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발전
충각 열풍
1860년대부터 각국의 해군은 장갑함을 상대로는 함포보다 충각이 더 유력하다고 보았다. 증기기관은 풍향과 상관없이 배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장갑의 방어력이 함포의 공격력을 웃도는 상황에서 충각은 거의 천년만에 위력을 발휘했다. 실전에서 햄튼 수로에서 일어난 모니터와 버지니아 간의 교전 중 함포는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고, 라사 해전에서 오스트리아의 기함 페르디난드 막스가 이탈리아의 르 디탈리아를 충각돌격으로 침몰시킨 사례를 보며 해군의 장교들은 충각전술이 장차 해군 전술과 장비 발전에서 화두가 되리라 믿었다.충각 돌격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때까지 전열 단종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해군의 전술에도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17세기 이후로 유럽의 해군은 전열전술을 기본으로 채용하고 있었으나 현측을 내보이는 전열전술은 현측 함포의 위력은 극대화 시킬 수 있더라도 충각 공격에 대응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이 때문에 함대전에서 충각돌격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을 연구되었지만 참고가 될만한 실전 사례는 제한적이었고, 충각이 실제로 위력을 발휘한 경우도 이미 이미 기관이 정지된 상태로 멈춰있는 배를 상대로한 경우 뿐이었다.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 함포의 위력이 빠르게 증가하고 어뢰가 실용화되면서 보다 원거리에서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자 충각 공격은 빠르게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함포의 발달
철갑함 시대의 함포는 원거리에서 상대의 장갑을 관통하기 위해 소수의 대구경 포를 탑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구경과 중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와 함께 함포의 구조에 있어서도 후장식과 전장식, 활강식과 강선식 등 다양한 구조의 함포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영국해군 최초의 철갑함 HMS 워리어는 110파운드 7인치 포미장전식 포와 68파운드 활강포를 혼합해서 장비했으며 윌리엄 암스트롱 경이 설계한 신형 후장식 포가 주목을 받았다. 후장식 포는 함포를 이동하지 않고서도 장전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조준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강선식이라 같은 위력의 활강포보다 가볍고 명중율이 높았으나 설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한동안 그 실용성이 의문시 되었다.초기의 후장식 포는 포강을 효과적으로 밀폐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포강이 파괴되거나 뒤쪽으로 충격이 전해질 우려가 있었고 이 때문에 장약의 양을 줄이고도 운용하는 수병들을 위험하게 할 위험성이 있었다. HMS 워리어에 탑재된 암스트롱 후장식 포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프랑스의 라 글루와를 보호하는 4.5인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관통력을 낼 수 없었고 포미를 폐쇄하는 작업 도중에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해군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후장식 함포의 탑재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영국 해군은 1880년대 까지 전장식을 유지했으며 6.5톤에 달하는 100파운드 9.5인치의 활강식 소머셋 포에 이어 영국 해군성은 7톤 무게의 7인치 강선포를 도입하고 이후 급격히 함포의 규모를 증가시켰다. 함포의 무게는 12, 25, 38톤으로 급증해서 나중에는 81톤까지 무게가 증가했으며 함포의 구경은 16인치까지 커졌다.
1880년대까지 고집스럽게 전장식 포를 유지한 영국해군의 결정은 비판을 받았지만 1870년대에만 해도 영국 해군의 전장식 함포는 프랑스나 프러시아 해군의 후장식 함포들보다 발사속도나 사거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프랑스 해군이 1873년, 드 밴지 대령이 고안한 신뢰성이 높은 폐쇄기를 채용하면서 전장식 포와 후장식 포의 균형은 변화한다. 1875년 이후 함포의 구경 증가와 함께 전장식 포의 운용이 어려워지면서 후장식 포와 수압식 장전기를 도입하면서 함포의 크기는 더욱 가속되었지만 조작 기술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1882년의 우라비 반란에서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했던 HMS 인플렉서블의 81톤 16인치포는 1발을 발사하는데 11분이나 걸렸으며 둘리오의 100톤짜리 450mm(17.72 인치) 포는 1발 발사하는데 15분이 걸렸다.
