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것은 관계자들에게는 이론적인 보증수표였다. 일찌기 윌로우비와 버로우가 북위 71도의 노드 곶을 통과했었으므로 그 이상 항해하기 힘든 곳이 없다면 거리의 문제일뿐, 불가능한 항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지리학자였던 게르하르트 메르카토르도 "동방항로를 통한 카타이 항해는 의심할 바 없이 용이하며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라고 찬성의견을 표시했다.
이리하여 많은 준비를 갖춘 엄선된 탐험대를 이끌고 북동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아서 페트와 찰스 잭맨이었다. 그들은 "버로우의 해도를 참고해서 카라해를 통과할 때까지 전진하고 다음에는 전설적인 타빈 곶을 우회하여 측량하면서 전진"하라는 상세한 지시를 받고 있었으며 디는 이렇게 항해할 경우 1개월도 안 걸려서 카타이의 수도나 북중국의 항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당대의 명망가들의 보증과 지지를 받아 성대한 출발연을 벌인 탐험대는 용기백배해서 5월 30일 울위치 항을 출발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달랐다. 예상과 달리 탐험대는 1개월은 커녕 3개월이 지난 8월에 들어서도 카라 해에서 얼음과 절망적인 싸움을 벌여야 했다. 결국 북해의 끔찍한 빙산들과 태풍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잭맨의 탐험대는 노르웨이 해안 앞바다에서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고 페트는 빈사상태에 처한 선원들과 폭풍에 시달린 끝에 구사일생으로 영국에 돌아왔다.이 실패의 파장은 심각했다. 무엇보다 실패가 반복되자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지리학적 발견의 유용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동시기, 존 호킨스나 프랜시스 드레이크같은 유명한 사략해적의 대성공도 이런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원래는 테라 오스트랄리스-남방대륙의 탐험이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1577년 항해목적이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과 국무대신 프랜시스 월싱검의 계산에 의해 항해의 목적은 출발직전에 사략활동으로 변경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능하다면 아니안 해협을 통해 북미해안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아니안 해협
북서항로의 도전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동해안에서 서쪽으로 진행되었지만 역으로 서쪽에서 북서항로를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일찌기 1539년 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프란시스코 데 우욜라(Francisco de Ulloa)를 파견해 북미 서해안을 탐험하게 했다. 우욜라는 아카풀코를 출항하여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상해 켈리포니아만 깊숙히가지 진행했지만 출구를 찾지는 못했다. 이는 당시의 통설과 달리 캘리포니아가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증거였지만 오히려 캘리포니아 만이야말로 북미동안의 세인트로렌스 만에서 아니안 해협을 통해 이어지는 항로의 남단이라는 견해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니안 해협(Strait of Anian)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등장하는 중국지명 아니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 해협은 이탈리아의 지도제작자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가 1562 발행한 지도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5년후 보로니니 자루티에리 (Bolognini Zaltieri)가 발행한 지도에는 아시아와 미국 사이에 좁고 구불구불한 상상의 해협이 그려져 있었다. 유럽인들은 점점 상상속의 해협을 키워나가 중국과 유럽을 잇는 직통항로로 그려져 북서항로를 탐험하는 사람들은 샌디애고 부근의 위도에 있다고 알려진 이 항로를 찾는데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링크
연관글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1. 북방으로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2. 북방항로를 찾아서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3. 북동항로에의 첫도전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4. 북서항로론의 대두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5. 북방항로 논전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6. 북서항로의 선구자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7. 베라차노의 바다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8. 프로비셔의 실패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10. 허드슨의 비극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11. 바렌츠의 모험
[History] -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History > Ship and Sa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갑선의 기술과 전술 (2) | 2009.04.23 |
---|---|
마법사인가 수학자인가, 존 디의 삶 (0) | 2009.04.23 |
갤리 6. 갤리선 시대의 종말 (0) | 2009.03.29 |
갤리 5. 중세의 갤리 (0) | 2009.03.28 |
전열함 -2 (2) | 2009.03.27 |
코그 Cog (0) | 2009.02.02 |
컨셉시온 호와 윌리엄 핍스 (0) | 2009.01.03 |
루땡호의 종 (0) | 2009.01.02 |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1) | 2009.01.02 |
북방항로 도전기 11. 바렌츠의 모험 (0) | 2009.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