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지중해를 둘러싼 단일 문화권을 형성한 로마는 해적을 포함해 항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제거했지만 서로마가 멸망하고 북아프리카와 유럽간의 교역이 단절되면서 중세 유럽의 항해문화는 답보상태에 놓였고 부분적으로는 퇴보했다. 중세 중기 이후에 가장 활발한 활약을 벌인 해양세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유럽 계 바이킹으로 이들은 북유럽 연안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내륙부나 지중해, 심지어는 아랍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유럽의 해양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중세 유럽의 가장 오래된 갤리선 설계도는 시실리아의 카를 1세의 명에 의해 1275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약 40m에 홀수 2m, 넓이 3.6m에 달하는 이 갤리선에는 길이 6m의 노가 약 108개 있고 전체 중량은 80톤 정도로 사람 두명이 앉은자세에서 노를 젓는 구조였다. 중세의 갤리들은 점진적으로 선수 부분에 초보적인 투사식 무기들을 부착해 적함의 노부분을 파괴할 수 있도록 발전했으며 16세기에 들어서는 노 하나를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방식을 도입해 추진력 증가와 크기 확대를 노렸다.
중세 갤리의 발전이 정점에 달한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참가한 베네치아의 갤리선은 길이 약 42m에 넓이 5m로 건조중량이 140톤에 달했으며 기함급은 보다 커서 중량이 약 180톤에 달했다. 보편적인 갤리에는 양쪽에 24줄로 노가 배치되어 있었고 노 하나를 세명이서 젓도록 되어 있었으며 선원으로는 장교가 약 10명에 선원 65명과 포수 및 다른 인원을 포함해 약 138명 정도가 탑승했다. 보통 갤리들은 50파운드 캐논포나 32파운드 캘버린 포를 고물쪽에 장비하고 주변에 4문 정도의 부포를 배치했다. 보다 소형의 갤리선인 랜턴에는 12~6파운드 캘버린 포와 8문의 경포를 설치했다.
중세 북유럽의 갤리
북유럽의 조선문화는 지중해에서 중간단계의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는것과 달리 유명한 곡스타드 선을 비롯해서 상당수가 발견되어 있다. 1263년부터 1500년대까지 스코틀랜드 서부의 바이킹계 귀족들은 자신들의 봉건질서를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와 헤브리지, 아일랜드 일대에서 세력권을 확장하는데 갤리선을 이용했다. 이들은 종교적인 전통을 따라 귀족을 매장할때 생전에 사용했던 선박을 함께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렇게 매장된 배들은 중세 북유럽의 조선문화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바이킹이 사용한 나르나 롱쉽에서 발전한 북유럽 갤리들은 클링커 빌드, 사각돛, 노 배치를 비롯해서 독특한 구조를 따르고 있다.곡스타드 선은 약 AD 850 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과거의 배들과는 달리 돛대를 꽂을 수 있도록 된 용골을 갖춰 노만이 아니라 돛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길이 23m, 폭 5.1m, 깊이 2m의 이 배는 노를 뱃전이 아니라 뱃전 옆에 난 구멍을 통해 젓게 되어 있어 거친 바다에서 돛을 펼치고 항해할 때에는 노 구멍을 닫을 수 있도록 정교한 뚜껑을 설치하는 등 험한 북해의 외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이킹 선에서 발전한 이런 선박은 나중에 보다 느리지만 더 많은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코그선에 대체되기 까지 북해와 발트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상업적 이용
14세기 전반에 베네치아의 국영조선소에서는 galere da mercato(merchantman galley)라는 갤리를 상업용으로 활용했다. 국영기업과 수입상인 연합체는 이 갤리선을 이용해 운송선단을 조직했고 각각의 갤리선은 궁수들과 투석기를 배치해서 해적이나 적대국가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14~15세기에 상업용 갤리들은 고가의 상품과 승객들을 실어날랐으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까지 흑해에서 지중해를 거쳐 북해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수송망을 연결했다. 베네치아의 갈레어는 100톤에서 300톤 까지 다양한 크기로 건조되어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었지만 추진력으로 노를 사용하는 특징때문에 운용인원이 많이 필요했고 이때문에 제노바의 카락선이 동시대에 1,000톤 가량을 실어나를 수 있었던 것에 비교하면 운송능력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갤리선은 바람의 방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운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기적인 기한에 맞추어서 운송되어야 하는 일에는 적합했다.
1430년 2월 23일 사우댐프턴을 출발한 플랜더스 갤리가 32일만에 피사에 도착한 항해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 배들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운행되었고 덕분에 항해 보험을 들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갤리선의 크기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나중에는 해상 요새로 불리워 지는 갤리어스의 크기까지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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