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여론 악화에 시달리던 링컨에게 애틀랜타 점령 소식은 11월 8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55:45로 재선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워싱턴을 위협하고 있던 남군은 게티스버그에서, 치커모거와 채터누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끝에 이제는 남부의 심장부인 조지아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몰려있었다. 뉴올리언즈 함락 이후 수고인 리치먼드와 함께 남부의 버팀목이었던 애틀랜타의 함락과 맥클랠런을 내세운 민주당의 선거전 패배는 남부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최후의 희망마저도 빼앗아간 결정타였다. 하지만 남부는 아직 중서부 산악지역에서 마지막 희망까지 잃지는 않았다. 후드가 지휘하는 테네시 군은 애틀랜타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맹수가 되어 폐허가 된 도시에 간신히 입성한 북군을 몰아붙이겠다고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양군 사령관
남부의 테네시 군을 지휘하는 후드는 남부의 정신 그 자체였다. 물질적으로 불리한 상태로도 전쟁에 나설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던 남부인들을 대표하는 켄터키 출신의 이 젊은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시절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전쟁과 함께 혜성처럼 빛나는 전공을 쌓아올려왔다. 1862년 3월에 준장, 같은해 10월에는 소장, 1864년 2월엔 중장으로, 다시 1864년 7월에는 대장까지 진급한 후드는 겨우 33세였지만 게티스버그에서 왼팔을, 치커모거에서는 오른다리를 잃은 역전의 용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시절에 그를 알게되었던 셔먼의 증언처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의 후드는 이제야말로 공격정신을 불태워 전황을 반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를 상대할 북군의 미시시피 군관구 사령관은 셔먼이었지만 후드를 실질적으로 상대하게 될 이는 컴벌랜드 군 사령관 토머스였다. ‘치커모거의 바위’라는 명예로운 별명답게 방어에는 정평이 있는 토머스는 후드와 웨스트포인트 시절 스승이었고 토머스의 휘하에서 오하이오 군을 지휘해 후드와 추격전을 연출하게 될 스코필드도 후드와 사관학교 동기라는 관계로 얽혀있었다.
데이비스와 후드
1864년 9월 2일, 셔먼은 애틀랜타를 점령했지만 군사활동에는 활기가 없었다. 그랜트가 동부전역에서 리를 상대로 처참한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서부의 셔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고,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의 모험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거나, 불타버린 애틀랜타에 보급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오랜 포위공격으로 지쳐있던 북군은 테네시에서 애틀랜타까지 늘어잔 보급선을 서부&대서양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고 반면에 지루한 방어전에서 풀려난 테네시 군과 후드는 북군의 보급선을 공략하면서 점점 사기가 올랐다.
후드는 테네시 군을 9월 21일 애틀랜타 서쪽의 팔메토로 이동시킨 뒤 북군의 수색망을 벗어나 9월 25일 후드는 남부의 데이비스 대통령과 접견한 자리에서 테네시 군을 북상시켜 북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그에 셔먼이 반응해서 추격해 오면 그때 유리한 지형에서 맞아 싸우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데이비스는 애틀랜타를 포기한 후드의 결정에 크게 실망하긴 했지만 존스턴을 해임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태로 후드까지 해임시킬 수는 없었다. 후드와 향후의 작전 전개를 확인한 데이비스는 후드보다 연상인 하디를 휘하 군단장 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에 보우리가드를 남군의 서부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해 명령 체계를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고 남 캐롤라이나로 돌아갔다. 노련한 정치가 답게 데이비스는 후드에게 전략이 있고 셔먼의 통신선을 끊어서 전황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작전이 생각대로 잘 되어 오하이오에 남군의 기를 휘날리고 ‘시끄러운 양키들에게 새 교훈을 주게’될 지는 미지수였다.
