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3. 동부전역 - a. 불런전투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3. 동부전역 - a. 불런전투

아르미셸 2009.06.25 11:25

동부전역

남북전쟁에서 동부전역은 버지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메릴랜드, 펜실베니아, 워싱턴을 비롯해 노스 캐롤라이나의 요새지역을 무대로 북군과 남군이 격전을 벌인 전장을 말한다.

남부를 패배시키는데 전략적인 면에서 중요했던 것은 서부전역이었지만 1865년 리 장군이 애포마톡스에서 항복하기 까지 남부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동부가 상징적인 면에서 중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양측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인구밀집지역에서 일어난 동부전역의 전투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게티스버그는 남북전쟁을 대표하는 전투로 전쟁사에서 남기도 했다.

애팔래치아 산맥과 대서양으로 둘러쌓여있는 미국 동부의 넓이는 광활하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워싱턴과 리치몬드 사이의 100마일 정도 사이를 두고 벌어졌으며, 이곳의 지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여러 강들 때문에 통신이나 접근면에서 북군보다 방어하는 남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북군은 보급을 주요 도로에만 의지해야 했고 겨울에는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으나 제해권을 확보하고 주요 하천의 통제권을 장악한 해군 덕분에 해안 지역에서는 보급과 병력증원에서 유리했다.

남군의 주력인 북버지니아 군은 열세인 상황에서도 로버트 E. 리 장군의 탁월한 지휘력에 힘입어 북부의 포토맥 군을 연파하며 영웅적인 분투를 벌였고 북부는 그에 맞설만한 지휘관을 찾느라 내내 고심해야 했다. 동부전역의 전투는 1차대전의 서부전선처럼 양군이 화력을 밀집시켰기 때문에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전투(게티스버그)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앤티텀)도 동부전역에서 일어났을 정도로 전체적인 규모와 피해가 컸다. 또, 워싱턴과 리치몬드는 모두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을 정도로 양측은 밀고밀리는 접전을 벌였다.

1861년 초기 작전

1861년 4월 섬터 요새가 함락된 이후 양측은 급격하게 군을 모집했다. 애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반란군 진압을 이유로 총 75,000명 규모의 지원병을 각 주에 요청했으나 버지니아를 비롯한 4개주는 이에 반발해 연방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미군은 16,000명에 불과하고 그 중 절반은 서부에 전개되어 있었다. 미군을 떠나 남군에 가담한 장교나 병사의 수는 소수에 불과해서 남군은 각주가 별도로 부대를 조직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남군은 계속 각주가 개별적으로 통제했기에 전쟁내내 집중적으로 부대를 운용할 수 없다는 약점을 안고 가야했다.

남북전쟁 최초의 교전은 버지니아 서부에서 일어났다. 오하이오 관구의 지휘관이 된 조지 B. 맥클랠런 소장은 그래프톤으로 전진해 조지 A. 포터필드 대령이 지휘하는 남군을 공격해 1861년 6월 3일에 필리피에서 전투를 벌였다. 중요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이 승리로 맥클랠런은 북군의 영웅이 되었으며 연방의 주력인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영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로버트 E. 리 장군은 리치 산 주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후퇴를 거듭하면서 미군에서 복무중에 높은 기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전지휘 경험이 없었던 것 때문에 ‘할머니 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고 캐롤라이나로 전출되어 방어보강 공사를 맡게 되었다.

6월 10일 버지니아 동부에서는 벤자민 버틀러 소장이 지휘하는 포트 몬로 주둔군이 햄튼 수로와 뉴포트에서 남군 전초기지를 공격해서 남북전쟁 최초로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존 B. 매그루더 대령은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남군 지휘관이 되었다.