1879년 HMS 썬더러 호에 탑재된 전-후장 이중 장전식 포가 문제를 일으키자 여론의 압력을 받은 영국해군은 모든 함포를 후장식 포로 교체한다. 함포의 구경과 중량이 증가하면서 장전 속도는 더더욱 느려지고 선체가 받는 부담은 커졌으며 함선의 안정성이 저하되었다. 이 때문에 함포의 크기는 188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러 HMS 벤보우는 영국의 함포중 가장 무거웠던 110톤의 16.25인치 포 2문을 장비했고 이탈리아의 450mm포는 2차대전때 야마토 급의 18인치포가 등장하기 까지 최대의 구경을 자랑했다.
함포의 크기를 증가시키는 한편으로는 화약도 개선되었다. 초창기의 철갑선은 흑색화약을 사용했으며 이들은 급속하게 연소가 되었기 때문에 포신이 길어질 경우에는 오히려 포탄의 속도를 감소시키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포신이 짧았다. 흑색화약은 상대적으로 연소가 단시간에 격렬하게 일어났으므로 포신이 받는 피로의 강도도 높았으나 흑색화약을 구슬처럼 압축(Pellet)시킴으로써 폭발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포신을 길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화학적으로 개량된 갈색 화약의 사용으로 폭발을 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되자 함포의 연사속도와 연사능력이 크게 개선되었다.
1884년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스를 이용한 무연화약이 프랑스의 발명가 바울 비엘에 으해 개발되자 한층 화약이 개선되었고 1890년대의 프리드레드노트 전함은 과거보다 오히려 구경이 작아졌지만 포신은 연장되어 발사속도와 명중도를 개선시킨 12인치포를 주로 장비했다.
발사체의 재질도 변화하여 초기에는 통으로 주조한 철제 탄두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합금강을 이용해서 보다 높은 장갑관통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장의 배치
현측배열
초창기의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철갑선들은 전열함의 구조를 계승하여 현측에 일렬로 대포를 배치했으며 이를 현측 철갑선(Broadside Ironclad)이라고 불렀다. 라 글루와나 HMS 워리어같은 초창기 전열함들이 이런 형태로 장갑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기존의 전열함이 2단, 3단으로 함포를 배치했던 것과는 달리 갑판위에 1단으로만 함포를 배치할 수 있었다186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가 건조한 철갑선은 여전히 현측 철갑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런 배치는 돛 조작이 함포사격을 방해하지 않고 어느쪽에든 높은 수준의 화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철갑선의 기술이 개발되면서 상대방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대구경포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점차 함포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될 경우 한쪽으로만 포를 발사할 수 있는 현측 철갑선은 유효 화력에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충각 공격의 발달로 함포를 선수에 배치해 전방향으로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이 요구되는 추세에서 신흥 해군국인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등은 그와는 달리 중앙 포대 방식이나 포탑, 포좌 방식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포탑과 포좌, 포대
현측 철갑선의 대안으로는 크게 두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한가지는 함포를 장갑으로 둘러싸 함선의 중앙부에 배치하는 것으로 이것을 상자 포대(Box Battery), 중앙 포대 방식(Centre Battery)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방식은 함포를 회전가능한 받침대 위에올려 일정한 범위내로 자유롭게 사격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완전히 장갑화되었을 경우에는 포탑(Turret), 부분적으로 장갑화되었거나 장갑이 없는 경우에는 포좌(Barbette)라고 부른다.