전황의 전개
보급로
테네시 서부에서 포레스트 기병대가 북군 보급로를 교란시키고 있던 9월 중순 이후 후드는 북군 보급로를 노리는 새로운 작전을 시작했고 9월 29일에는 테네시군 40,000명을 이끌고 채터후치 강을 도하해 체터누가-애틀랜타 철도에 접근했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남군이 북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자 셔먼은 보급로 유지를 위해서 병력을 점점 분산시켜야 했는데 후드는 기병대의 우세를 살려 각 지역에 분산된 북군을 각개격파하려고 했고 셔먼도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대응할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 셔먼은 보다 원대한 작전 구상으로 후드를 상대할만한 병력을 토머스에게 맡기고 훤히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조지아를 거쳐 대서양으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먼저 후드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는데 북군 기병대가 남군에게 눌려있는 상황에서는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남북전쟁 중 남부에는 대규모 농장과 목장이 있었기에 기병대 자원이 풍부했으며 덕분에 대체로 기병의 역량면에서 북군에게 우위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후드의 기병대 지휘관 나타니엘 포레스트는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인물이었다. 훗날 KKK단 창설에 연루되면서 안좋은 평판을 듣게되지만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는 포레스트는 타고난 감각으로 전투마다 그 천재성을 빛내고 있었다.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 ;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머릿글자 US를 가지고 만든 별명) 그랜트에게서 탈출하며 명성을 높이기 시작한 포레스트의 재능은 이때 그 절정에 달해 서부 테네시 지역의 북군 보급선 전체를 휩쓸고 다니며 북군에게는 악마같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미 9월 중순부터 포레스트의 남군 기병대가 활개를 치고 있는데 더해 채터후치 강을 넘은 후드는 10월 4일, 애틀랜타로 향하는 철도가 지나는 앨라투나로 남군을 이동시켜 북군의 보급선에 대한 위협을 더욱 강화했다. 북군의 보급선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분산된 북군 병력을 차례로 공격해서 애틀랜타의 셔먼을 유인해낼 생각이었다. 이튿날 후드의 위치를 파악한 셔먼도 애틀랜타에 슬로컴의 20군단만을 남겨둔채 후드를 추적해 애틀랜타 북쪽의 마리애타로 이동하며 1개 여단을 급파해 앨라투나를 방어하게 했다. 남북전쟁 당시 최고의 보병화기였던 헨리 연발총으로 무장한 북군은 앨라투나에서 남군의 연속공격을 끝까지 방어했고 북군이 재차 증원부대를 파견할 것을 우려해 남군은 물러났다. 헨리 연발총은 남북전쟁 당시 개인 화기로서는 최정점에 달한 것으로 아직 머스킷이 사용되던 시기에 등장한 후장식 연발 강선총이었다. 튜브식 탄창을 채용해 남군 사이에서 ‘양키들은 토요일에 장전한 총을 일주일 내내 쏜다’는 소문까지 돌게한 이 총은 단가가 너무 높아 제식 장비로 채용될 수는 없었지만 비슷한 시기의 스펜서 연발총 보다 연사속도가 빠르고 연기가 적어 집중해서 사용하면 무서운 화력을 쏟아낼 수 있는 무기였고, 이후의 작전에서 맹위를 떨치게 된다.
후드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쿠사 강을 넘은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또다시 애틀랜타-테네시를 잇는 북군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에 나섰다. 이번에 후드의 목표가 된 것은 레사카 였는데 10월 12일, 남군이 포진을 끝낸 뒤 레사카를 수비하는 북군의 수비대에게 도시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클라크 위버 소령은 일언지하에 항복을 거절해 버렸다. ‘우린 충분히 이곳을 지켜낼 수 있으면 와서 덤벼봐라’라는 대답에 후드는 북군의 진지에 정면으로 공격했을 때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크리라는 생각으로 물러나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 후드는 철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계속 선로를 파괴해 북군의 보급력을 차단하려 했고 셔먼은 대대적으로 인부를 동원해 간단하게 휘어진 철로의 수리해 나갔다.
10월 13일, 작은 참극을 부르게 된다. 이날, 남군은 달튼의 북군 수비대를 공격했는데 이 부대는 루이스 존슨 대령이 지휘하는 751명의 흑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군은 이미 노역에 다수의 해방노예 흑인들을 징병해서 활용하고 있었지만 남부의 시선에 이들은 적군이 아니라 도망친 노예에 불과했다. 북군의 존슨 대령이 항복 조건에 흑인들을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후드는 ‘모든 노예는 남부 주민의 귀속 재산'이라며 약 600명의 흑인 포로들에게서 옷과 신발을 벗기고는 철길을 따라 행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노역을 거부하는 북군병사 6명이 즉결처형되었고 가혹한 대우를 받은 흑인 병사 상당수는 종전까지 다시 노예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레사카를 떠난 후드는 남서쪽으로 이동해 10월 20일 가즈덴에 도착했다. 이곳의 지형이 방어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후드는 이곳에서 셔먼을 맞아 방어전을 치를 생각이었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작전을 치르기 어렵다는 예하 지휘관들의 반대로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셔먼도 50km떨어진 게인스빌까지는 쫓아왔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는 움직이지 않은채 10,000여명의 작업인력을 투입해 불과 1주일만에 채터누가-애틀랜타 철도를 정상운행시켰다. 이제는 후드가 북군의 보급선에 접근하려면 셔먼의 방어진지를 통과해야할 상황이었다.
