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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바이킹 바이킹은 8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활약한 스칸디나비아의 모험가, 전사 겸 상인인 해적이다. 이들은 유명한 바이킹쉽을 타고 동으로는 볼가강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나 러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서쪽으로는 아이슬랜드, 그린랜드와 심지어 북미대륙의 뉴펀틀랜드에도 정착지를 건설했다. 바이킹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부르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7세기의 낭만주의적 사조에 따라 바이킹들은 고귀한 전사로 재해석되었으며 특히 영국이 스칸디나비아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각광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독일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민족주의에 의해 바이킹 시대를 부각시켰고 이러한 사회, 정치적 상황이 바.. 더보기
철갑선의 기술과 전술 함선의 외피를 철로 보호하게 되자 소구경의 대포를 수십문씩 장비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기존의 소구경 포들이 장갑에 되튕겨져 나가는 상황에서 유효한 공격법으로 부각된 것은 천년만에 다시 부각된 충각돌격이었다. 그와 함께 함포의 종류 배치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 중량과 크기가 증대되었으며 전열함처럼 현측에 다수의 포를 장비하던 방식에서 소수의 함포를 터렛에 탑재하여 전방위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기술적 발전 충각 열풍 1860년대부터 각국의 해군은 장갑함을 상대로는 함포보다 충각이 더 유력하다고 보았다. 증기기관은 풍향과 상관없이 배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장갑의 방어력이 함포의 공격력을 웃도는 상황에서 충각은 거의 천년만에 위력을 발휘했다. 실전에서 햄튼 수로에서 일어난 .. 더보기
마법사인가 수학자인가, 존 디의 삶 생애 공식활동 런던의 타워와드 출신으로 디라는 성은 웨일즈 어로 '검다'는 뜻이다.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롤랜드 밑에서 디는 클렘스포드의 가톨릭 학교(오늘날의 킹 에드워드 6세 문법학교)를 졸업한 후 1543년부터 46년까지 캠브리지의 성 요한 대학을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재능으로 유명했던 디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fellow)이 되었으며 154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르우벤과 브뤼셀에서 공부하고 파리 대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젬파 프리지우스와 함께 공부하면서 지리학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와 친구가 된 그는 10년후에 중요한 수학, 천문학 기구들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디는 1554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과 학장직을 제안받았지만 저술에 .. 더보기
갤리 6. 갤리선 시대의 종말 건현이 높은 범선들은 언제나 갤리선의 만만치 않은 맞수였고 삼각돛과 사각돛을 조합한 전장범선이 발달하고 대포의 위력이 증가하자 갤리선은 황혼을 맞이했다. 하지만 갤리의 황혼기는 대포가 개발되기 전부터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1034년 덴마크의 무역 선단은 비용과 효과의 문제로 호위선을 갤리선에서 코그선으로 교체했다. 파고가 높은 북해에서 갤리선은 빠르게 범선으로 대체되었지만 잔잔하고 풍향이 일정치 않은 내해인 지중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지중해에서 갤리선은 1595년~1605년 부터 활용도가 줄었지만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만들어진 범선이 상업교역로에 유입되기 시작한 17~18세기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새로 도입된 전장범선들은 보다 많은 화기를 장치할 수 있었고 항해성능도 뛰어나 해적의 .. 더보기
갤리 5. 중세의 갤리 중세시대 지중해를 둘러싼 단일 문화권을 형성한 로마는 해적을 포함해 항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제거했지만 서로마가 멸망하고 북아프리카와 유럽간의 교역이 단절되면서 중세 유럽의 항해문화는 답보상태에 놓였고 부분적으로는 퇴보했다. 중세 중기 이후에 가장 활발한 활약을 벌인 해양세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유럽 계 바이킹으로 이들은 북유럽 연안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내륙부나 지중해, 심지어는 아랍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유럽의 해양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세 유럽의 가장 오래된 갤리선 설계도는 시실리아의 카를 1세의 명에 의해 1275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약 40m에 홀수 2m, 넓이 3.6m에 달하는 이 갤리선에는 길이 6m의 노가 약 108개 있고 전체 중량은 80톤 정.. 더보기
