론트 로얄에 있는 전초기지를 격파하고 다시 하퍼스 페리에 있는 뱅크스의 통신선을 파괴할 계획을 세우고 5월 23일, 프론트 로얄 전투에서 북군의 수비대를 기습해 쫓아내었다. 이 승리로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뱅크스는 윈체스터로 재차 후퇴하게 된다.

잭슨은 전과를 확대하고 싶었지만 추격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지쳐있었고 북군의 보급차를 약탈하느라 기동이 둔화된 나머지 되어 후퇴하는 북군을 쫓아가지 못했다. 기병대와 합류한 잭슨은 5월 25일 윈체스터에서 뱅크스의 군을 다시 격파해 포토맥강 너머로 쫓아내었다.

이렇게 되자 잭슨에게는 워싱턴을 공격할 의도나 그럴 역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링컨과 전쟁장관 에드윈 M. 스탠턴은 워싱턴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을 듯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잭슨을 패퇴시키는 일을 맥클랠런에 대한 지원보다 우선순위로 놓았다. 워싱턴은 맥도웰의 2만 병력으로 프론트 로얄을 탈환토록 하는 한편 프레몬트를 해리슨버그로 파견해 잭슨이 계곡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스트라스버그를 공략하게 했다. 리치몬드를 공격중이던 맥클랠런은 전체적인 공조가 붕괴되어 열세에 놓였다고 판단해 결과적으로는 반도전역 자체가 실패하는 원인을 만든다.

6월 2일 북군 2개 군단이 추격에 나서자 잭슨은 크로스 키와 포트 리퍼블릭에서 방서 프레몬트와 쉴즈의 병력을 8일과 9일에 연달아 격퇴했다. 북군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해 워싱턴을 방어하는 위치로 후퇴하자 잭슨도 섀넌도어를 빠져나가 버지니아에서 맥클랠런과 대치중인 로버트 E. 리 장군에게 합류했다.

연일 계속되는 격전으로 반도전역에서의 7일전투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지만 잭슨은 맥클랠런이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활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임무를 완수했다. 계곡작전의 성공으로 스톤월 잭슨은 남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기동과 기습을 활용한 작전의 교범과도 같은 대활약을 펼치며 잭슨의 계곡군은 48일 동안 1,040km를 주파하면서 17,000명의 병력으로 60,000명의 적을 각개격파하는 전과를 올리며 리 장군과 함께 남부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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