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은 1918년 3월부터 1920년 6월까지 대유행했으며 극지방이나 태평양의 외딴 섬들까지도 퍼져나갔다. 전세계적으로 7천만 내지 1억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유럽 인구의 1/3이 감염되어 1차대전 사망자의 2배 가까운 인구가 이 병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낸 이유는 50%에 달하는 높은 전염율에 더해 사이토킨 발작(Cytokine Storm)이라하여 면역체계가 과민반응을 일으켜 신체조직을 파괴하는 증세 때문으로 최종적으로 감염되었던 인구는 당시 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10억명에 달한다.
오늘날에 조류독감이 유행하면서 스페인 독감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희생자의 티슈 샘플을 사용해 연구한 결과 바이러스의 특성과 전염방법에 대해서 보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망율
일반독감과의 비교
인도에서만 당시 인구의 5%에 달하는 1천7백만명이 사망했고 일본에는 2천3백만명이 감염되어 39만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8%가 이 질병을 앓았고 50만~67만5천명이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25만명이 사망했고 프랑스의 사망자수는 40만명이 넘었다. 캐나다의 경우에는 약 5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알라스카와 남아프리카에서는 모든 마을이 병을 앓았다. 에디오피아에서도 독감이 창궐해 하일리에 셀라시에를 비롯한 극 소수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해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서만 5천~1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국령 소말리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전체인구의 약 7%가 독감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레일링아에서도 1만2천명이 사망했고 피지같은 경우에는 불과 2주만에 전체 인구의 14%가 사망했으며 서 사모아에서는 인구의 22%가 사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무오년 독감이라 불리우며 740만명이 감염되어 14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은 50%에 달하는 높은 감염율과 면역체계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증상 때문이다. 사실 1918년 독감의 증상은 독감으로 보기에는 너무 심각해서 콜레라나 티푸스 등으로 오진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귀에서 피가 나고 피부에 발진이 생길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세균성 폐렴과 2차감염이 주요 사망원인이기는 했지만 바이러스 자체가 일으키는 출혈과 폐의 부종도 많은 피해를 낳았다.
일반적인 유행성 독감의 치사율이 0.1%에 불과한 것에 비교하면 2~20%의 치사율은 이례적이고 전체 사망자의 99%는 65세 이하의 청장년층이고 사망자의 절반 정도가 20세에서 40세의 건강한 어른이었다는 점 또한 일반적인 인플루엔자가 2세 이하의 유아나 7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위험한 질병인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특이한 경우이다. 이런 성향은 바이러스 자체의 성격만이 아니라 1889년에 유행했던 러시아 독감의 유행에 의한 부분적인 보호효과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명칭의 기원
환자 사례를 분석하면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더 먼저 발견되었지만 1918년 독감은 보통 ‘스페인 독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스페인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의 전파를 보다 잘 확인할 수 있었고 검열을 거치지 않은 신빙성있는 뉴스를 통해서 외부에 알려졌기 때문에 마치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하는 것 처럼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역사
1차대전이 인플루엔자의 직접적인 발생원인은 아닐지라도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병영생활과 부대이동은 전염병의 전파를 보다 확대했고 교통-통신 수단의 발전도 바이러스의 치명도를 높였다. 몇몇 학자들은 참호전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화학공격등으로 병사들의 면역체계가 약화된 것도 병이 전파된 주요 원인으로 본다. 프라이스 스미스 같은 경우는 인플루엔자가 전쟁 후반에 추축국과 연합국의 세력 균형을 깬 주요 원인중 하나라고 주장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두번째로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할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의 치사율이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보다 훨씬 높았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국제교역과 여행의 증가도 독감이 유행한 주요원인중 하나로 근대적인 교통수단들은 병사와 항해사 및 민간 여행객을 통해 질병이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질병의 발원지
주요도시 치사율
역사가인 알프레드 W. 크로스비는 1918년 독감이 캔서스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으며 정치학자인 앤드류 프라이스 스미스는 오스트리아의 문서고를 통해 인플루엔자가 1917년 오스트리아에서 이미 전염되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저명한 작가 존 베리는 크로스비의 견해를 반영하여 캔서스의 하스켈 카운티가 처음 독감이 발생한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이 질병이 감염된 첫 보고사례는 1918년 3월 4일, 켄서스 포트 릴리에서 였으며 다음으로 뉴욕 퀸즈에서 3월 11일에 보고되어 있다. 1918년 8월 경에는 이미 프랑스 브레스트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 미국 보스톤등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염되었다. 한편 1918년 11월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에서 독감이 전염된 스페인이 당시 중립국으로 전시 언론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여과없이 전염병의 확대가 보도되면서 마치 최대의 피해국처럼 알려지자 연합군 병사들은 이 병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렀다.
