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9년 툴룽항구에서 "루땡"(Lutin)이라는 이름의 마지시오네 급 프랑스 해군 프리깃 1척이 진수했습니다.
이 배는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함대에 소속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에 휘말려서 기구한 운명에 휘말려 들게 됩니다.
후드제독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은 1793년 툴룽을 봉쇄했고 이 도시를 장악한 왕당파는 16척의 전열함과 프리깃 함을 영국 해군에게 넘겨주었으며 그와 함께 루땡 호도 영국해군에 편입되어
툴룽 포격을 위해 박격포함으록 개조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해군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가 유리했지만 나폴레오네 부오네파르데라는 이름의 젊은 장교가 이끄는 혁명군이 툴룽의 포위를 돌파하자 영국해군이 물러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나폴레옹이 영광으로 향하는 그의 전설을 시작했다면 루땡호는 HMS Lutin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영국해군 북해 함대에 배치되었습니다.
HMS Lutine
이때까지는 별로 유명할 것이 없었던 이 38문형 5등급 프리깃함은 영국군이 네덜란드를 공격하면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됩니다.
던컨 제독의 영국 북해함대가 켐퍼다운 해전(1797)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격파하고 상륙한 영국-러시아 연합군의 보급을 지원하고 있던 중 루틴 호에게는 함부르크 은행의 도산을 막기위한 지원금으로 120만 파운드 상당의 금화와 은화를 수송하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1799년 10월 8일, 루틴호는 네덜란드 앞바다에서 밤중에 폭풍우를 만나 어둠속에서 모래톱에 걸린 루틴호는 만재된 화물 때문에 좌초되었으며 이 사고로 오늘날의?기준으로 81,176,969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금, 은을 차마 버리지 못했던 루틴호의 선원 240명은 단 1명을 제외하고 침몰된 배와 함께 희생되는 대형 해운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루틴 호의 해난사고는 엄청난 규모의 대형 해상사고지만 당시 영국은 인양이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막 유명해지기 시작한 로이드 해상보험의 판단으로도, 침몰지점이 연안에 가깝고, 가라앉은 지점도 해수면 7.6m에 불과했기에 거액의 보험금을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틴호의 상황은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썰물때면 루틴호의 선체가 간혹 해수면 위로 드러날 때도 있었지만 침몰지점은 조수가 거세 접근조차 힘들었고 화물은 갯펄에 뭍혀버렸다.
수많은 난관을 딛고 인양이 시도되었지만 건져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닻과 종을 비롯한 약 9만 9863파운드 상당의 화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858년 7월 17일에 건져올린 루틴호의 종은 로이드 보험사의 상징이 되어 오늘날에도 라임 가의 로이드 본사 건물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루틴호의 종은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울리고 있는데, 2차대전 중에 나찌의 선전방송은 대서양에서 U보트에게 연합군 선박이 침몰될 때마다 계속 울릴것이라고 선전했었지만, 실제로 2차대전 중에 이 종이 선박의 침몰로 울린 것은 독일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비스마르크 호가 침몰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종은 추모할 만한 대형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울리고 9.11 사태,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건, 다이아나 황태자비 사망 사건 등에서도 울렸습니다.
오늘날에 이 종은 2차대전 종전일에 타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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