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11개의 남부 노예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남부연합을 결성하면서 미 동북부의 자유주 전체와 경계선 상에 있는 5개주를 포함한 북부와 싸운 미국내전을 남북전쟁이라고 부른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을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은 기존의 노예주 경계 밖으로 노예제의 확산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하자 남부 7개주가 반발해 1961년 3월 4일 대통령에 링컨이 취임하기 전에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미연방정부는 이를 반란이라고 비난했다.
1961년 4월 12일 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자 링컨 대통령은 각주에서 지원군을 소집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그에 반발하여 4개 노예주가 추가로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에 가담했다. 양측이 서로 군비를 확대하는 가운데 북부는 우세한 경제력과 동원력을 살려 전쟁 초기에 경계선에 있는 각 주들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한편 해군으로 장기 봉쇄에 나섰다. 1862년 9월 안티텀에서 북부에 침입해온 남군을 막아낸 것을 계기로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하면서 영국의 개입을 막고 전쟁의 초점을 연방의 주권문제에서 노예해방으로 옮겨갔다. 동부전선에서 로버트 E.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연전연승을 이어갔으나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패배를 맞았고 서부에서 북군이 빅스버그를 점령하면서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획득해 남부를 분단시키면서 남군은 패색이 짙어졌다. 북군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병력과 물자의 우위를 살릴 수 있게 되어 리 장군을 소모전에 끌어들이는 한편 셔먼이 이끄는 북군이 애틀란타를 점령하고 바다까지 진격함으로써 남부의 전쟁수행능력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결국 리 장군이 1865년 4월 9일 아포마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남부의 패배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남북전쟁은 62만명의 병사가 사망했으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전쟁으로, 이후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사회적, 경제적 통합을 강화해나갔고 1877년 까지 재건에 힘쓴 끝에 세계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쟁의 원인
남북전쟁의 원인으로는 노예제, 연방과 각 주의 권한 갈등, 남북의 경제적 구조차로 인한 갈등, 관세문제 등을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주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가 공존한다는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분쟁의 출발
1787년 미국제헌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노예제 문제를 묵살한 이래로 노예제는 줄곧 미국 정치의 뜨거운 감자였다.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지역 분쟁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노예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1817년 미주리 주의 연방가입을 둘러싸고 빚어진 갈등은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으로 루지애나 구입지 36도 30 이남에서 노예제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일단락 지어졌지만 이런 정도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1828년 관세 거부 사건(1846년 이후 관세가 낮아지면서 위기는 해소되었지만 이 문제도 노예제와 연관이 있다.) 등을 거쳐 1835~1844 기간동안 미국 의회에서 노예제 폐지에 관련된 논의가 금지되었고 갈등은 일단 잠잠해진 듯 했지만 1845년부터 텍사스 노예제 문제와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획득한 신 영토에서의 노예주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분쟁은 재점화되었다.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획득한 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새영토의 절반이 미주리 협정선 이남인데도 불구하고 북부 출신의 윌모트가 새로 편입된 준주 전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윌모트 단서조항’을 제출하자 부통령 칼훈을 내세운 남부는 노예제도 문제는 각각의 주가 독자적으로 판단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해 맞섰다. 1850년 칼훈의 결의안은 법제화되어 1850년 절충안으로 법제화되었고 그에 발을 맞추어 해리엣 비처 스토우가 유명한 소설 ‘엉클 톰의 오두막’을 발표하면서 노예제 확산을 반대하는 북부의 열기와 남부의 경각심을 모두 드높이게 되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부에서는 반노예제 분위기가 만연해졌고 과격 노예해방주의자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노예제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 민주주의의 전망, 자유노동과 노예제 대농장간의 경제적 이점에 관한 논쟁들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그 와중에 휘그당은 붕괴되고 모른다 당(Know-Nothing), 자유토지당(1848), 공화당(1854), 헌정연합(1860)등의 새로운 당이 설립되어 정치는 혼란스러워 졌으며 민주당도 노예제 인정여부에 따라 분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1830년대 초에 미국 우정국은 남부에 노예제 해방 팜플렛 전달하는 것을 거절할 정도로 남부와 북부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패여졌다. 북부의 교사들은 남부에서는 노예해방에 관련된 일말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고 노예해방에 관한 문학작품도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의심하는 등 지역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공화당이 스스로 노예해방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고 북부에서도 에릭 포너가 결론지었듯이 ‘노예제는 좋은 사회의 안티테제라고 보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본질적이라고 믿는 가치와 이익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예제도 문제의 발전