사망 패턴
전형적인 독감 바이러스는 영아나 노약자 처럼 면역체계가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1918년 독감은 젊고 건강한 사람일 수록 더 치사율이 높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한 질병이었다. 게다가 보통 겨울에 상황이 심각해지는 인플루엔자가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널리 전염되었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병이 빠르게 진행되는 경우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증세는 바이러스의 독성으로 폐가 경화되면서 발생하는 폐렴이었고, 느리게 진행되는 경우에는 면역력 약화에 의한 세균성 폐렴 증세였다. 이외에도 신경계 감염으로 인한 정신 장애도 발견되었으며 사회가 붕괴됨에 의해 동물의 공격을 받아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염병의 두번째 확산
영국의 전염동향
당시 민간사회는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심하게 아프지 않다면 계속해서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며 쇼핑을 하거나 직장에 나가고 있었기에 점진적으로 전염되어간데 반해서 참호속에서 생활하던 병사들 사이에서는 정반대로 병을 약하게 앓는 이들은 참호속에 남아있는 반면 심하게 앓고 있는 이들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열차를 거쳐 야전 병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감염시켰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두번째로 전염이 확산되자 금새 전세계에서 감염자가 늘어났다. 이 두가지 독감 병균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처음에 감염되었던 사람들은 면역이 생겼지만 두번째로 접촉한 병균은 훨씬 더 치명적이어서 참호에 있던 병사들이나, 건강한 어른들이 빠르게 취약해졌다.
사회의 황폐화
미국 적십자사
치사율이 낮은 지역에서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면서 일상생활이 중단되어 버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걸고 고객이 오더라도 가게 밖에서 필요한 물품을 남겨두도록 요구하는 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의료인력이 병에 걸려서 치료를 못하게 되거나 무덤을 팔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 없게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해 땅을 파낸 뒤 관없이 집단으로 매장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태평양의 섬지역에서는 전염병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뉴질랜드를 거쳐서 전염된 지역은 유달리 높은 치사율을 보였는데 뉴질랜드 본토에서는 사망율이 5%였고 통가에서는 전체 인구의 8%가 사망했고 나우루와 피지에서는 각기 전체 인구의 16%와 5%가 사망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서 사모아 지역으로 뉴질랜드 군이 주둔하고 있던 이 지역에서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성인 남성의 30%, 성인 여성의 22%와 아이의 10%가 사망했다. 그에 반해 군사적으로 봉쇄된 미국령 사모아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피해가 적었던 지역
일본에서는 1919년 7월까지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257,363명에 불과했으며 치사율은 0.425%로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교하면 피해가 덜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외부와의 왕래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법으로 전염병의 창궐을 막았다. 태평양에서는 미국령 사모아와 프랑스의 뉴 칼레도니아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염병의 진정
1918년 가을에 치명적인 두번째 전염이 시작되었지만 겨울에 들어서면서 전염병은 신속하게 소멸되었다. 10월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는 한주만에 4,597명이 사망할 정도로 맹위를 떨쳤지만 11월 11에는 도시 전체에서 독감이 없어졌다. 이런 급속한 소멸의 원인으로는 의료진이 전염병의 예방책을 확립하고 사례연구를 통해 폐렴 증세를 완화시킨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1918년 독감균이 치명적인 형태로 변했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독성이 약화되는 과정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문화적 충격
1918년 월터리드병원
이토록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로는 전염병이 위력을 떨치고 소멸되기 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미국의 경우에는 약 9개월 정도)는 점과 1차대전의 참상으로 인해 전염병의 공포가 덜 중시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병에 감염된 주요 연령대가 1918년 독감이 잊혀진 원인이라는 설명도 있다. 당시는 스페인 독감만이 아니라 1차세계대전이 한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던 시기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전사나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수많은 젊은이들에 가려져 버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 시기를 회상하면 전쟁과 전후의 곤란에 대한 많은 기억들 속에 전염병의 기억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수가 극도로 높았던 유럽에서 인플루엔자는 독립적으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주기 어려웠거나 전쟁의 비극중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또, 1차대전은 처음에는 누구나 금방 끝이 날것이라 생각했던 전쟁이 몇년이나 지속되었던데 비해 전염병은 일부지역에서는 1개월 정도만 창궐하고 금방 사라져 버릴 정도로 기간이 짧았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장티푸스, 황열병, 디프테리아, 콜레라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독감이 대중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지 못했다는 설명도 있다.
스페인 독감 연구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
2005년 미육군병리학연구소와 남동부 가금류 연구소, 뉴욕의 시나이산 약대는 병리학자 오한 헐틴이 알라스카 퍼마프로스트에 매장된 여성 독감환자 시신에서 추출한 바이러스와 미군 병사들로부터 채취한 샘플을 사용해 1918년 독감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2007년 1월 18일, 원숭이에게 재생한 1918년 독감 바이러스를 투여하는 실험을 통해 왜 더 강한 면역체계가 있는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더 강한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밝혀내었다. 2008년 9월 16일에는 1919년에 매장된 마크 사이크스 경의 시신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하여 현대의 H5N1 조류 독감 바이러스의 RNA와 비교분석하는 연구를 했고 위스콘신대의 카와오카 요시히로는 2008년 12월에 특정 유전자들을 통해 1918년 바이러스가 폐에 침투해 폐렴을 일으키는 과정을 동물실험으로 알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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