전열함 -2 이렇게 모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몇몇은 설계를 변경했으며 영국해군은 일부 74~64문 장비 전열함의 상부 갑판을 제거해서 ‘래지’라고 불리는 전열함과 프리깃의 중간급에 해당하는 선박을 만들었다. 이들은 분류상으로는 프리깃이었지만 성능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소설 혼블로우의 주인공이 사관생도 시절에 근무하던 선박인 에드워드 펠로우 경의 HMS 인디패티거블도 ‘래지’에 해당한다. 전열함은 후기로 갈수록 점차 대형화 되어 크림전쟁에서는 그때까지의 상식을 초월하는 대형 전열함들도 선을 보였다. 1829년 진수된 마흐무디예 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지시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을 만들라는 명령에 따라 3층 갑판에 128문의 대포를 장비한 초대형 전열함으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에서 위력을 자랑했다..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 더보기
코그 Cog 코그선은 10세기부터 등장해서 12세기 무렵에 발트 해 주변의 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선박이다. 발트해 연안에서 풍부한 목재인 떡갈나무로 건조되었고 보통은 마스트 1개에 가로돛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가로돛만 장비한 선박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항해하기가 어렵지만 운항에 필요한 승무원의 수가 적으므로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1380년의 코그선 구조 코그선의 구조는 중간부에서는 평평한 구조의 평저선 선저에서 선수와 선미 부분으로 갈수록 잇대어 이어진 외판을 덧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선의 밑부분은 통칭 빌지(배 밑바닥에 침수되는 물을 모아둔 부위)에 외판을 덧대어가는 구조로 판은 쇠못을 양단으로 굽혀서 고정한다. 용골은 지중해의 카벨 빌드와는 달리 측면판보다 약간 두터울 뿐인 클링커 빌드로 이.. 더보기
컨셉시온 호와 윌리엄 핍스 1641년 9월 28일, 쿠바의 하바나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스파냐 선단이 있었다. 선단을 책임지는 인물은 후앙 루이스 데 빌라 빈센치오 였고, 그의 기함인 컨셉시온 호는 600톤 급 갤리온이었다.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한번 귀환했던 이 선단은 불과 열흘만에 수리를 마치고 유럽을 향해 재 출항에 나섰다. 신대륙의 귀금속을 대서양을 횡단하는 이 항로는 에스파냐 제국의 목숨과도 같은 자금줄이었고, 멕시코와 포토시의 광산에서 채굴한 수톤의 은과 마닐라 갈레온 선단이 멀리 아시아에서 실어온 비단, 향신료, 도자기, 옥 장신구를 비롯한 에스파냐 왕실의 금은보화는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 디에고 데 파셰코의 개인보물들, 신대륙 상인들의 상납금을 포함한 막대한 보물들로 배는 화물이 과적된 상태였지만 긴 항해가 무사.. 더보기
루땡호의 종 1779년 툴룽항구에서 "루땡"(Lutin)이라는 이름의 마지시오네 급 프랑스 해군 프리깃 1척이 진수했습니다. 이 배는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함대에 소속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에 휘말려서 기구한 운명에 휘말려 들게 됩니다. 후드제독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은 1793년 툴룽을 봉쇄했고 이 도시를 장악한 왕당파는 16척의 전열함과 프리깃 함을 영국 해군에게 넘겨주었으며 그와 함께 루땡 호도 영국해군에 편입되어 툴룽 포격을 위해 박격포함으록 개조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해군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가 유리했지만 나폴레오네 부오네파르데라는 이름의 젊은 장교가 이끄는 혁명군이 툴룽의 포위를 돌파하자 영국해군이 물러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나폴레옹이 영광으로 향하는 그의 전설을 시작했다면 루땡호는 HMS..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캐나다 북부의 탐험을 통해 북서항로를 찾으려고 하거나,?러시아 북부를 통과해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1631년에는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가 북서항로를 탐사했고 러시아도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을 찾아 탐험대를 파견했다. 비투스 베링 1725년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을 받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 2년간의 여정을 거쳐 캄차카 반도의 오호츠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선박을 건조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과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여 수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1730년 페테르스부르크로 귀환한다.? 1733년 베링은 쿠릴열도의 지도작성과 일본과의 항로등을 탐사하기 위해?두번째 탐험에 나선다.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1. 바렌츠의 모험 바렌츠의 모험 네덜란드의 탐험 영국인들은 거듭되는 실패로 북방항로 탐사에서 손을 떼었지만 1588년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북방항로도 그 후보중의 하나였다. 1594년과 1595년, 네덜란드 의회는 "메소포타미아와 타타르(오늘날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 북부를 따라가는 탐험여행"을 시도하게 된다. 1차 항해에서는 탐험대는 오렌지 군도 일대를 탐사했으며 바다코끼리 떼를 발견하여 상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고무되었지만 북극곰을 만나 생포하려다가 탐험대원 일부가 사망했다. 원하던 목적달성에는 살패했지만 몇가지 새로운 발견에 고무된 네덜란드는 다시금 카타이와의 무역을 희망하면서 탐험대를 파견했다. 불행히도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0. 허드슨의 비극 데이비스 드레이크의 북미대륙 서해안 조사와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 발견의 가능성은 희미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은 일부 영국 상인들은 북서 항로의 단서를 더듬어나갈 유능한 항해자를 찾았다. 