테네시 강
가즈덴에서 휴식하며 후드는 그동안의 작전을 재고했다. 지금의 대처상태가 계속된다면 병력과 보급면에서 열세인 테네시군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릴 뿐이었다. 하지만 셔먼을 따돌리고 테네시로 이동해 토머스를 꺽고 보급선을 따라 분산되어 있는 북군을 휩쓸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새로운 작전이 떠올랐다. 켄터키나 테네시로 돌아간다면 병력을 새로 충원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셔먼을 격파하거나 피터스버그를 돌아 리와 합류해 전황을 바꿔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구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못해 현실성이 떨어졌지만 후드는 이 작전을 밀어붙여 보우리가드의 승인을 얻어내었다. 10월 26일, 후드는 새로운 작전에 따라 테네시군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테카투르로 이동한다. 보우리가드는 셔먼을 남겨두고 가는 이상 북군이 조지아로 움직일 경우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기병대를 남겨두라는 조건 하에 작전을 승인했는데 이 때 남군 기병대는 휠러와 포레스트의 휘하에 나뉘어 있었고 포레스트는 멀리 북서쪽으로 전진해서 파괴작전을 치르는 중이라 휠러 기병대가 조지아로 이동했다.
당시 북군은 테네시 강 유역을 제압해 하천을 통해 물자를 수송해서 내쉬빌 서쪽의 존슨빌에 집적소를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이곳이 포레스트 기병대의 목표였다. 강을 따라 서 테네시 지역으로 진출한 포레스트는 10월 28일 북쪽의 포트 헤이만 요새에 도착해 기병포로 기선 세척과 포함 2척을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획득한 포함 2척을 수리한 포레스트는 이것으로 자신의 소함대를 구성해 지상의 포대와 협력해서 북군의 테네시강 운송망을 마비시켰다. 이에 당황한 북군은 점점 더 많은 포함을 투입했지만 포레스트는 수심이 얕은 지역에 포대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포함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11월 4일, 존슨빌과 파두카에서 급파된 포함 9척의 집중포화로 결국 강을 떠나야 했지만 이 시점에 이미 수송선 14척, 바지선 20척, 야포 26문이 파괴되어 북부가 입은 재산피해만 670만 달러에 달했다.
후드는 테네시강을 도하할 지점을 찾고 있었다. 본래의 예정지는 귄터스빌이었는데 10월 22일에 도착해서 살펴본 결과 북군 포함의 위협 때문에 이곳에서는 도저히 부교를 설치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26일 데카투르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북군 3~5,000명이 파견되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2척의 포함까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서쪽으로 65km를 이동한 후드는 그래도 이곳에서 강을 건너 철로를 따라 이동할 생각으로 2일 정도 기다린 뒤 짙은 안개를 틈타 강을 건너려 했지만 북군 전초의 공격을 받아 피해만 입고 물러나자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북군의 포함이 접근할 수 없는 투스컴비아에서 테네시 강을 도하했다.
컬럼비아
이 시점에서 셔먼과 토머스는 후드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남군의 목표는 네쉬빌 공략보다 애틀랜타의 북군에 대한 견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토머스의 경우 후드가 장기간 보급품을 축적했다는 점에서 보다 활발한 공세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갖고는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11월의 테네시 기후를 고려해봤을 때 많은 비가 내리는 계절에 공세로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생각했다. 셔먼은 셔먼대로 만약의 경우를 위해 증원군으로 스탠리 사단을 토머스에게 파견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조지아를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는 11월 2일, 이 작전을 허가했다.
