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5. 서부전역 - e. 애틀랜타 작전

빅스버그와 채터누가에서 거둔 승리로 그랜트는 1864년 3월,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이어 미국 역사상 두번째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랜트는 북군 최고 사령관직 취임을 위해 동부로 떠나면서 후임 미시시피 집단군 사령관에 오랜 친구 셔먼을 임명했다. 휘하의 군 사령관 중에서 능력이나 전공으로 가장 우수했던 것은 캠벌랜드 군의 토머스였지만 그에게는 그랜트의 신뢰가 없었다. 16개로 분산되어 있던 북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 시킨 그랜트는 여러방면에서 일제히 공격에 나서 남부가 내선의 이점을 이용할 수 없게 하려는 했다. 스스로는 미드, 버틀러, 시겔을 지휘해 섀넌도어 계곡과 리치몬드를 노리고 리의 북버지니아 군을 상대하는 한편, 나타니엘 뱅크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에 남은 남부의 유일한 항구 모빌을 공략하고 셔먼은 애틀랜타로 진격해 존스턴의 군을 격파하는 동시 다발적인 공격안이었다.

미시시피 강과 채터누가를 잃은 남부는 더 이상 장기적인 항전을 수행할 수 없었고 링컨의 노예해방과 리의 북진 실패로 영국이 남부편을 들어 참전할 희망도 잃은 상태였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186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동안 수년간에 걸친 전쟁의 피해로 지쳐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공공연히 전쟁을 그만두고 남부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 희망이었다. 몇번만 결정적인 방어전을 성공한다면 북부에서 반전여론을 확산시켜 민주당이 대선에서 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부는 저항을 그만둘 수 없었고 공화당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대통령 선거 중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거나 남부의 중요 도시를 함락해 유권자들에게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어야 했다. 링컨은 50만명을 징집해 그랜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북부의 1864년 공세는 대부분 실패했다. 시겔은 섀넌도어에서 패배했고 뱅크스는 레드 리버에 묶여있었으며 미드와 그랜트는 리를 계속 후퇴시키고 있기는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셔먼이 지휘하는 애틀랜타 작전만은 보다 성공적이었고 앞으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남부의 전쟁의지’를 꺽어버리는 열쇠가 된다.

애틀랜타 작전

1864년 셔먼의 미시시피 집단군은 3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셔먼이 그랜트 휘하에서 지휘하던 테네시 군은 그랜트의 수석공병장교 출신인 제임스 B. 맥퍼슨이, 오하이오 군은 존 M. 스코필드가 지휘하고 있었으며 컴벌랜드 군은 조지 H. 토머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토머스를 제외하고는 군단장 급의 지휘경력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이런 지휘계통의 문제점은 새로 조셉 E. 존스턴이 지휘를 맡은 남부의 테네시 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셔먼은 존스턴에게 98.000대 50,000으로 두배에 가까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셔먼은 일부 병력을 휴가보낸 상황이고 존스턴은 앨라배마에서 15,000명의 증원군을 보충받은 상태였다.

1864년 5월과 6월 수차례의 교전을 통해서 셔먼이 존스턴을 남동쪽의 산악지대로 후퇴시키며 애틀랜타 작전이 시작되었다. 셔먼은 존스턴이 구축한 방어진지에 정면 돌격을 회피하고 방어선을 따라 측면으로 이동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측면을 돌파할 때마다 존스턴은 후방에 준비된 다른 방어진지로 후퇴하기를 반복했으나 6월 27일의 케인쇼 산 전투에서는 예외적으로 셔먼이 정면돌격을 감행했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양군은 보급선을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고 존스턴은 애틀랜타로 후퇴할 수록 보급선이 가까워지는 반면에 셔먼은 길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존스턴은 계속 지연전을 펼치며 북부의 보급선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후퇴로 남부가 안아야할 정치적인 부담은 커져만 갔고, 6월 20일에 존스턴이 애틀랜타 외곽까지 후퇴하자 마침내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작전중인 상황에서 보다 공격적인 존 벨 후드로 지휘관을 교체했다. 하지만 후드가 애틀랜타 주변에 수주간에 걸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도 병력이 우위에 있는 셔먼에게 평지로 나와 공격을 감행하면서 이 사령관 교체는 최악의 결과를 맺었다. 북부의 보급선을 노리고 공세에 나선 후드를 상대로 고전하기는 했지만 병력의 우위에 있는 셔먼은 기병대를 남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후드는 9월 1일 밤 애틀랜타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와 함께 애틀랜타에 집적되어 있던 보급품에 불을 지르자 곧 도시 전체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애틀랜타는 폐허로 변한다.


애틀랜타 작전

애틀랜타에서 셔먼이 승리를 거둔 것과 유사한 시기에 해군의 페러거트 제독이 8월 24일의 모빌 만 해전에서 결정적은 승리를 거두면서 북부는 미시시피 만을 포함해 남부 전역의 해안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1865년까지도 모빌 항구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이 두번의 승리는 북군이 사기를 회복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 결국 링컨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맥클랠런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다.

프랭클린-내쉬빌


셔먼이 부대를 휴식시키면서 동부로 공세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후드는 채터누가에서 이어지는 북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했다. 앨러배마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북쪽의 테네시로 전진하면서 후드는 셔먼이 본대를 이끌고 자신을 추격한다면 조지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셔먼은 토머스의 캠벌랜드 군 만을 내쉬빌로 보내 후드를 막게 하면서 본대는 조지아의 서배너로 전진했다. 네이던 베드포드 포레스트의 기병대 공격과 후드의 기동이 셔먼의 주의를 끌기는 했지만 후드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않고서는 셔먼을 막을 수 없었다. 토머스는 군을 나누어 절반은 내쉬빌에 주둔하고 존 M. 스코필드 지휘하의 나머지 병력 절반은 애틀랜타에서 남군 추격에 나섰다. 후드는 스코필드 군에게 병력을 집중시켜 북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11월 29일의 스프링 힐 전투에서 결사적인 공격을 시작했지만 북군은 이미 방어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그 이튿날의 프랭클린 전투에서 후드는 북군의 진지에 정면으로 돌격을 감행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로써 치명타를 입은 테네시 군이었지만 후드는 여기서 후퇴할 경우 이미 사기가 떨어진 남군이 완전히 해체될 것을 우려해 다시 내쉬빌로 전진했다. 12월 15일부터 내쉬빌에서 스코필드와 토머스가 합류한 북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갔지만 테네시 군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동안 애팔래치아 서부의 산악지대에서 동계작전을 시도했던 적은 없었지만 반복되는 독촉에 시달리던 토머스는 약 2주후 후드에게 정면돌격을 감행해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테네시 군은 미시시피로 물러났고 후드는 사임했다. 존스턴이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했지만 그렇다고 군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서부전역 작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