노예제도는 유사이래 계속 존속되어 왔으나 유럽이 지리적 확장을 시작한 이후 신대륙에서 플렌테이션 노동에 사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를 이주시키면서 노예제도는 역사적 절정에 도달했다. 유럽-아프리카-신대륙간에 노예무역을 축으로 조성된 삼각무역은 장기간에 걸쳐서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으나 18세기 말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노예제 보다는 본국이 식민지를 거느리는 체제를 구축하면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상황이 달라서 노예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남부의 주요 생산품인 목화가 산업혁명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대하자 노예제 대농장제의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나 대농장제의 융성은 역설적으로 남부가 더욱 침체되는 상황을 불러왔다. 남부의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분위기는 이민자에게 적대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에 이민온 백인의 7/8이 북부에 정착하면서 북부에 남부의 2배 가까운 백인이 몰리게 되자 남부의 방어적이며 공세적인 성향은 더더욱 강해졌다. 또, 같은 남부중에서도 카리브 연안지역에서는 노예제가 증가하는 데 반해 보다 보다 북쪽에서는 퇴색되어간 것도 남부의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 1850년대 이후 남부와 북부의 경계지역에서는 대부분의 흑인노예들이 매각되거나 도주, 해방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고 해방된 흑인이나 유럽에서의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남부인들은 남부의 특색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긴박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는 캔사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0년대가 되자 경계주에서 흑인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백인가정의 수는 16%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남부에서 노예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일부 부유한 농장주들에 한정되게 되면서 노예의 가격도 점차 증가했다. 그런데 남부는 인구비례에서 북부의 1/3에 불과한데 비해 95%의 흑인인구가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노예해방에 따르는 공포감은 남부가 훨씬 강했다.
이런 성향은 해당 지역의 플렌테이션 농장 숫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연방탈퇴의 주축이 된 이른바 ‘저지’ 남부는 가장 대농장이 밀집된 지역이었던 반면에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아칸사스, 테네시처럼 보다 북쪽에 위치한 남부 노예주들은 대농장이 더 적었기 때문에 섬터 요새 공격을 둘러싼 위기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연방을 탈퇴했고 북부와 경계지역에 위치한 노예주들은 탈퇴하지 않았다. 1850년대에 남부에 거주하는 백인가족 중 흑인 노예를 보유한 비율은 저지에서 43%, 중부에서 36%, 경계주에서는 22%로 나타났으며 10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는 대농장주의 85%는 남부 저지에 거주했고 경계주에서는 1%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노예제도에 기반한 남부의 부가 편중되기 시작하자 남부 지도자들은 이미 하원에서 소수파가 되어 있던 노예주로서는 상원에서도 확대되는 북부에 밀려 소수파가 될 상황에서 당선된 북부가 노예제도의 팽창을 막고 소멸로 유도할 것을 우려했다.
한편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구조차이도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샤를 비어드의 ‘극단적 경제 결정주의’는 오날에는 대체로 호응을 얻지 못하고 북부와 남부의 경제나 대체로 상호보완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예제도 문제는 1850년대에 이르러 각 주의 자치권 문제와 결부되면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남부는 연방을 결성한 것은 각 주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에 동의한 것이므로 주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연방이 강요하게 된다면 탈퇴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북부는 미국이 독립한 것은 각주들이 모두 협력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전체의 동의가 있어야만 연방을 해체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탈퇴선언은 무효하다고 보았다. 남부는 남부는 제퍼슨이 켄터키 선언에서 언급했던 ‘주의 자치권’을 노예제와 연관시켜서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한편 역설적으로 북부가 노예제를 반대한 것도 역시 제퍼슨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어서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을 비롯한 폐지론자들의 주장보다는 링컨을 비롯한 온건주의자들이 강조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제퍼슨의 선언을 선호하고 있었다.