1차 불런 전투

1861년 초 워싱턴 주변의 북군 야전사령관은 어빈 맥도웰 준장으로, 지휘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더더욱 경험이 부족한 상태였다. 휘하 병력 대부분이 90일만 복부하기로 계약하고 있었으며 그 계약일도 곧 끝나가는 상황에서 맥도웰은 북부의 정치가들과 언론이 ‘리치몬드로!’라는 구호아래 즉각 공세에 나서라는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 밀려 성급하게 공세에 나섰다. 맥도웰은 3만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매너사스를 방어하는 P.G.T. 보우리가드 소장 휘하의 남군 2만명을 공격하면서 섀넌도어 지역에 주둔중인 조셉 E. 존스턴 휘하의 남군 12,000명은 하퍼스 페리에 주둔중인 패터슨 소장의 북군 18,000명이 견재하게 해 이 지역의 남군 주력 부대들이 합류하지 못하게 하고 리치몬드를 노리기 위한 교통의 요지가 되는 매나서스 교차점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7월 21일 맥도웰의 북 버지니아 군은 보우리가드의 남군을 맞아 불런에서 공세를 펼쳤으며 북군이 병력의 우위를 이용해 남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았지만 오후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토머스 J. 잭슨 대령이 지휘하는 버지니아 여단이 북군의 공셀를 막아서면서 ‘스톤월’ 잭슨이라는 별명을 얻는 등 보우리가드의 남군이 큰 피해를 무릅쓰고 북군의 진격을 막는 도중에 존스턴이 북군의 견재를 피해 기차를 이용해 결정적인 상황에서 증원을 오자 북군은 소모전 끝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불런전투 당시 전역 지도. 프레데릭스버그는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를 노리는 관문이고 매나사스는 워싱턴에서 전진하는 북군을 견재하고 섀넌도어 계곡과의 연결로를 확보하는 요지였다.


7월18일의 상황. 맥도웰이 이끄는 북군이 보우리가드의 남군에게 접근해온다. 남군은 불런강을 끼고 방어선을 펼쳤다.


7월21일의 상황. 북군의 주공이 서부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전장에 도착한 존스턴이 좌익으로 병력을 보내어 매튜힐의 헨리하우스를 놓고 남군과 북군이 소모전을 벌이게 된다.


7월21일 오후 2시. 남군의 증원병력이 도착해 무너져가던 방어선이 보강되었다.


7월21일 오후 4시. 남군이 공세에 나서 북군을 격퇴함.

경험이 부족한 북군은 후퇴중 패닉상태에 빠져 워싱턴에서 재미삼아 전쟁을 구경하러온 민간인이나 정치가들과 함께 한덩어리가 되어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보우리가드의 군이 너무 지쳐있고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추격해서 전과를 확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불런에서 겪은 북군의 패배는 남부를 얕잡아 보고 있던 북부에 큰 충격을 주었고 더 많은 병력이 희생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서부전역에서 맥클랠런이 소환되어 맥도웰을 대신해 패배로 엉망이 된 북군의 규율을 잡고 동부전역에서 북군의 주력이 될, 포토맥 군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철도회사에서 중역으로 활약했던 만큼 그는 조직구축과 훈련과 관리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북군을 어중이 떠중이의 집합체에서 훈련된 군대로 만들어 내었다. 제2의 나폴레옹이 되고 싶어할 정도로 야심이 강했던 그는 10월에 포토맥강의 벌 블럽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11월 1일에 윈필드 스콧을 대신해 북군총사령관 직을 맡는다.

노스 캐롤라이나 해안(1861 ~ 65)

노스 캐롤라이나는 남부가 북군의 봉쇄망을 벗어나 외부와 무역을 하기위해 중요한 아우터 뱅크스 항이 위치하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1861년 8월 벤자민 버틀러가 이끄는 북부의 포트 먼로 군은 하터라스 인렛에 있는 포대를 점령했으며 1862년 2월에 앰브로즈 번사이드 소장이 포트 먼로에서 상륙부대를 파견해 로아노크 섬을 점령한 것은 당장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북부가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62년 말 북군은 골즈보로에서 해안가의 철로와 교량들을 파괴해 남부의 수송체계를 마비시키는 데 성공한다.

1864년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작전을 재개한 벤자민 버틀러와 데이비드 D. 포터는 윌밍튼 항을 보호하는 포트 피셔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에 알프레드 H. 테리, 아달베르트 에임스, 포터가 이끄는 북군은 재차 이곳을 공격해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의 남군을 쫓아내고 2월에 월밍튼을 함락시켰다. 이동안 서부에서 진격해온 윌리엄 T. 셔먼 장군은 캐롤라이나로 진격해 1865년 4월에 조셉 E. 존스턴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 최후의 야전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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