테네시 강을 도하한 후드에게 작전의 승패는 얼마나 빨리 분산되어 있는 북군을 각개격파하느냐에 달려있었지만 앞으로의 작전에 필요한 20일치 식료품을 보급장교들이 마련하는 데 꼬박 3주가 걸렸다. 인구밀도가 낮은 중부지대에서, 그것도 철로에서 떨어진 곳에 보급품을 집적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 시간 동안 후드는 멀리 정찰과 파괴 공작에 파견한 포레스트 기병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6일, 셔먼이 애틀랜타를 출발했다는 정보를 받은 보우리가드는 후드에게 신속히 작전을 시작하도록 지시하면서, 토머스가 병력을 집중시키기 전에 먼저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셔먼과 토머스는 후드가 셔먼을 뒤쫓아 조지아로 이동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11월 21일, 후드의 3개 군단이 전부 작전을 개시했음을 확인한 토머스는 스코필드에게 분산된 북군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내쉬빌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후드보다 먼저 콜롬비아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13일 밤 스코필드가 풀라스키를 출발하면서 남군과 북군 사이에 컬럼비아 도착에 승패를 건 경주가 시작되었다.
11월 21일, 플로렌스를 출발한 후드는 휘하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치텀이 왼쪽, 리가 중앙, 스튜어트가 오른쪽을 맡아 포레스트 기병대의 엄호를 받으며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 단계에서 후드는 더크 강에 스코필드보다 먼저 도착하려는 생각으로 최악의 기후상황에서도 100km를 강행군했다. 포레스트의 엄호가 효과를 발휘해 북군은 남군의 위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북군도 윌슨의 기병대가 있었지만 10월 말에 막 동부전선에서 도착한 윌슨은 병력 규모에서도 절반수준에 불과해 포레스트의 남군 기병대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포레스트는 활발한 활동으로 북군의 이동을 교란했다. 북군은 소규모 교전에 시달리면서도 후드의 본대보다 앞서 더크 강변에 도착하고 이곳에 참호를 건설했다.
11월 24일부터 포레스트 기병대가 북군의 방어선에 위장 공격을 시도하고 포격을 개시했지만 기병대의 지원을 받는 1개 보병사단의 공격은 북군에 대한 위장공격으로 하류나 상류로 우회해 북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토머스는 11월 26일 스코필드에게 더크 강 북쪽에 방어선을 유지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날 아침 스코필드는 낮동안 보급품 마차를 보내고 보병대는 야간에 출발시키려 했지만 급작스런 폭우로 더크 강의 철제 교량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이날 저녁, 남군 주력은 콜롬비아 남쪽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토머스는 미주리에서 증원되기로 한 A.J. 스미스 사단의 도착을 기다리기 위해 28일, 이번에는 더크 강을 떠나 북쪽으로 후퇴해서 내쉬빌에 보다 가까운 하페스 강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스프링힐
11월 29일, 후드는 리 군단과 포병이 남쪽 강변에서 스코필드 군을 붙잡아 두는 동안 치텀과 스튜어트에게 동쪽으로 우회해서 더크 강을 도하하고 북군의 배후를 차단하도록 지시했다. 윌슨과 포레스트가 기병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포레스트는 4,000명을 우회시켜 윌슨을 후퇴시킴으로써 북군이 후드의 기만책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뒤 서쪽으로 돌아 스프링힐로 향했다. 이 때까지 후드가 더크 강을 도하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윌슨의 경고를 의심하던 스코필드도 29일 새벽녘이 되자 남군의 기만작전을 파악하고 스탠리에게 북쪽의 철도를 보호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스프링힐의 마을을 3면으로 둘러싸는 방어선을 구축해 방어전을 펼치도록 했다. 오전 10시경, 후드가 남군에게 서쪽으로 우회해 스프링 힐로 이동하도록 지시한 상황에서 북군과 남군은 프랭클린으로 통하는 후퇴로의 스프링 힐을 놓고 경주를 벌였으며, 스탠리가 콜롬비아 유료도로를 이용해서 재빨리 이동한 덕분에 바그너는 간발의 차이로 포레스트 기병대 보다 먼저 스프링힐과 800대의 수송마차를 안전하게 보호할 방어선을 구축하고 남군 기병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격으로 탄약이 고갈된 포레스트는 재차 북쪽으로 이동해서 다시 남군의 엄호와 북군의 후퇴로 차단하기 위해 부대를 물렸지만 남군의 공격은 이제 막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간 참이었다. 29일 오후, 후드는 스프링힐에 도착하자 마자 함께 도착한 치텀 군단에게 남쪽에 전개하도록 지시했다. 좌익부터 전군을 좌익을 베이트 사단에 맡기고 우익을 클레번에게 맡겨 사다리꼴 대형을 갖춘 치텀 군단은 스프링힐 남쪽에 위치한 브래들리의 방어선을 휩쓸듯이 공격해 스프링힐을 포위하고 도로를 차단하려는 작전을 개시했다. 오후 3시 부터 공격이 시작되어 1시간 뒤에는 클레번 사단의 분전으로 남동쪽을 방어하던 북군을 쫓아내었지만 군단 전체가 선회운동을 하는 와중에 좌익을 맡은 베이트에게 후드는 직접 컬럼비아에서 스프링힐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고 이곳으로 접근하는 북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치텀은 그와 달리 즉각 스프링힐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려왔다. 베이트는 멀리서 접근하고 있는 스코필드의 전위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저격병을 배치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스프링힐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북군과의 접촉을 보고했지만 치텀은 이 보고를 무시했다.