중앙 포대방식은 보다 단순하고 1870년대까지는 가장 널리 활용되었다. 중앙포대 방식을 따를 경우 현측 방식보다 배의 길이가 단축되어 보다 조종성이 향상될 수 있었으며 처음으로 중앙 포대 방식에 따라 설계된 철갑선은 1865년의 HMS 벨레로폰 호였다. 프랑스도 중앙 포대 방식의 군함을 1865년 발주했지만 1870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중앙 포대 방식을 취한 배들은 대부분 함포를 전방으로 직사할 수 있도록 앞쪽에 추가 갑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포탑을 도입한 철갑선은 1862년 스웨덴의 기술자 존 에릭슨이 설계한 USS 모니터로 여기에 사용된 것은 축을 이용해서 회전하는 방식인데 반해 영국의 발명가 코퍼 콜스가 발명한 포탑은 베어링 위의 링을 돌려서 회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포탑을 사용하면 거의 전방향으로 함포사격이 가능했지만 1860년대 초기에 도입되었을 때에는 마스트나 돛에 의해서 사격 범위가 심각할 정도로 제약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초기의 대양항해용 철갑선에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초창기의 포탑은 지나칠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에 배가 엄청나게 크지 않다면 포탑의 중량 때문에 건현을 극단적일 정도로 낮추지 않는한 심각한 복원성 문제를 안게 되었다. 콜스가 디자인한 HMS 캡틴이나 자매함 HMS 모나크 등은 사격 각도를 제한하거나 회전기구를 고정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876년에 취역한 HMS 인플렉서블은 포탑과 마스트를 함께 사용한 세번째 영국해군함이었으며 2개의 포탐을 중앙구조선 양쪽에 배치함으로써 전방향 포격을 가능하게 했다.포탑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프랑스 해군은 포좌 형을 선호했다. 포탑을 얹은 회전가능한 판 위에 올린 다음 일부를 장갑화한 포좌형은 장전시에만 보호되고 발사시에는 보호장갑 외부로 노출되기도 했다. 조작요원들은 직사화기의 위협에서는 대체로 안전했지만 해안포와 같은 곡사화기의 위협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하지만 포좌는 포탑보다 훨씬 가벼웠던데다가 기계설비가 적게 요구되고 천정 부분에 사용될 장갑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전체적인 중량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1880년대에는 포좌 형태가 널리 채용되었으며 나중에 프리드레드노트 급 전함에 탑재된 포탑의 원형이 되었다.
어뢰
철갑선 시대에 어뢰의 도입은 해군의무기와 전술개발에 만흔 영향을 주었다. 어뢰는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고정식 기뢰와 유사한 형태로 처음 선을 보였으며 나중에 작은 보트에 폭발물을 장치해서 큰 선박에 돌진시킨데서 영향을 받아 점차 발전되었다. 어뢰가 발전하면서 대형 군함들은 소형선박에게 강렬한 위협이 되었으며 철갑선이 도입되면서 함포의 위협에는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반면에 어뢰는 보다 효율적인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미 해군은 1864년에 모니터 함중에 4척을? 포탑이 없는 어뢰 전용함으로 개조했지만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자체추진이 가능한 보다 실용적인 ‘화이트헤드’ 어뢰가 1868년에 개발되자 1870년대의 HMS 인플렉서블이나 이탈리아의 둘리오, 단달도 같은 철갑선들은 어뢰를 주요한 무기로 채택했고 그에 영향을 받은 청년학파(Jeune Ecole)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함포의 위력을 능가하는 높은 방어력으로 무장한 철갑선들은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어뢰에는 취약했고 대형함 무용론을 꺼내면서 소형 어뢰정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자고 주장한 청년학파는 한때 맹위를 떨쳤다.
장갑과 구조
최초의 철갑선은 목조나 철재 선체로 건조되었으며 두터운 목재위에 철을 덧씌운 형태였다. 1870년대까지도 철갑선들은 목재 골조를 기본으로 건조되었다.