유능한 항해자로 정평이 나있던 존 데이비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쉽게 실망하거나 개인적인 욕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북서항로를 탐사해 나갔다. 1585년의 첫 항해에서는 폭풍때문에 배를 돌려야 했지만 프로비셔가 조사했던 지역보다 훨씬 북쪽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컴벌랜드 해협을 발견했다. 다음해의 2차 항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587년의 세번째 항해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를 거쳐 베핀 만까지 진출했고 그때까지의 항해가들 중 가장 높은 위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 세번째 항해에서 그는 "7..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8. 프로비셔의 실패 마틴 프로비셔 마틴 프로비셔(Martin Frobisher 프로비서 아님)는 잉글랜드 웨이크필드 출신으로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아프리카의 기니만 무역선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영국 해협을 근거지로 플로렌스 지방과 오가는 에스파냐 운송선단을 습격하는 해적행위를 통해 프로비셔는 용감하고 노련한 뱃사람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일찍부터 북방항로 탐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576년 멕코비 회사의 자금 지원을 통해 20~25톤급 선박 가브리엘 호와 미카엘 호와 10톤급 핀네스 한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는데 성공, 6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한 후 북미대륙의 북동부를 통해 카타이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찾아나섰다. 영국 최고의 두뇌진이 제시한 낙관적 견해에 고무되기는 했지만 탐험대의 항로는 험난해서 그린란드 남쪽에서..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7. 베라차노의 바다 베라차노 죠바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의 삶에 관해서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는 1485년 피렌체에서 약 50km 떨어진 카스테라 베라차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7년 프랑스의 디에프 근처로 이사한 후 항해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동 지중해와 대서양일대를 항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4년 베라차노는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의 측량사로 근무하던 중 왕의 명을 받아 북아메리카 연안의 탐험여행에 나서게 되고 그 탐험으로 북미대륙에 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베라차노는 플로리다와 뉴펀틀랜드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으며 현재의 남 캐롤라이나 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 체샤피크 만과 델라웨어 강을 비롯한 오늘날의 뉴욕만 근처를 탐사했고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6. 북서항로의 선구자 북서항로의 선구자 1492년 크리스토발 콜론은 신대륙을 발견하여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전에도 신대륙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8세기 경에 코라틀을 타고 아이슬랜드를 발견했다는 아일랜드의 수도사 성 브랜든이나 그린랜드까지 정착한 바이킹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한 기록이 있다. 특히 레이프 에릭슨이 발견한 빈랜드가 뉴펀틀랜드 근처였을 가능성은 고고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14세기 부터 이어진 소빙기와 이누이트와의 대립 때문에 바이킹은 그린랜드를 포기했고 신대륙 발견의 영광은 역사의 중대한 변혁을 이루게 된 크리스토발 콜론에게 넘겨지게 된다. 이탈리아가 낳은 이 위대한 항해자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곳을 인도라고 착각했거나 또..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5. 북방항로 논전 북방항로 논전 이 논전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0년후 길버트는 "카타이로 가는 새항로의 발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당시의 논전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논란 당시에 길버트나 젠킨슨는 북동항로건 북서항로건 실제로 항해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양측은 모두 당시에 입수 가능했던 자료들에 의존해서 논쟁을 이어나갔다. 젠킨슨은 북동항로를 꽤 전진한 후 그 앞에 다시 열려있는 바다를 보았다는 타타르인 어부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들어 북동항로를 옹호했다. 그에 대하여 길버트는 "타타르인은 미개한 민족이며 항해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우기 해상에서 32km이상이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젠킨슨은 바렌츠 해에서 일각수의 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거..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4. 