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11. 서부전역 - a. 샤일로 전투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1. 서부전역 - a. 샤일로 전투

아르미셸 2009.07.08 20:55

작전지역

서부전역의 무대는 지형적으로는 미시시피 강 동쪽과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사이로 한정되지만 작전적 의미에서는 멕시코만 연안지역이나 동부 연안지역 일부도 포함된다. 전쟁 중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테네시의 채터누가에서 부터 대서양까지 진군한 1964년부터는 전역의 의미가 조지아 주와 캐롤라이나까지 확대되었다.


남부전역

서부전역은 동부전역에 비교해볼때 당대에나 후대에나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부전역에는 양측의 수도가 위치해있고 주요 신문사들이 동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기자들이 취재하기 좋았던 데다가 로버트 E. 리나 스톤월 잭슨 같은 유명한 장군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맥클랠런의 반도작전 중 북군은 서부전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으나 7일전투의 패배는 서부에서 북부가 거둔 승리의 빛을 가리기 충분했다. 주목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서부전역에서 북군은 거의 연전연승을 거두며 남부를 잠식했고 남부는 서부전역에서 열세인 자원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방어하느라 어려움을 겪었으며 몇차례 무승부를 거두거나 전술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어도 전략적으로는 계속 열세에 놓여있었다. 북부는 이곳에서 해운능력의 우위를 살려 남부의 중심 농업생산지에 흐르는 하천을 장악해 다양한 접근로에서 공격해나갈 수 있었으며 각 하천의 통제권 확보가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되었다. 특히 윈필드 스콧 장군이 수립한 아나콘다 계획의 핵심목표였던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 확보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버지니아 전선은 훨씬 더 중요한 전역입니다.  ... 비록 전쟁의 윤곽이 그곳에서 결정되지는 않겠지만 애팔래치아 산맥에서부터 미시시피까지 광활하게 펼쳐져있는 이곳 서부에서는 진정으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스테판 E. 우드워드, 제퍼슨 데이비스와 남부 장군들에게

저명한 군사학자 J.F.C. 풀러는 서부전역을 남북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묘사한다. 켄터키에서 시작된 북군의 왼쪽 바퀴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행하면서 동쪽으로 테네시, 조지아, 캐롤라이나까지 나아가는 동안 남부는 치카모가 전투나 게릴라 작전, 기병대의 과감한 기습작전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4년 동안 계속 패퇴를 거듭했다. 이 전역에서 그랜트, 토머스, 셔먼, 셰리단 등 북군의 가장 뛰어난 장군들이 배출되었고 남군의 기병사령관 네이턴 베드포드 포레스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북군지휘관이 자질면에서 우수했다.

초기 작전(1861년 6월 ? 1862년 1월)

남북전쟁 초기 서부전역의 초점은 미주리와 켄터키를 북부가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경계주 지역의 충성심을 장악할 필요가 있던 북부는 나타니엘 리온 대위가 6월 분빌에서 거둔 성공에 힘입어 미주리를 초기에 확보할 수 있었다. 켄터키는 친남부 성향의 주정부와 친북부 성향의 주의회으로 갈라져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9월 3일 남군의 레오니다스 폴크 소장이 미시시피 하류의 관문인 컬럼버스를 점령하고 2일 후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렌트 준장이 남다른 결행력으로 파두카를 점령하면서 켄터키의 중립은 위기를 맞았다. 남부와 북부는 이후 켄터키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작전을 수행했으나 공식적으로 켄터키가 남부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북부에는 유리한 전개였다.

아칸서스에서 캠벌랜드 협곡까지의 남군 지휘를 담당한 것은 알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으로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광범위한 지역을 방어해야하는 어려운 임무가 있었다. 다만 존스턴은 이 지역의 철도와 전신체계를 잘 활용해 병력을 적재적소에 신속히 투입할 수 있었으며 폴크와 윌리엄 J. 하디 등 유능한 인재의 조력을 받고 있었다. 또 러셀빌 회의를 통해 켄터키 등 중서부 지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정치적인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던 것도 중요한 도움으로 남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켄터키 중서부는 1861년 12월 남부에 편입되었다. 모빌-오하이오 철도를 이용해서 폴크는 신속하게 컬럼버스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한편 서부지역의 북군 지휘부는 11월까지 3개의 개별적인 군관구로 분리되어 통일된 지휘부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켄사스 군관구는 데이비드 헌터 소장의 지휘하에 있었고 미주리 군관구는 헨리 W. 할렉 소장 지휘하에, 나중에 윌리엄 T. 셔먼이 지휘하게 되는 오하이오 군관구는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의 지휘하에 있었다. 1862년 1월, 각군관구는 전략안을 논의했지만 모두가 합의할만한 전략안을 도출하지 못한채 개별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친남부 성향의 동 테네시 지역을 점령하라는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던 뷰엘은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으나 내쉬빌 방향으로 서서히 전진하면서 조지 H. 토마스 준장 지휘하에 밀스 스프링스를 공격했다가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에는 중요한 승리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이곳은 캠벌랜드 협곡과 동 테네시간의 통로가 되어 전략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승리였다. 한편 세인트 루이스에 주둔하고 있는 할렉의 군관구에서는 그랜트가 계속 테네시 지역으로의 전진을 주장했다. 1862년 2월 1일, 그랜트의 계속되는 요청으로 할렉은 다른 군관구와의 협조없이 테네시강의 헨리 요새에 대한 공격을 승인한다.

