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현이 높은 범선들은 언제나 갤리선의 만만치 않은 맞수였고 삼각돛과 사각돛을 조합한 전장범선이 발달하고 대포의 위력이 증가하자 갤리선은 황혼을 맞이했다. 하지만 갤리의 황혼기는 대포가 개발되기 전부터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1
1034년 덴마크의 무역 선단은 비용과 효과의 문제로 호위선을 갤리선에서 코그선으로 교체했다. 파고가 높은 북해에서 갤리선은 빠르게 범선으로 대체되었지만 잔잔하고 풍향이 일정치 않은 내해인 지중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지중해에서 갤리선은 1595년~1605년 부터 활용도가 줄었지만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만들어진 범선이 상업교역로에 유입되기 시작한 17~18세기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새로 도입된 전장범선들은 보다 많은 화기를 장치할 수 있었고 항해성능도 뛰어나 해적의 위협에 대응하기 좋았고 운용비도 비교적 저렴했다. 하지만 갤리선은 여름철에 풍향에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이외에도 몇가지 장점이 있었고 지중해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는 베네치아를 비롯한 국가는 여전히 갤리를 이용했다. 하지만 건현이 낮고 적재용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갤리선은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해안에서 단거리를 운항하는데만 사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상선들이 원양을 항해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범선의 전투능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갤리선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5세기 말에 범선의 주류가 카락에서 갤리온으로 발전하면서 원양항해가 가능한 전장범선이 등장했다. 이들은 대포로 중무장되어 있었고 태킹을 이용해 풍향을 거슬러 항해하는 능력으로 바람이 잔잔한 해안주변에서도 갤리를 압도했다. 이러한 범선의 갤리에 대한 우위는 1519년 포르투갈이 디우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명백해졌고 1616년 스페인의 소규모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대형 갤리 선단을 격파하면서 집단전에서 범선의 우위는 확고해졌다. 해전의 주류는 백병전에서 포격전으로 전환되고 있었고 1660년대에는 베네치아 처럼 순수하게 지중해에서만 해양력을 발휘하는 국가들도 전장범선을 주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17세기에도 갤리선은 여전히 한정된 용도로는 유용성을 발휘했다. 유명한 해적 키드 선장이 자신의 해적선애 ‘어드벤처 갤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해군의 주력위치는 범선에게 내주었지만 해적선으로는 여전히 갤리가 유용했다. 북아프리카의 콜세어 함대에서 갤리는 여전히 주력으로 남았고 18세기까지도 지중해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다. 1770년의 셰마 해전에서도 갤리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798년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에서 지중해의 갤리선은 멀리 북방에 있는 발트해 연안에서 새롭게 위력을 발휘할 곳을 찾았다. 북방전쟁에서 스웨덴과 싸우던 표트르 대제는 보드니아 만의 복잡한 해안과 얕은 바다에서 갤리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자신이 직접 조선공으로 일했던 네덜란드의 조선소에 갤리선 설계도를 요구했다. 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러시아의 발틱 갤리들은 위력을 발휘했고 스웨덴도 갤리선으로 맞섰다.
하지만 1798년 갤리를 중심으로 하는 몰타 기사단의 해군은 나폴레옹의 포위에 저항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와 함께 갤리의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 BC 413년 패배한 트라이림들은 대형 상선뒤에서 공격을 회피했다. - 투키디데스 7, 1, 니담 4, pt3, p69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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