북서항로론의 대두 스티븐 버로우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로써 러시아와의 교역로가 개설되었다. 뇌제 이반의 치하였던 당시의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에 의해 서방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고 발트해의 교역로는 한자동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들의 방해가 없는 신 교역로는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이익이었고 당시에도 귀중품이었던 모피를 수입하게 되자 이에 고무된 모험회사의 투자가들은 3년뒤인 1556년, 스티븐 버로우(Steven Borough)의 지휘하에 새로운 북방항로 탐험대를 파견한다. 챈슬러의 항해사로 저번 항해에 참가했던 스티븐 버로우가 지휘하는 서치드리프트(Serchthrift) 호를 환송하기 위해 80세의 고령이 된 영국 최고의 도항사 세바스티앙 카보트가 그레이브샌드항까지 찾아와 직접 배를 둘러보..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3. 북동항로에의 첫도전 북방 진출에 있어서 먼저 시도된 것은 북동항로로, 이 항로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점을 강조하는 일단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들의 필두에는 존 디가 있었다. 당대의 대수학자이며 천문학과 지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메르카토르와 친분이 깊은 존 디는 당시 궁정점성술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에녹어"라고 하는 독특한 언어를 제창하여 대천사장 미카엘과도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바디랭기지의 달인 띠딕 존 디 선생은, 아라비아 지리학자들의 저작을 근거로 타빈곳이라고 하는 지점을 지나면 항로가 남동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단 이 항로를 통한다면 카타이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북해안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항로를 발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올..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2. 북방항로를 찾아서 "이제 발견해야 할 항로는 다만 하나, 북방으로의 진출 뿐이다. 이미 에스파냐는 서방의 바다를 발견했고 포르투갈은 동방의 바다를 발견하여 인도 제국에 도달했다."?? 1527년, 로버트 손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실리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 이외의 지구 대부분을 양분한 상태였으나 이 협약의 효력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 미치는 것으로 북방의 바다에 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당초 탐험가들은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라는 관념에 의존하여 북방항로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이 북방의 항로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는 좋은 반증이었다. 북방항로는 다른 항로보다 물부족의 위협은 덜해도 훨씬 더 험난했다. 열대에서는 1년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 북방으로 일찌기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15세기말 부터 유럽의 열강은 흑사병의 공포를 벗어나 자원 고갈로 인한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슬람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된 항해술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고 항로의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인도양 무역에 뛰어들어 향신료와 황금, 노예 무역을 기반으로 했고 에스파냐는 신대륙의 금은을 긁어들이고 있었다.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이들 국가들의 뒤에는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쟁국들이 있었고 그중에 북쪽에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막 벗어난 잉글랜드가 있었다. 1540년대, 오스만 해.. 더보기
전열함 -1 전열함(ship-of-the-line)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건조된 군함의 일종으로, 당시의 해군전술은 교전중인 선박들이 전열을 형성하여 정연한 통제하에 현측의 대포를 상대방에게 고정하고 포격전을 가하는 선형전술인 전열전술을 기본으로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포를 장비한 대형 함선이 필요하기에 가장 대형화되고 강력한 함선들로 전열을 형성했고, 이런 함선들을 전열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840년대 말에 증기기관이 도입되자 목조 전열함도 스크류 추진기를 장비했으며 그때까지 풍력에 의존하던 전열함들은 증기력과 풍력을 혼용해서 사용하게 되었고 철갑함이 보편화되면서 전열함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기원 그레이트 쉽, 카락, 갤리온 북해나 발트해 연안에서 건조된 코그는 선수루와 선미루에 궁.. 더보기