노예제도와 자치권 문제 중 어느쪽이 우선한 문제였는지에 관해서는 계속 논란이 되어왔으며 당시에도 이 문제에서 어느쪽이 우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심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려는 시점에서 남부 부대통령 알렉산더 스테판은 취임사를 통해 노예제가 남부가 연방을 탈퇴한 주 원인이라고 선언했지만 남부가 패배한 후에는 말을 바꾸어 노예제가 주 원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도 남북전쟁의 원인을 노예제에서 주의 권리 문제로 바꾼바 있다. 당시에도 노예제 문제는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복잡한 문제였던 것이다.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노예제와 관세문제를 결부시켜 거론했으나 이런 경우는 드물었고 일반적으로 노예제 문제에 관세 문제가 종속적인 논제였다.
이 시기의 정치적 논쟁은 주로 새롭게 서부 준주에서의 노예제 확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당시 서부의 주들은 대부분 자유주가 되었고 남북이 공히 노예제도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한다면 소멸되리라고 판단하자 남부에서는 연방을 탈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1854년의 남부는 오스텐드 메니페스토를 통해 쿠바를 노예주로 합병하는 방식으로 탈출구를 마련하다가 실패했으며 1854년에는 노예제의 금지 여부를 투표에 의해 결정하도록 한 미주리 협약을 켄사스-네브라스크 법안이 대체하면서 분열은 가일층 격화되었다.
기독교 종파별로도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등 교파에 따라서 노예제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달랐으며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논란이 심했다.
남부가 이토록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경제적 손실문제만이 아니라 인종적 평등이 확립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텍사스의 연방 탈퇴 선언서는 노예제 금지 주가 ‘인간의 평등권을 오용해 인종이나 피부색의 차이등을 고려하지 않고있다’면서 흑인은 ‘(백인보다)열등하고 다른 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선언했다. 알라배마의 분리주의자 E.S. 다간은 백인과 자유 흑인은 같이 생활할 수 없으며 해방된 노예들이 남부에 잔류할 경우 “우리의 세계는 노예들의 처형자가 될 것이며 북부의 적들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몰아가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우리의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수준을 넘어서서 범죄로, 죄악으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사실 링컨에게는 노예제를 법률로 금지하려는 계획을 작성한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남부에서는 노예제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지나쳤던 것이다.
유혈의 캔사스
캔사스와 네브라스카는 1820년의 메이슨-딕슨 선(36도 30분)의 북쪽에 있으므로 자유주로 성립될 수 있는 지역이었지만 1854년의 캔서스-네브라스카 법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투표로 주의 성격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규정해 미주리 협약은 폐기되었다. 이 때문에 1856년 미주리의 친노예주의자 보더 루피앙의 주도아래 캔사스 주에 친노예주의자들이 대규모 위장 전입해 친북부 주민들을 투표장에서 몰아내어 ‘레콤턴 기본법’을 억지로 통과시키며 캔자스에서 노예제를 합법화시키는 상황에서 친 남부성향의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와 제임스 부캐넌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자 캔서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노예주가 확대되자 이를 둘러싼 분쟁은 결국 와카루사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로렌스 시가 약탈되었고 공화당의 찰스 섬너는 남부 출신의 프레스턴 브룩스에게 참패를 당했다. 포타와토미 학살과 블랙잭 전투, 와사와토미 전투와 마레 데 신느 학살 등등의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1857년 미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결정을 내린다. 드레드 스콧 사건은 미주리에 거주하던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이 장기간 자유주에서 거주했으므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연방 대법원이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조항을 근거로 상고를 기각한 판례다. 이 사건에서 대법권 로저 B. 타니는 노예가 ‘너무나 열등하기 때문에 백인과 같은 수준으로 존경받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노예제가 확대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링컨은 “드레드 스콧 판례같은 경우가 한번 더 생긴다면"” 북부에도 노예제가 생겨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재판의 결정은 주민 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하더라도 켄사스를 포함한 지역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수 있다고 해석되어 노예제 옹호론자들을 기쁘게 했지만 대법원 판결에는 실질적인 강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제의 문제점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노예제 반대세력은 한층 격렬한 폭력으로 응답해 캔자스는 남부와 북부의 대리전장이 되어 북부출신의 극렬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하퍼스 페리의 연방정부 무기고를 약탈한 사건에서 유혈의 캔사스 사태는 극에 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 ‘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더 유명한 John Brown’s Body로 사후에 더 유명해진 존 브라운은 흑인 노예들을 무장시켜 대중봉기를 일으킬 의도로 버지니아의 하퍼스 페리에 있는 연방 무기고를 습격했으나 로버트 리가 이끄는 정규군에게 진압되어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봉기는 실패했지만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더이상 덮어두기 힘들 정도로 표면화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 남부에서는 북부출신의 과격 노예제 폐지론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었다.
