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8. 동부전역 - f. 앤티텀 전투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8. 동부전역 - f. 앤티텀 전투

아르미셸 2009.07.04 16:24

메릴랜드 작전(1862년 9월 3일부터 9월 15일까지)

1862년 초 북부는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날듯한 기세로 공세에 나섰지만 가을이 오자 상황은 뒤바뀌어 있었다. 북군은 워싱턴에 포위되는 신세였고 남군은 여름내내 이어진 공세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병력 손실이 막대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듯 했다. 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개전이래 계속 방어만 하던 상황에서 역으로 북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를 비롯한 북부 주들로 진출해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로를 끊는다면 워싱턴으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동시에 서부에서 북부가 누리고 있는 우세를 뒤엎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란과 포프의 약탈로 황폐해진 남부 버지니아 주의 농장과 달리 아직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북부의 농장에서 월동할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처럼 남부 내에서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북부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연말의 미연방 하원선거에도 영향을 주어 링컨을 협상무대로 끌어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잘 된다면 매릴랜드를 비롯한 남북 경계지역의 노예주에서도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리는 9월 7일 메릴랜드의 프레더릭에서 포토맥강을 도하해 펜실베니아의 해리스버그를 노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동부의 대도시들을 노린 북 버지니아 군의 침공소식은 북부를 혼란에 빠트렸고 링컨은 반도작전이후 지위가 불분명했던 조지 B. 맥클랠런을 워싱턴 주변 전군의 지휘관으로 복귀시키는 재빠른 조치를 취한다. 맥클랠런은 다시금 행정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해 북군을 빠르게 재조직하고 8만 7천명에 달하는 북군을 다시금 포토맥 군으로 통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남군에서는 북부 침공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거나 열악한 보급사정으로 북부에서의 원거리 작전 수행능력이 부족한 등의 문제들 때문에 북상할때 5만5천에 달하던 병력이 4만 5천으로 줄어들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리는 수가 줄어든 자신의 군을 나누어 여러가지 목표를 동시에 공격하게 했다.


메릴랜드 작전지도.

롱스트리트는 해거스타운으로 파견되었고 섀넌도어 계곡을 통한 리의 보급선을 지휘하고 있던 잭슨은 하퍼스 페리에 있는 북군 무기고를 점령토록 했다. 하퍼스 페리의 무기고는 대량의 총기가 보관되어 있었지만 방어병력은 부족하고 주변 지형상 3면이 감제고지로 둘러쌓여 있어서 방어하기가 어려워 남군에게 유혹적인 목표물이었다. 이 떄문에 맥클랠런은 하퍼스 페리의 방어병력을 자신의 군에 합류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북군 총사령관 할렉은 요청을 기각했다. 결국 지원없이 하퍼스 페리를 방어하던 북군은 고지대를 점령하고 포격을 시작한 잭슨에게 쉽게 패했다. 잭슨은 간단하게 저항을 분쇄하고 9월 15일 12,000명이 넘는 방어병력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대량의 보급품과 총기등을 노획했다.


하퍼스 페리 작전.

맥클랠런은 포토맥군을 이끌고 천천히 리를 뒤쫓아 9월 13일, 프레데릭에 도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2명의 북군 병사가 시가 종이에 쌓여 있는 리의 작전안(명령 191호) 전체 사본을 발견하면서 상황은 긴박해졌다. 명령서에는 리가 지리적으로 떨어진 목표물들을 공략하느라 군을 분산시켜두었다는 것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맥클랠런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기뻐했지만 또 다시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첫 부대를 움직이기까지는 18시간이나 걸렸으며 남부 동조자를 통해 맥클랠런이 작전서를 입수한 것을 알게된 리는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하퍼스 페리의 잭슨도 리와 조속히 합류하기 위해 A.P. 힐 사단에 점령작업을 맡긴채 집결지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포토맥 군은 14일 밤 사우스 마운틴에 있는 북버지니아 군의 후퇴로에 공격을 가해 통로 셋을 모두 점령한다. 이로써 리는 병력이 분산된 상태로 중요한 거점마저 상실해 휘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며 북군에게 완전히 열세에 놓여 무사히 후퇴하는 것도 벅찬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맥클랠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리는 그냥 퇴각하기 보다는 잭슨과 합류해 메릴랜드의 샤프스버그에서 북군을 맞아 싸우기로 한다.

앤티텀

9월 16일 맥클랠런은 샤프스버그 근처의 안티텀 크리크 서쪽에서 리와 마주한다. 앞에 개울이 흐르는 언덕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방어에 유리하긴 했지만 우회 기동할 공간이 부족했고 배후에는 포토맥강이 흐르는 이른바 ‘배수의 진’이었다. 


앤티텀 작전도.

북군이 도착했을 때 수적으로 3배에 달하는 우위에 있었으나 남군의 다른 부대들이 위치가 불명해 배후의 위협을 우려한 맥클랠런은 공격을 하루 늦췄다. 이런 지연 덕분에 남군은 방어진지를 강화할 시간을 얻었으며 롱스트리트와 잭슨의 군이 무사히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아침 5시 30분 부터 7시 30분까지. 북군이 남군 좌익과 옥수수밭을 사이에 두고 전투개시


아침 7시 30분부터 9시까지. 북군의 공격으로 남군 방어선 일부가 뚫림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롱스트리트가 증원해서 양군이 혼전상태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 까지. 번사이드의 도섭작전.

9월 17일 새벽녘에 북군의 조셉 후커 군단이 남군 좌익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안티텀 전투가 시작되었다. 맥클랠런은 전체적인 작전을 명확히 하지 않아 각 지휘관들이 연계하지 못한채 좌익과 우익 공격이 모두 별개로 이루어졌다. 오전에는 좌익의 후커 군단이 맹공을 개시했다. 덩커 교회 근처의 밀러 옥수수밭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사격하는 가운데 성큰로드를 따라 이루어진 북군의 돌격은 남군의 방어선 일부를 돌파했으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번사이드의 군단이 안티텀 크리크의 석교를 지나 남군의 우익에 공격을 개시했다. 도섭지점을 놓고 혈전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착한 A.P. 힐 사단이 반격에 나서 북군은 격퇴되었다.

링컨과 맥클랠런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과 북군의 전력차이는 거의 2:1에 달했지만 맥클랠런은 최후까지 1/3 이상에 달하는 2개군단 5만여 병력을 전혀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리는 좌익과 우익을 차례로 공격한 북군에게 전군으로 대응해 전열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는 오후 5시 30분에 끝났으나 이날 하루동안 23,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북군은 총병력의 25%를 남군은 31%를 상실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리는 부상자를 교환한 다음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북 버지니아 군에게 포토맥강을 건너 섀넌도어 계곡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써 리의 메릴랜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앤티텀 전투는 전술적으로 무승부였지만 남군의 침공을 막아내었다는 점을 이용해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함으로써 유럽 열강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게 함으로써 북부는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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