한편, 이날 오후 3시까지도 컬럼비아에 남아있던 스코필드는 잔존부대에게는 밤이 되면 이곳을 떠나 후퇴하도록 지시하고 병력을 스프링 힐로 이동시켰다. 이와 거의 동시에 더크강 남쪽의 남군은 공세를 가해서 도하에 성공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후퇴하는 북군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
스프링힐의 전황은 점점 복잡해져서 클레번이 북군을 쓸어버린 오후 4시경, 치텀은 스프링힐을 포위하려는 데 후드는 치텀을 컬럼비아 유료도로 차단에 사용하려 했기에 명령계통이 점점 더 혼잡해졌다. 치텀이 직접 뛰어다니며 휘하 사단의 움직임을 정돈하고 막 도착한 브라운 사단을 우익으로 이동시켜 남쪽에서부터 스프링힐을 포위하려는 상황에서 브라운은 자신보다 우익에 포레스트 기병대가 위치할 것이라는 명령과 달리 우측방이 비어있는 상황에 대해 치텀에게 다시 확인을 요구했고 그러는 와중에 밤이 되었다. 야간 공격이 무리라고 생각한 치텀과 브라운은 일단 공격을 포기했지만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콜롬비아-프랭클린 간 유료도로도 방치되어 있다는 걸 발견한 후드는 격노했지만 이미 밤 9시가 넘은 상황에서는 더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날 스프링힐의 교전은 방어자인 북군이 350명, 남군은 5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한 소규모 교전에 불과했지만 이날 밤 스코필드가 전군을 이끌고 스프링힐을 빠져나가 프랭클린까지 후퇴하는데 성공해 버렸으므로 후드에게는 컬럼비아에서 이어진 전투를 망쳐버린 통한의 실책이 되었다. 11월 30일 아침 6시, 스프링힐이 텅 비어버린 것을 발견한 후드는 휘하의 지휘관들을 비난하고 노발대발하며 즉시 전군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프랭클린 전투
후퇴한 스코필드의 선발대는 11월 30일 새벽 4:30에 프랭클린에 도착하자마자 방어진지 보수에 들어갔다. 콜롬비아와 스프링힐에서 황급히 퇴각하느라 부교를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적에게 쫓기며 보급마차들과 수만명의 병력을 도하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스코필드는 프랭클린에서 일단 남군을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북군 공병대는 하페스 강의 다리 두개를 모두 보수, 보강했고 일반 병력은 도착하는 대로 방어진지 공사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하페스 강에 남은 유일한 철교가 무사한 덕에 스코필드는 이날 정오까지 대부분의 보급마차를 강 너머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고 방어선도 대부분 구축되었지만 스프링힐에서 이어지는 콜롬비아 유료도로 쪽의 방어가 문제였다. 이곳의 방어를 맡은 바그너 사단은 전날 포레스트 기병대와 교전을 치르며 마지막에 후퇴해서 이미 피로가 누적된 북군부대 중에서도 특히 피로도가 높았다. 스코필드는 프랭클린 남쪽의 언덕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했지만 명령을 오해한 바그너는 다른 부대들이 구축한 방어선보다 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휘하 부대에 지시했고 이 때문에 기존의 방어선을 보수한 다른 부대에 비해 진지를 새로 구축한 바그너 사단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후드의 선봉을 맞이해야 했다. 다만, 바그너의 명령 자체가 부당하다고 판단한 옵다이크는 명령을 무시하고 임의로 북군 방어선 내부로 후퇴해 휘하 여단을 예비대 위치에 포진했다.