골조 : 철, 나무, 강철
철재를 골조에 사용하게 되면 기계적인 이점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유지하는데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장거리 항해용 군함의 골조에는 목재가 주류를 이루었다. 철재를 군용 함선 보호에 사용하는 것은 1820년대에 도입되었으며 183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는 철골 구조를 소형 선박들에 시험적으로 채용해 보았지만, 충격을 받았을 때 전체 구조가 변형되기 쉽다는 약점 때문에 1840년대 말 까지는 모두 폐기되었다.이로써 골조재로는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자 철재는 대형 함선의 장갑부분에만 용도가 한정되었지만, 철골 구조에는 몇가지 포기하기 힘든 장점이 있었다. 철재로 구조를 만들 경우에 보다 대형화되고 설계상의 유동성이 높았다. 밀폐성을 높여서 건현을 극단적으로 낮게 만들 수도 있었으며 이 때문에 철골구조를 채용한 HMS 워리어는 목조를 사용한 라 글루와보다 보다 길고 빨랐다. 철재를 사용하면 주문을 받자마자 건조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목조를 사용할 경우에는 시기를 맞추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며 제철산업이 발전하면서 철의 단가가 저렴해지자 철골구조의 가격 경쟁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1860년대에 프랑스가 목재를 선박용 골조에 사용한 것은 주로 프랑스의 제철산업이 당시만해도 요구되는 철재 생산량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며 영국은 이미 발주해둔 대량의 목재를 먼저 처리하기 위해서 목재구조를 채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목재구조는 여전히 원양항해용 군함이나 소형 철갑선에는 유용했다. 철골 구조는 바닷물의 염분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쉽게 부식되었으며 외피가 부식될 경우에는 저항때문에 배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유럽 근해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건선거를 이용해서 정비가 가능했지만 장거리 항해를 해야하는 선박에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는 우선 목재골조를 만든 위에 철판을 씌우고 다시 동으로 덮는 구조를 채택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비용과 수고가 과도하게 요구되었으므로 여전히 목조 전함이 유용했다. 한편 이시기의 군함들은 같은 설계를 목재와 철재의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들 수도 있어서 일본이 1875년에 발주한 공고와 히에이는 자매함이지만 공고가 각기 철재와 복합재를 사용하고 있다.
1872년 이후에는 골조재로 강철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강철은 비교적 강하면서도 가벼웠고 프랑스 해군은 철재 외피에 구조재로 강철을 도입한 르다웃타블르 호를 1873년에 진수해 1876년에 취역시킴으로써 강철구조 철갑선의 시대를 선도했다.
비록 영국은 당시 강철 생산량에서 세계최대를 자랑했지만 벳세머 공법으로 만든 강철로 함선 전체를 건조하는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에 영국 해군은 강철구조를 군함에 도입하는데에는 소극적이었다. 프랑스는 지멘스-마르틴 공법으로 적절한 양의 강철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영국의 기술은 뒤쳐져 있었고 영국 해군이 처음으로 완전히 강철 구조를 도입한 것은 1875년의 아이리스와 머큐리였다.
장갑과 방어구조
철골구조 군함들도 목조를 방어재로 사용했다. HMS 워리어는 4.5인치의 촐펀울 선박에 사용되는 목재중에서는 가장 단단한 티크로 된 15인치 두께의 목판위에 덧씌운 것이었다. 철갑선의 장갑에 사용되는 나무들은 철판이 붕괴되지 않게 지지하는 한편으로 충격을 흡수해 구조재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HMS 인플렉서블 같은 후기의 철갑선에는 목재와 철재를 혼합한 ‘샌드위치’ 장갑이 도입되었다.
1860년대부터는 강철을 장갑재로 사용하는 실험이 몇차례 이루어졌지만 당시의 강철은 연성이 부족해서 포격을 받으면 갈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철판 속에 강철판을 삽입하는 형태로 혼합한 장갑이 사용되었다. 이런 혼합장갑은 1870년대 말에 건조된 영국 전함들에 사용되었으며 처음에는 포탑의 장갑에서 부터 나중에는 전체를 (1882년의 콜로수스) 혼합장갑으로 만들게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해군은 이러한 ‘윌슨 시스템’의 라이센스를 취득해서 이런 혁명적인 장갑을 채용해 나갔다.장갑 전체를 강철로 만든 첫번째 철갑선은 이탈리아의 둘리오와 단돌로이며 이 두척의 군함들은 1873년에 건조를 개시했지만 1877년까지도 프랑스에 주문한 장갑용 강철이 다 도착하지 않았다. 1880년 프랑스 해군은 복합 장갑을 도입하기로 하였으나 공급이 부족하자 1884년에 강철 장갑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영국해군은 1889년까지도 복합장갑을 사용하고 있었다.