링컨의 등장
‘코윈 개정안’이나 ‘크리텐든 양보안’등의 양보안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1858년의 링컨-더글라스 토론은 링컨이라는 무명의 서부출신 정치가를 부각시키게 된다.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공화당의 링컨간에 벌어진 이 토론은 7회에 걸쳐서 이어졌으며 ‘노예제의 허용 여부는 각주의 자율에 맡긴다’고 주장한 더글러스가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일견 링컨의 노예제를 일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데다가 레콤턴 기본법을 비판한 것 때문에 민주당 내 남부출신의 지지를 잃고 대통령이 될 기회를 놓쳤다. 오히려 토론에 패배한 링컨이 주목을 받아 1860년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남부의 연방 탈퇴 움직임이 점차 강화되자 남캐롤라이나의 대농장주이자 상원의원인 존 타운젠트는 ‘우리의 적들은 정부를 장악하기 직전이고 광신적인 논리에 따라 우리를 통치하면서 노예제를 금지하려한다’고 발언했으며 남부 언론들과 정치연설 및 이탈 선언서들도 비슷한 논지로 연방탈퇴를 주장하는 가운데서도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사실 너무 중요도가 높아져서 최근에는 다른 국내 문제들은 들리지도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노예제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링컨은 기존의 노예주에서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자체가 연방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지만 1858년 ‘갈라선 집’ 연설에서 언급했듯이 ‘노예제도의 확산을 막아 궁극적으로 소멸케 하려는’ 바램을 갖고 있었다. 링컨 본인은 이미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에서 노예소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코윈 개정안에 동의하고 있었으나 분리주의자들은 이러한 보증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분리주의자들은 경계주에서 노예제가 사라지게 되면 전체적인 노예해방으로 이어지게 될 것으로 우려했고 그 다음에는 북쪽 남부에로 연쇄적으로 파급효과가 미치리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공화당이 남부에서 노예를 후원하고 힌튼 로완 헬퍼 같은 남부의 백인노예해방론자들을 후원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대로 상황이 계속될 경우 카리브 연안지역에서는 ‘불길에 둘러쌓인 전갈처럼 결국에는 자멸하게 될것’을 우려했다.
남부의 이탈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이탈
가장 먼저 연방 이탈을 선언한 남부주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1860년 12월 24일 발표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즉각적인 연방탈퇴 선언’은 남부에서 노예제가 유지되는 것은 각 주의 자치권에 관련된 것이며 북부의 노예제 금지 법안 움직임이 헌법질서에 위배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남부 각주는 비슷한 선언을 하고 미연방을 이탈했다.
겨울 분열
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7개주는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1891년 2월 4일 남부 연합을 수립했다. 남부는 요새와 정부 시설들을 빠르게 점령해나갔지만 1861년 3월 4일에 임기가 종료하는 부캐넌 대통령은 별다른 저항없이 ‘연방은 영속되지’만 ‘무력으로 각각의 주를 연방에 남도록 강요하는 것은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지지부진한 대응을 하고 잇었다. 한편 미 육군의 1/4에 달하는 텔사스 주둔군이 지휘관 데이비드 E. 트위그 장군과 함게 남부에 합류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남부 의원들이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게 되자 공화당은 전쟁전에는 모릴 관세법, 대륙 횡단 철도 법, 국립 은행 법, 1862년의 연방지폐 승인을 비롯해 남부가 반대해오던 수많은 법안들을 통과시킴으로써 전비마련을 위한 세금을 확대할 수 있었다.