갈레온 갤리온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주로 유럽인들이 이용한 대형함선. 갑판이 여러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해전용, 상업용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되었다. 주로 사용한 무장은 데미 캘버린 포. 갈레온은 캐러벨이나 카락에서 출발해 유럽목조범선의 발전과정선상에 있으며 선수루가 두드러지게 낮아지고 선체가 비교적 길어져서 전체적인 조종성이 높아지고 정면에서 저항이 낮아져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고 조종도 편해지는 등, 다양한 장점이 있다. 갈레온과 카락의 구분 카락을 비롯한 앞시대의 선박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특징적이다. 1. 선체가 길고, 좁으면서 낮아졌다. 2. 고물 부분이 과거에는 둥글었는데 납작한 형태가 되었다. 3. 이물 부분에 선수루 앞으로 비쭉하게 튀어나온 긴 활대가 추가되었다. 갤리온이 카락보다.. 더보기
SMS Seeadler 2. 황제폐하의 해적단 태평양으로 나온 제아들러호는 크리스마스 섬 주변에서 새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미국 선박에 대해서도 통상파괴행동을 개시해서 6월 14일에는 미국 범선 존슨 호(A.B. Johnson, 529톤), 6월 18일에는 같은 미국 범선 슬레이드 호(R.C. Slade, 673톤)을 나포 격침했고, 7월 8일에는 미국 범선 마닐라 호(Manila, 731톤)를 나포 격침합니다. 하지만 영국, 미국, 일본의 초계망 속에서 행동이 제한된 제아들러 호는 식료와 물 보급도 부족해지면서 보급을 위하여 남태평양 상의 프랑스 령 소시에테 제도로 향했고, 7월 29일, 모페리아 섬의 외해에 투묘한 다음 며칠을 섬에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승무원들이 배를 비운 사이에 해일이 섬을 덮치면서 암초에 얹힌 제아들러 호는 결국 선체에 구멍.. 더보기
SMS Seeadler 1. 바다독수리 날다. SMS Seeadler (독일어로 바다 독수리라는 뜻. see eagle) 3돛대 윈드재머로 독일 제2제국에서 순양작전을 수행한 마지막 범선. 1888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로버트 던컨 컴퍼니에서 발마하 수로(Pass of Balmaha) 라는 이름으로 건조되었으며 강철선체의 1,571톤의 범선으로 1차대전 때에는 보스톤의 해리스 얼비 면화 회사의 소유인 미국국적 선박으로 되어 있었죠. Pass of Balmaha 제아들러의 탄생 1916년 6월 1일,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제해함대가 영국의 대함대와 무승부를 기록하고 물러나게 됨에 따라, 육군국인 독일이 해군국가인 영국을 위협할 수단은 많이 제한받게 되었습니다. 잔존함대를 킬 군항에 잔존시키면서 현존함대주의를 유지하는 동안 영국은 해상봉쇄를 통해 .. 더보기
해군 전술 -3 5. 보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니콜라스 2세. 비운의 황제이며 러시아 정교의 성인. 1904년 10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거대한 러시아를 어떻게 유럽의 질서에서 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역대의 로마노프 왕가가 고민하고 항상 바래온 부동항의 획득과 동쪽으로의 진출. 그 완결에 가까운 부분에 있어서 몇가지 사소한 장애가 남아있고 그것이 골치였다. 베조라조프. 선제의 총신 비데의 위치에 올라선, 니콜라이 2세의 총신이 열변을 토한 주장, - 만주와 요동을 거쳐 조선까지 점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쟁은 필요없고 국책 회사를 진출시켜서 산업 시설과 도시 시설을 건설하고 철도, 항만을 건설해서 러시아 자본을 넉넉히 주입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축출한다.. 더보기
해군 전술 -2 3. 청일전쟁 1886년 8월 1일의 나가사키. 청나라의 최신예 전함 정원, 진원호가 순양함 제원, 위원을 동반하고 입항했다. 명목상으로는 수리를 위해서 기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함외교로 무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당대 최강의 이 거함은 배수량 7,400톤에 주포는 12인치포. 3000톤 급 함을 사들이는 것도 버거워 하던 일본에게는 페리 제독의 흑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당대 최강의 거함. 방어구조가 특징적으로 함선의 중앙부에 citadel을 설치, 핵심보호 구역에는 두터은 크루프 강철을 덧대어 침몰되지 않는 강력한 방어력을 확보했다. 배의 좌우측에 12인치 주포 포탑이 설치되어 있고 전공함 사상에 따라 충각과 포를 배치한 것이 특징. 정원/진원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각기 먼.. 더보기
해군 전술 -1 해군전술에 있어서의 낭만주의 조지 로드니 제독 로드니 경의 6대손. 1782년 4월 12일, 영국해군의 로드니 제독은 도미니카 앞바다에서 급작스러운 풍향의 변화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 해군의 전열이 혼란에 빠지자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의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장애물은 적, 프랑스의 콩 데 그라스 제독과 그의 함대만이 아닌 영국해군 철의 규율을 수호하는 전열전술이었다. 전열함. Ship of the line. 말그대로 전열을 구성할 수 있는 강력한 군함. 영국해군은 로버트 브레이크 제독이 1653년 해군교범에서 기술한 이래 전열 전술의 원칙에 철저했고 그 전통은 백년 이상 말라가, 미노르카, 퐁디셰리, 도거 뱅크에서 영국해군에게 우위를 보장해 주었다. 더 이상의 전투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 더보기
CSS Stonewall Sphinx, Stærkodder, CSS Stonewall, 코데츠(甲鐵), 후일의 아즈마(東) 철갑함>은 남북전쟁 중에 남부동맹이 구입했다가 종전 이후 일본에 넘겨져 일본 해군 최초의 철갑함으로 취역한 군함이다. 이 배는 프랑스에서 1864년 건조되었고 1869년 미군에게 인도되었다. 보신전쟁의 후기에 메이지 정부군의 주력으로 1869년 5월의 하코다테 해전에서 주역을 맡았다. 동형함인 셰오프는 프로이센 해군에 매각되어 프린츠 아달베르트(Prinz Adalbert)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Prinz Adalbert 소속 : 프랑스 > 덴마크 > 남군 > 스페인 > 미해군 > 일본 진수 : 1864.06.21 배수량 : 1,358 톤 길이 : 193.5 피트 넓이 : 31.5 피트 홀수 : 4.3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