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으로 나온 제아들러호는 크리스마스 섬 주변에서 새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미국 선박에 대해서도 통상파괴행동을 개시해서 6월 14일에는 미국 범선 존슨 호(A.B. Johnson, 529톤), 6월 18일에는 같은 미국 범선 슬레이드 호(R.C. Slade, 673톤)을 나포 격침했고, 7월 8일에는 미국 범선 마닐라 호(Manila, 731톤)를 나포 격침합니다. 하지만 영국, 미국, 일본의 초계망 속에서 행동이 제한된 제아들러 호는 식료와 물 보급도 부족해지면서 보급을 위하여 남태평양 상의 프랑스 령 소시에테 제도로 향했고, 7월 29일, 모페리아 섬의 외해에 투묘한 다음 며칠을 섬에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승무원들이 배를 비운 사이에 해일이 섬을 덮치면서 암초에 얹힌 제아들러 호는 결국 선체에 구멍이 뚤려 더 이상의 항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루크너와 선원들은 섬에 "제아들러부르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루크너 선장은 배를 잃고도 작전을 속행하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고, 섬을 벗어나서 적절한 함선을 새로 구할 결심을 합니다.
8월 23일에 5명의 선원들과 함께 크로프린체신 세실(Kropinzessin Cecilie)이라고 명명한 보트로 모펠리아 섬을 떠나 쿡 제도로 향하면서 섬에 남은 대원들의 지휘는 크리크 대위에게 맡겨서 3개월이 지나도 루크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탈출책을 세우도록 지시합니다.
8월 26일, 아치우 섬에 도착한 루크너와 부하들은 섬의 영국 관리의 눈을 속이기 위해 네덜란드 계 미국인 행세를 하고, 다시 8월 29일 아이트타키 섬에서는 노르웨이 인 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배를 손에 넣지 못하자 이번에는 피지 제도를 향하기로 하는데, 험난한 항해로 기진 맥진한 상태로 피지 제도 구석의 니웨 섬에 간신히 도착합니다.
9월 19일, 니웨섬에서 기력을 회복한 루크너와 부하들은 피지 제도의 와카야 섬에 도착, 모페리아 섬을 출항하고 나서 28일 동안 3700km를 보트로 항해한 셈이었죠. 여기서 나포할 범선을 물색하던 루크너는 입항한 스쿠너에 노르웨이 선원의 모습으로 입항허가를 얻어 해상으로 나온 다음 뺏을 생각이었지만 9월 21일,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영국함 아람호가 헌병을 싣고 입항하여 루크너는 체포됩니다.
루크너와 부하들은 피지 제도의 수도인 수바(Suva)의 감옥에 투옥되고 제아들러 호 승무원들의 행방을 심문당하지만 협조하지 않다가 포술장인 칼 키르히아이스 대위와 함께 다른 4명과 달리 오클랜드로 옮겨졌다가 모트이히 섬으로 이송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독일 포로들과 함께, 탈출계획을 세워서 크리스마스 파티 연극을 한다는 명목으로 탈출용 도구로 폭탄, 권총, 군복, 칼, 육분의, 독일 국기, 돛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12월 13일, 루크너와 키르히아이스는 6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수용소장의 모터보트, "펄"호를 훔쳐내서 도주하고, 16일에는 모아 호(Moa)를 나포하여 케르마데크 제도로 향했지만 21일, 뉴질랜드 해군의 보조순양함 아이리스 호에 의하여 다시 체포되고, 모트이히 섬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시 탈출계획을 세우는 도중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죠.
전쟁이 마무리 되었으니 이쯤에서 우리의 선장, 불굴의 의지를 가진 루크너 백작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Felix Graf von Luckner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귀족출신으로, 1881년 6월 9일 드레스덴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루크너 백작가는 대대로 기병 사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증조부가 되는 니콜라스 콩테 폰 루크너는 기병대를 인솔하여 각국을 돌아다녔으며 덴마크에서 백작의 작위를 얻었는데, 나중에는 프랑스에서 육군 원수로 라인방면군을 지휘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방면군 사령관 루크너 백작에게 헌정된 것이죠. 그런 군인가문에서 태어나 부모님들은 당연히 장교가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어릴적부터 해군 사관이 되는게 꿈이었던 루크너는 13살에 가출하고 무작정 함부르크로 갔는데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받아주지 않았지만 우연히 피터 브로이머라는 선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러시아 범선 니오베 호를 타게 됩니다. 배에서 급사일을 하며 오스트레일리아로 간 루크너는 이후 7년동안 호텔의 접시닦이, 구세군 단원, 등대지기 조수, 사냥꾼, 복싱선수, 멕시코 군인, 철도 부설 노동자, 바텐더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경험을 쌓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1903년 독일로 돌아온 루크너는 뤼벡에서 항해사 훈련학교에 입교하고, 졸업한 다음에는 준사관의 지위로 독일과 미국간 정기항로의 기선 페트로폴리스에 승함하여 9개월 동안 경험을 쌓고, 지원병 자격으로 1904년 독일해군에 입대합니다.
1905년 염원하던 해군사관이 된 루크너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아들이 일찌감치 죽었다 생각하던 부모님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겠죠. 이후로도 정기선에서 근무하던 그는 1907년에 선장시험에 합격하고 1912년에는 해군 장교로 프루젠(Preusen) 호에 배속되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서커스 단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루크너는 마술을 배웠는데,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그의 앞에서 이 마술을 보여주었는데 이게 황제의 마음에 들어서 사관 교육때의 수업료 일체를 황제가 지불해 준 데다가 현역 근무 일시를 예비사관 근무시까지 추산해서 진급이 빠르게 되도록 편의를 봐줍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에 파견되어 포함 판터호로 전속되는데, 카나리아 제도에 들렀을 때 독일인 실업가의 딸 이르마(Irma)를 만나 그녀와 약혼하게 되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었을 때는 크로플린트 빌헤임에 승선해서 포술장교로 헬골란트와 유틀란트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나중에 이 "황제폐하의 해적단" 선장을 맡았던 것이죠. 전쟁이 끝난 1919년 7월 루크너는 독일에 귀국하여 대환영을 받고, 전쟁영웅으로써 Pour le Mrite(블루막스) 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결혼도 하고,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1920년에는 칠레에서 귀국한 부하들과 재회 [footnote] 모페리아 섬에서 대기하던 부하들은 루크너가 체포되었다는 무선을 수신하고는 탈출 계획을 세우던 중, 제아들러 호의 잔해를 발견하고 접근해온 프랑스 스쿠너 선 류티스(Lutece) 호를 빼앗아 포르튜나(Fortuna)호로 개명하고 남아프리카로 향하는 중에 이스터 섬 주변에서 난파되었다. 칠레 기선을 얻어타고 칠레에 도착하여 식민지 독일인 신세를 지다가 종전 후에 귀국 [/footnote/]의 기쁨도 누린, 좋은 시절이었죠. 1921년 독일해군 연습함 니오베호의 함장이 되었고 같은 해에 프리메이슨에 입회한 루크너는 1922년에 해군 소령으로 퇴역하고 아내와 함께, 어릴적부터의 또 다른 생각하고 있던 미국을 방문, 7년간 지내며 많은 주에서 명예시민으로 임명되었으며 2차대전에서는 나찌에 반항하다가 부자유스러운 생활도 감수해야 했지만, 전후에는 다시 각국을 돌아다니다가 1966년 스웨덴의 마르메에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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