남부 연합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플로리다, 알라배마, 조지아, 루지애나, 텍사스 이상 7개 남부 목화재비주는 1861년 2월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을 결성했다.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고 미국 헌법을 본떠서 만든 구조로 구성된 남부는 군대를 조직해 섬터 요새를 공격했고 이에 대응해 링컨 대통령이 각주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2개월내로 버지니아, 아칸사스,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등 4개 노예주가 추가로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한편 버지니아 주의 북서부는 독립해서 1863년 6월 20일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새로운 주로 승격되어 북부에 편입되었다. 1861년 말이 되자 미주리와 캔터키는 친 남부파와 친 북부파로 갈라져 각기 남부와 북부에 합류했다.
북부 연방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델라웨어,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사스, 켄터키, 메인, 메릴랜드, 메사츄세스, 미시건, 미네소타, 미주리,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오하이오, 오레건, 펜실베니아, 로드 아일랜드, 버몬트, 위스콘신을 비롯한 23개주는 연방에 잔류했고 전쟁주엥 네바다와 웨스트 버지니아가 새로 주로 승격해 연방에 가입했다. 테네시와 루지애나는 전쟁초에 북부가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콜로라도, 다코타, 네브라스카, 네바다, 뉴멕시코, 유타, 워싱턴은 북부편을 들었으며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인디언 부족 일부는 남부를 지지해서 오클라호마 지역에서는 소규모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경계주
‘경계주’란 버지니아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웨스트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델라웨어, 미주리, 켄터키를 비롯한 북쪽 노예주들을 일컫는다.
메릴랜드에서는 수많은 친남부 관료들 때문에 볼티모어에서의 반-북부 폭동이나 교량 방화 등을 묵인하고 있었다. 링컨은 이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북부에서 훈련받은 민병대가 워싱턴과 볼티모어로 진군했다. 이때문에 남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링컨은 메릴랜드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워싱턴이 위치한 콜롬비아 구역을 분리했으며 재판없이 메릴랜드 주정부의 각료들을 체포하고 구금했다.
미주리에서는 연방탈퇴를 놓고 투표를 한 끝에 잔류를 결정했다. 친남부 주지사 클레이본 F. 잭슨은 주 방위대에 복귀명령을 내렸으나 나타니엘 리온이 이끄는 북군이 민병대를 공격했다. 캠프 잭슨 사건 이후 리온 장군은 주지사와 주방어군을 추격해서 체포했으며 이로 발생한 공백으로 분리 움직임은 소멸하고 친북부파 정부가 수립되었다.
켄터키는 한동안 연방탈퇴를 주저했으며 일단 중립을 선언했다. 1861년 9월에 남군이 켄터키에 진입하면서 중립은 끝나고 노예제가 존속되는 한 북부편을 들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남군이 침공한 이후 남부 동조자들은 분리주의 분파를 열어 정부를 부인하고 남부에서 승인을 얻었으나 반군은 곧 축출되어 켄터키에서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한편 버지니아는 연방탈퇴를 선언한 뒤 휠링에 있는 북부 주정부가 48개 마을에서 지지를 얻어 1861년 10월 24일에 새로운 주를 수립했다. 새로 수립된 주는 처음에는 ‘카나와’라고 불렸지만 곧 ‘웨스트 버지니아’로 개명하고 1863년 6월 20일 북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제퍼슨 카운티와 버클리 카운티가 1863년 말에 새로운 주에 합병되었다. 이로써 수립된 웨스트 버지니아는 2:1로 연방탈퇴를 반대했으나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의 병사들은 북군과 남군에 거의 비슷한 비율로 참전했다.
동 테네시에서도 유사한 친 북부 분리움직임이 있었으나 남부에게 진압되었고 제퍼슨 데이비스는 친 북부파로 의심되는 이들 3000명 이상을 재판없이 구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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