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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북방항로 도전기 2. 북방항로를 찾아서

"이제 발견해야 할 항로는 다만 하나, 북방으로의 진출 뿐이다. 이미 에스파냐는 서방의 바다를 발견했고 포르투갈은 동방의 바다를 발견하여 인도 제국에 도달했다."?? 1527년, 로버트 손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실리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 이외의 지구 대부분을 양분한 상태였으나 이 협약의 효력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 미치는 것으로 북방의 바다에 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당초 탐험가들은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라는 관념에 의존하여[각주:1] 북방항로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이 북방의 항로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는 좋은 반증이었다. 북방항로는 다른 항로보다 물부족의 위협은 덜해도 훨씬 더 험난했다. 열대에서는 1년 내내 항해가 가능하지만 북해에서는 겨울이면 몇달이나 맹렬한 눈보라가 게속되어 시계를 꽉 막아버리고 만다. 안개속에서 예고없이 맞닥드린 빙산에 배가 부딪히면 여지없이 두쪽이 나고 무엇보다 북으로 다가갈 수록 나침반을 믿을 수 없게되어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해협, 협만, 섬이 복잡하게 뒤얽힌 극지의 양상은 계절마다 변화하며 사람의 접근을 거부했다.

도전자들

북방의 항로에 있는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 처럼 뒤늦게 항로개척에 뛰어든 후발 주자들에게 북방항로의 가능성은 시장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서 크나큰 매력이 있었다.

항로 개척을 주장하고 직접 뛰어든 이들은 운명을 건 모험에 매혹된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그와 함게 모험 가능성을 신중히 저울질할 줄도 아는 학구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젠트리 계급이 된 상인계층답게 이재에도 밝았고 왕실과의 커넥션을 통해 지도층이 소장하고 있는 중요한 지리 정보를 접할 수도 있었다.?

당시 지리정보는 국가의 중요 기밀로 포르투갈 같은 국가에서는 지도를 국외로 반출할 경우 극형에 처할 정도로 항로의 비밀을 유지하는데 극성이었다. 북방항로에 뛰어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경우 얻게될 이익을 꿈꾸며 항해왕 엔리케가 그러했듯 하나하나 항로에 대한 정보를 모아나갔고 항해중에 만나게 될 많은 위험을 극복할 방법을 연구하면서 야심차게 북방항로에의 진출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이 북방항로를 통해 카타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북동으로 갈 것인지 북서로 갈것인지의 방법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동항로파와 북서항로파는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불확실한 정보들에 휩쓸리기 쉬웠기에 북방항로의 역사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탐험과는 달리 시종일관 실패담으로 점철되게 된다.

  1. 18세기 중반에 제임스 쿡 선장이 남극해의 빙산을 보고 바닷물이 얼 수도 있다는 가설을 검증하기까지는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