철갑선 시대에 장갑은 강화 니켈 강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1890년 미국해군은 강화 하베이강이 복합 장갑보다 우수한 성능이 있음을 확인했다. 수년 내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해군이 하베이 강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1894년 독일의 크룹사는 가스를 이용해서 강철장갑을 더욱 경화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1895년에 진수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호는 신형 크룹강을 도입한 첫 군함으로 이 장갑도 빠르게 각국해군에게 채용되었다. 영국은 1896년 캐노푸스호에 크룹강을 도입했으며 1901년에는 모든 신조 전함들이 크룹강을 채용했으나 미국은 여전히 하베이 강을 사용하고 있었다.
철갑선 시대에는 또한 방어구조 자체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워리어의 경우에는 반-장갑함이었으며 선수나 선미에 직격탄을 맞을 경우에는 방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차 대구경화되는 함포에서 함체 전체를 방어한느 것이 불가능해졌다. 인플렉서블의 장갑은 중앙의 시타델 부위에 집중되어 기관실과 엔진, 포탑과 탄약고 등의 핵심 부위만을 방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외의 부분에는 격볅을 설치하고 벌크헤드를 연장시켜서 비장갑화된 부분에 심각한 충격을 입더라도 부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설계방식이 고안되었다.
추진구조 : 증기와 돛
초기의 철갑선들은 원양항해를 위해서 목조 선박들처럼 바람을 이용하고 있었다. 초기의 증기기관은 효율이 떨어졌고 영국해군이 도입한 목조 증기선들은 석탄을 이용할 경우에는 5~9일 정도만 항해가 가능했고 이런 상황은 철갑선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HMS 워리어는 풍력과 증기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한편 크림전쟁에 사용된 철갑선이나 USS 모니터 및 그 자매함들 처럼 원양항해가 아닌 연안에서만 사용하도록 설계된 함선들은 처음부터 마스트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1869년 영국 해군이 건조한 HMS 디베스테이션은 증기기관의 힘만으로도 대서양을 건널 수 있었지만 목표는 영국 해협이나 유럽 근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양항해 성능은 경시되었다. 디베스테이션과 그와 유사한 배들은 1870년대에 영국과 러시아 해군이 다수 장비했지만 1870년대에 설계된 철갑선의 주류는 여전히 돛대를 장비하고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 해군은 아드리아 해의 근거리 임무에 사용하는 것을 전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스트가 없는 철갑선들로 구성되었다.
1860년대에 증기기관은 2단 팽창식 구조로 발전되어 전보다 30~40%의 효율이 향상되었다. 영국 해군은 1871년에 2단 팽창식으로 엔진을 교체했으며 1875년부터는 이런 증기기관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런 발전으로도 여전히 마스트와 돛을 보조동력으로 준비해두는 상황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범선에 의한 항해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작전이나 전략적인 상황에서의 요구라던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증기력만을 사용하는 함선의 경우에는 전세계에 석탄 보급소를 준비해야 했으며 이런 지역을 요새화시키고 적의 손에서 보호하는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보일러의 문제로 2단 팽창식 증기기관은 이론적인 능력보다는 많이 못미치는 성능이었다.
1870년대에는 1등급 철갑선이나 전함과 장갑 순양함으로 철갑선이 구분되었다. 1등급 철갑선에는 강력한 장갑과 무장이 중시되는 반면에 항해성능은 경시되었고 포탑이나 포좌를 설치하는 대신에 범선 장비를 철거하게 되었다. 1876년의 HMS 인플렉서블은 18881년까지 취역하지 못했으며 이 것이 영국 해군 최후의 돛대가 있는 군함이었으며 시대착오적으로 비추었다. 1880년대 초에는 대부분의 전함에서 범장을 생략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장갑 순양함에서는 범장이 여전히 지속되었다. 1860년대에 프랑스 해군은 알마와 라 가리소니에르 클래스의 소형, 장거리 항해용 철갑선을 건조했고 영국해군은 1870년대에 그에 대항할 스위프트슈어같은 전함을 건조했다. 러시아는 1870년에 도입한 아드미랄을 통해 신형 장거리 통상파괴형 철갑선을 선보였다. 보다 대형화된 HMS 섀넌의 경우에는 최초의 영국제 장갑 순양함으로 분류되지만 여기에 비교하면 너무 느렸다. 섀넌은 범장을 가지고 부착식 프로펠러를 장비한 최후의 영국군함이었다. 1881년에 영국해군은 여전히 적의 통상파괴선을 제압하기 위한 원양항해용 군함들을 건조하고 있었으나 1888년에 완성된 워스파이터가 그의 한 예이다. 1880년대 말에는 범선장비는 거의 도태되었지만 20세기까지도 범선 군함이 살아남았다.