테네시, 컴벌랜드, 미시시피 강. (February ~ June 1862)


샤일로 전투까지의 전황도(Shiloh는 평화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랜트는 2월 2일 테네시강의 수로를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헨리 요새까지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범람원위에 위치한 헨리 요새는 지대가 낮았기 때문에 앤드류 H. 푸트가 지휘하는 북군포함의 포격에 취약했고 켄터키 주의 중립선언 때문에 보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없었던 남군의 요새 지휘관 로이드 틸만 준장은 남군은 2월 5일 대부분의 방어병력을 18km떨어진 도넬슨 요새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북군은 테네시 강의 통제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북군의 점령지역에서 그랜트의 부대만이 단독으로 돌출되어 불안정한 상태였다. 남군이 후퇴한 도넬슨 요새는 컴벌랜드 강변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헨리 요새보다 방어시설이 우수해 포함이 공격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랜트가 지휘하는 북군은 틸만의 이동로를 따라 육로로 이동해 배후에서 요새를 공격했으나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존스턴은 존 B. 플로이드 준장의 지휘하에 구원병력을 파견했으며 2월 15일 북군의 우측면을 공격해 맥클러넌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요새주둔군 전체가 빠져나갈 돌파구를 만드는데에는 실패했다. 그랜트는 선수를 빼앗겼지만 남군 지휘관들이 망설이는 틈을 이용해 곧 방어선을 회복하고 구원병력을 효과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결국 요새주둔군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이먼 B. 버크너 준장이 지휘하는 도넬슨 요새 주둔군운 그랜트의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요구에 따라 11,500명의 병력과 대규모의 소총, 물자등과 함께 북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북군은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 개전이래 처음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었고 테네시로 통하는 길목인 컴벌랜드 강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 승리는 그랜트가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어 1계급 승진하게 된다.

존스턴이 구축한 남군의 방어선은 돌파되었고 콜롬부스를 점령하고 있던 레오니다스 폴크도 도넬슨 요새의 함락과 함께 후퇴했다. 이는 그동안 남군이 측면지원을 하는데 이용하던 멤피스-오하이오 간 철도망의 차단을 의미했다. 이로써 존스턴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2월 이후 동부에서 P.G.T. 보우리가드가 서부로 이동해 존스턴에게서 미시시피강에서 테네시강 사이의 모든 남군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보우리가드는 미시시피의 코린토에 위치한 넓은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켜 공세로 전환할 계획을 세웠고 테네시의 머프리스보로에 주둔중이던 존스턴도 3월말 합류했다.

그와 대치중인 북군은 여전히 작전지휘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할렉은 북군 총사령관 조지 B. 맥클랠런과 주도권 싸움을 하느라 자신이 상대중인 남군이 분열되면서 각개격파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내쉬빌에 주둔중인 경쟁자 뷰엘과의 연합작전도 계속 차질을 빚고 있어서 그랜트는 뷰엘의 협조없이 단독으로 테네시강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3월 11일 링컨은 할렉을 미주리에서 테네시의 녹스빌에 이르는 지역의 북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뷰엘이 사일로 부근의 피츠버그랜딩에 주둔중인 그랜트와 합류하게 되었다. 피츠버그랜딩은 강을 배후에 등지고 있는 지역으로 후퇴하기에는 좋은 지형이 못되었지만 넓은 분지지형 덕분에 군대가 주둔하기에는 유리했다.

4월 5일 새벽, 보우리가드와 존스턴이 지휘하는 남군은 피츠버그 랜딩에 있는 그랜트의 서 테네시군을 기습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사일로의 전투에서 남군은 첫날 그랜트를 일방적으로 난타해 승리를 목전에 두었지만 북군은 방어지형에서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했다. 첫날의 전투로 당시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최고의 지휘관으로 신뢰를 받고있던 존스턴이 사망하자 보우리가드가 지휘권을 장악하고 다시금 북군을 공격했으나 결국 4월 7일, 뷰엘의 증원을 받은 그랜트는 반격을 가해 남군을 후퇴시켰다. 그랜트는 비록 샤일로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부대는 괴멸직전에 있었고 그때까지 미국이 경험한 모든 전쟁에서 발생한 것보다 많은 24,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도 후퇴하는 남군을 추격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랜트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전투로 미시시피 강에 대한 북군의 통제권은 보다 강화되었고 4월 7일 존 포프 소장의 북군은 10번섬에 고립된 보우리가드의 남군을 패배시키면서 멤피스 남쪽까지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확보한다. 5월 18일에는 북부 해군의 데이비드 패러거트 제독이 남부최대의 항구인 뉴올리언즈를 별다를 피해없이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북부는 점점 더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으며 남부는 할렉이 직접 지휘하는 북군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할렉은 뷰엘의 오하이오 군과 그랜트의 서 테네시군, 포프의 미시시피 군이 모두 피츠버그 랜딩에 합류하기까지 기다린 데다가 사일로에서 겨우 32km떨어진 코린스까지 이동하는데 무려 4주나 걸릴 정도로 느리게 전진했다. 밤이되면 참호를 파고 낮에는 엄폐물을 구축하는 느린 진군 때문에 이 작전은 코린스 포위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할렉이 코린스에 도착했을때 보우리가드는 불필요하게 저항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게되었다.

한편 그랜트는 할렉과의 불화와 사일로 전투에서의 지휘력 문제로 코린스 작전에서 직접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렉은 휘하 병력을 재조직하면서 그랜트를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좌천시킨 상황이었다. 할렉이 맥클랠런을 대신해 총사령관 직을 맡기 위해 동부로 이동한 뒤에야 그랜트는 다시 야전 지휘권을 회복했지만 이미 뷰엘은 채터누가에 파견되어 있었고 셔먼은 멤피스에 있었으며 1개 사단은 아칸사스에, 그리고 포프는 코린스 남쪽에서 방어 임무를 맡는 상태라 남부 야전군을 추격할 기회는 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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