하페스 강과 프랭클린 시를 둘러싸고 북군의 반원형 방어선 구축이 대충 마무리 된 오후 후드의 남군이 포진을 시작했다. 북군이 급조한 방어진지 정도는 돌파할 수 있다고 정면 공격을 지시한 후드에게 클레번과 치텀 등은 방어진지를 확인해본 결과 정면공격을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이미 북군을 놓쳐버린 실책으로 입지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후드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군은 야포의 도착이 마무리 되기 전인 오후 4시 북군의 시계를 방해할 석양을 믿고 돌격을 시작했다. 적진까지 3km 가까운 거리를 돌격하며 엄호할 화력이 야포 2문 뿐이라는 무리한 작전으로 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앙에 집중된 클레번과 브라운의 사단은 바그너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본래 이곳이 방어선의 약점이었으므로 스코필드는 배후에 충분한 포대를 배치해두었지만 아군을 쏘게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엄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군 병력 일부는 북군의 방어선을 일부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방에서 대기중이던 옵다이크 여단이 반격에 나서고 패주한 부대들도 고참병들을 중심으로 전열로 복귀하면서 북군 중앙이 돌파당하는 위험에서는 간신히 벗어났고 중앙부에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곳으로 접근하는 남군에게는 맹렬한 교차포격이 가해지면서 결국 북군은 오후 5시에 방어선을 회복했다.
남군은 중앙과 북군 좌익에 맹렬한 돌격을 가했지만 방어진지 안에서 연발총으로 저항하는 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저녁 7시, 남군의 마지막 가용부대인 ‘알레게니’ 존슨 사단이 전선에 도착하자 후드는 북군 우익의 돌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남군 좌익의 치텀과 함께 돌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진 데다가 지형지물에 어두운 나머지 피해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북군 방어선도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이제 후드에게는 더이상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가 없었다. 결국, 남군은 다음날로 공격을 미루었고 이날 밤 11시, 스코필드는 휘하의 북군에게 내쉬빌로 후퇴하도록 명령했다. 휘하 지휘관 일부가 이미 남군은 괴멸상태라 반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후드와 싸우기 전에 후퇴하라는 지시를 이미 받았던 스코필드는 북군을 전부 후퇴시켰다.
12월 1일 정오가 되자 스코필드의 북군은 토머스와 합류했고 후드는 부대를 추스려 다시 추격에 나섰지만 상황은 암담했다. 프랭클린 전투는 ‘서부의 피켓 돌격’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보다 더 대규모로 벌어진 참극이었다. 게티스버그에서 피켓 돌격은 1,354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이날의 전투로 테네시 군이 입은 피해는 6,000명이 넘었다. 전투 시간, 엄호의 부족, 먼 돌격거리 등 수많은 악조건이 겹친 끝에 테네시 군은 장군만 14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장교단의 피해까지 심각한 상황이었다. 반면 북군의 피해는 야간에 후퇴하느라 약간 축소되어 보고되긴 했지만 사망 189명, 부상 1,033명, 실종 1,104명에 불과했다. 단순한 피해 이외에도 양분되었던 병력이 합류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두배 가까운 병력이 양호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군 앞에서 지칠대로 지쳐있는 남군은 공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처지에 몰렸다.