3단 팽창식 증기기관의 도입은 철갑선 시대의 추진기가 맞이한 마지막 발전으로, 이 구조는 HMS 산 페라일에 가장 먼저 도입되었다. 이들은 1900년대 중반에 증기 터빈 기관이 도입될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함대
철갑선은 빠른 속도로 세계 각국 해군이 도입했지만 철갑선 간의 전투가 벌어진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육상 분쟁에 집중했고 영국 해군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어떤 라이벌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철갑선 시대의 해전은 주로 식민지에서의 작전이나 2급 해군국가들간의 분쟁으로 국한되어 있다.
철갑선들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다
1. 원양 항해가 가능한 대형 철갑선. 전함의 선조격에 해당한다.
2. 해안방어용이나 하천용으로 해상포대 또는 모니터함들
3. 원거리 통상파괴용 내지 통상 보호용 장갑 순양함.
해군
영국해군은 철갑선이 사용된 전기간을 통틀어 세계최대의 해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두번째로 철갑선을 도입했고 세계전역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범선 시대에 영국 해군의 전략은 해군을 파견해서 교전국가의 항구를 봉쇄하는 것이었으나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군함들은 채재 가능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기 때문에 이 전략은 사용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영국 해군은 항구 내에서 적 함대를 포착해 교전을 치룬다는 전략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해군은 디베스테이션 급을 시작으로 일련의 연안 포격용 전함들을 개발했다. 이러한 브레스트워크 모니터들은 형태적으로 다른 원양항해용 철갑선들과는 두드러지게 달랐고 오늘날의 전함 디자인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것이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영국해군은 라이벌들을 압도하고 있었으나 188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해군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영국은 해군법을 통과시켜서 2개국 표준주의를 채택했다. 즉, 영국해군은 다른 2개국가의 해군보다 우월한 해군을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이었지만 이 기준은 1880년대와 1890년대의 맹렬한 건함경쟁에 위협을 받게 된다.
영국 해군은 철갑선 시대의 주요 분쟁에는 참가한적이 없으며 식민지 분쟁이나 일방적인 위협에만 동원되었다. 1882년의 알렉산드리아 포격에서 영국해군은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면서 아흐마드 아라비의 이집트 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의 요새에 포격을 가했다. 이집트 군도 요새에서 사격을 가했지만 영국함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로 하루동안 포격을 가했으며 결국 이집트는 요새를 버리고 후퇴해야 했다. 이 포격으로 영국측의 피해는 병사 5명이 사망했을 뿐이었다.
프랑스 해군은 처음으로 철갑선을 건조했을 뿐 아니라 후장식 포와 강철 구조 등 혁명적인 기술을 채용해 영국해군보다 우위에 서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의 규모를 따라갈 수 없었고 1870년대에 프랑스 해군은 청년 학파의 영향으로 대형 철갑선 건조를 중단하고 소형 어뢰정들과 순양함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국처럼 프랑스 해군도 철갑선을 실제 작전에 투입한 적은 거의 없으며 보불전쟁에서 독일의 항만을 봉쇄한 프랑스 해군은 전쟁이 육상전의 단기결전으로 끝나는 바람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러시아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설계를 카피하는 방법으로 다수의 철갑선을 보유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최초의 장갑 순양함 제네랄 아드미랄을 설계하는 등 몇가지 기술적 혁신을 도입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최초의 장갑순양함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보보프카스라고 불리는 원형 전함도 선보였지만 이것은 설계상의 문제였다. 러시아 해군은 1877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터키 해군의 철갑선에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어뢰정을 사용한 전법을 광범위하게 도입해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러시아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신형 장갑 순양함과 전함을 도입해서 해군을 확장시켰지만 수병들의 훈련도 부족과 지휘관의 자질 부족으로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기로갛게 된다.