내쉬빌 전투
전략적으로 보면 스코필드가 토머스와 합류한 시점에서 남군의 패배였으나 후드는 병력을 다시 조지아로 후퇴시킬 수 없었다. 장비도 빈약하고 보급도 부족한 남군은 테네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후퇴한다면 부대 전체가 해체될 위험이 있었다. 내쉬빌에서 북군과 싸우기 위해 후드는 보우리가드에게 증원병력 파견을 요청했지만 이미 남군에게 여유 전력은 없는 상태였다.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후드는 12월 5일 포레스트 기병대로 내쉬빌 동쪽 멀프리스보로를 공격해 북군병력 일부를 유인하려 했지만 북군은 이미 방어부대를 포진시켜 둔 상태였으므로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의 기동전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혹한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남군의 병력은 20,000명 수준까지 떨어졌고 더이상 보급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반면 북군은 임시진지가 아니라 장기간 구축해온 방어진지에서 철도에 보급을 받고 있었다. 방어선은 내쉬빌을 둘러싸고 반원형으로 구축되어 있고 후방의 컴버랜드 강에는 북군 포함이 순찰중이라는 완벽한 방어진을 구축해 놓은 토머스로서는 급하게 공격할 필요없이 느긋하게 휘하 부대를 훈련시킬 여유가 있었다. 반면, 워싱턴에서는 후드가 이곳을 벗어나 북진해올 가능성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피터스버그에서 리와 대치중인 그랜트는 남군을 그냥 놔두면 루지애빌을 거쳐 북부 어디로든 진격해갈 수 있다고 판단해 12월 8일 즉각 공격하도록 명령했지만 이 즈음부터 몰아치는 눈보라를 이유로 토머스는 공격을 거부했다. 소극적인 수비형 장군들에게 관대한 편이 아니었던 링컨과 그랜트는 악천후를 각오하고 즉각 공격하라는 전보를 보내왔고 토머스는 12월 10일, 공격을 기획했지만 다시 악천후를 이유로 작전을 중지했다. 워싱턴은 결국 특사를 파견해 토머스를 해임시키고 스코필드가 대리로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특사가 도착하기 전에 토머스는 테네시 군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다.
12월 15일. 북군은 우세한 병력을 총동원해서 남군진지 전체에 2단 공격을 실시하고 윌슨의 기병대는 크게 우회해서 남군의 좌측방을 공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연익운동에 들어갔다. 새벽 4시 유색인 부대를 포함한 북군 좌익은 스티드만으의 지휘하에 남군 우익을 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짙은 안개로 양군은 서로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아침 8시가 되어서야 교전을 시작했으며 그러는 중에 스코필드가 지휘하는 북군 주력은 남군의 좌익에 접근해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포레스트가 이끄는 남군 기병대가 부재한 데다 짙은 안개로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북군의 우익은 병행전진하며 남군의 방어선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정오 무렵에는 남군의 전체 전선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 북군의 2단 공격중 주공은 남군 좌익을 목표로 한다고 판단한 후드는 우측에서 리를 빼내 좌익을 보강했고 일단 방어선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오후 1시가 되자 남군의 전열은 붕괴되기 시작해 1:30에는 남군 좌익의 전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짙은 안개속에서 장거리를 움직여온 윌슨의 기병대가 예정대로 측면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후드는 병력을 재편성할 수 있었다.
지쳐있는 남군은 이날 밤을 새워가며 언덕지형을 이용해 새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두개의 후퇴로를 감싸는 형태로 구축된 남군의 방어선에 대해 토머스는 이튿날, 재차 2단 공격을 계획했다. 이번에도 주공은 남군의 좌군의 좌익에 집중되고 윌슨의 기병대는 배후로 이동해 남군의 후퇴로를 차단하려는 북군에 대해 후드는 전날 우익에 배치되어 있던 치텀을 이동시켜 좌익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남군의 우익은 그럭저럭 정오까지 북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3면에서 포위당한 남군의 좌익부대는 붕괴되고 오후 4시 경이 되자 남군의 전열은 붕괴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북군의 공격력은 이윽고 찾아온 어둠에 뭍혀버렸고 마침 시작된 호우를 이용해 후드는 병력을 집결시키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틀간의 전투로 북군은 3,000여명, 남군은 6,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총 전력의 30%가까이를 상실한 이 패배는 회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후드는 12월 18일에 포레스트 기병대와 합류해 캐롤라이나로 후퇴했다. 북군에 쫓기는 테네시 군은 12월 25일 포레스트가 번뜩이는 전술지휘능력으로 추격해온 북군을 일부 격퇴한 덕에 테네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듬해인 1865년 1월 13일, 후드는 테네시 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화려했던 경력은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정처없는 퇴각끝에 캐롤라이나까지 도착한 잔여병력은 존스턴 휘하에서 재편성 되었지만 더 이상 이들이 활약할 기회는 없었고 남북전쟁의 피날레는 그랜트와 리의 물고 물리는 공방전에서 결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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