미국 해군은 남북전쟁이 종전할 무렵에 약 50척의 모니터형 해안용 철갑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870년대에는 대부분의 모니터함들이 예비로 돌려졌다. 함대의 주력을 이루는 모니터 형의 근본적인 제약때문에 미국해군은 한동안 연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고 1890년대에 미국이 스페인이나 남미 국가들의 분쟁에 개입할에는 이런 점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1890년대에는 미국해군의 기초가 갖추어졌고 근대적인 프리드레드노트 전함들과 장갑 순양함으로 함대를 구성해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남미에서는 철갑선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실전의 참여 기록도 상당하다. 1860년대의 친차 섬 전쟁에서 스페인과 페루-칠레 연합군 모두가 철갑선을 사용했다. 칼라오 전투에 참가한 스페인의 누만시아 호는 거의 피해를 받지 않았고 페루는 대신에 남북전쟁 때의 모니터 함을 참고해서 자국에서 건조한 철갑선 로아호(목선을 개조한 것)와 빅토리아 호(소형 모니터선으로 68파운드 포 장비)를 비롯해 영국에서 구입한 인디펜덴시아 호(중앙 포대식)와 후아스카 호(포탑식)를 투입했다. 누멘시아는 지구를 일주한 최초의 철갑선으로 1867년 9월 20일에 카디즈에 도착하기도 했다. (Enloricata navis que priomo terram circuivit) 1879년의 태평양 전쟁에서는 페루와 칠레군이 모두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사용하기 전의 철갑선을 사용했다. 인디펜던시아는 일찌감치 피해있었지만 페루의 철갑선 후아스카는 칠레의 해운에 큰 위협을 가해 칠레 육군의 진격을 6개월이나 저지했지만 칠레군이 도입한 신형 중앙 포대식 철갑선 블랑코 엔칼라다와 알미란테 코크란에 의해 안가모 해전에서 패했다. 철갑선은 일본해군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이 미국에서 구입한 CSS 스톤웰 호는 코테츠에서 나중에 다시 아즈마로 이름이 바뀌면서 보신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1869년 5월의 하코다테 해전에서 맹위를 떨쳤다. 일본해군은 계속 적으로 영국과 유럽 국가들에서 일련의 군함들을 구입하며 세력을 확대했고 중국의 북양함대를 압록강 해전에서 격파해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양함대는 당시 아시아 최대의 군함 정원과 진원호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본해군은 근거리 속사포의 우위를 살려서 4척이 심한 피해를 받으면서도 중국측의 군함 8척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철갑선 시대의 종말
철갑선 시대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어서 끝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철갑선들은 1차대전에도 사용되었지만 19세기 말에는 이미 철갑선이라는 단어보다는 전함이나 장갑 순양함이라는 단어가 철갑선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갑선 전함들의 디자인은 오늘날의 전함과 유사한 형태로 서서히 발전했고 이른바 프리 드레드노트 타입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들은 드레드노트라는 혁명적인 전함의 등장으로 인해 전함의 시대로 발전했고 그 후에는 철갑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게 된다.
대부분이 철갑선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870년대에 미해군이 소수의 모니터 선을 발주한 이후에는 거의 철갑선이 건조되지 않았다. 프리 드레드노트 급 전함은 1차대전에서 활약했으며 2차대전에도 일부가 활약하고 있다.
오늘날의 철갑선들
소수의 철갑선들은 오늘날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HMS 워리어는 영국의 포트머스에 완전히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후아스카는 탈카후아노에 전시되어 있다.
시티급 철갑선 USS 카이로는 미시시피의 빅스버그에 전시되어 있다.
노드롭 그루먼은 USS 모니터를 복원했으며 2005년에 완성되었다.
네덜란드의 람토렌칩은 로테르담에 전시되어 있다.
모니터함 CSS 노즈는 북캐롤라이나의 킨스턴이 목재 골조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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