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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북방항로 도전기 8-1. 혼란의 북방항로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 더보기
제1차 인티파타 1987년 오슬로 합의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설립된 이후부터 1993년 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폭력사건의 총칭. 투석 투쟁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인티파타라고 하면 제1차 인티파타를 의미하며 1차 인티파타라고 부르게 된 것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알 아크사 인티파타를 제2차 인티파타로 부르게 된 다음부터이다. 경위 발단 1987년 10월 1일,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의 가자출신 구성원 7명을 매복 사살하고 며칠 뒤에는 이스라엘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을 배후에서 총격하고 이에 대해 12월 4일에는 슈로모 사칼이라는 이스라엘 세일즈맨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스라엘 국방군의 트럭이 자동차에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고로.. 더보기
오슬로 협약 이후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드리드의 이정표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제1협약 : 실패가 예언된 원칙 선언 : 미국과 러시아가 후원한 이스라엘과 PLO 간의 비밀 노르웨이 협약에 의함. 2년의 기한을 두고 자치정부를 구성 1994년 5월 4일 - 가자와 예리고를 우선으로 하는 카이로 합의 :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5년 기한의 전환 작업이 시작됨. 1995년 9월 28일 - 오슬로 제2협약 : 준비협약으로 A, B, C 지역으로 세분화된 지역에서 최종 협약 타결을 위한 준비기간 1996년 1월 -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당선됨 1996년 5월 - 항구적 평화합의를 위한 기념할만한 출발 - 이스라엘 선거로 실질적 협상이 지연됨 1991년 4월 1.. 더보기
이스라엘 안보지도 골란고원 골란고원은 군사적으로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 및 평야지대와 이스라엘의 유일한 담수원인 갈릴리 호수 주변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골란고원은 대략 뉴욕의 퀸즈 정도의 크기로 전체 지역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5 1/2 마일 정도이다. 1967~1982 시나이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 본토보다 3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으로 1982년 이스라엘보다 50배 이상 영토가 넓고 10배 이상 인구가 많은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유대 사마리아 유대아와 사마리아는 요르단강 서안을 일컫는 표현이다. 1949년 휴전협정선에서 지중해까지의 길이는 가장 좁은 곳이 9마일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인구의 약 절반이 이 좁은 회랑지대에 모여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발전설비를 비롯한 공업시설과 금융시설 대부분이 이 .. 더보기
파시즘과 정치스펙트럼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는 정치 스펙트럼에서 파시즘의 위치는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없다. 파시즘 우익설 파시즘은 사상적으로 계급투쟁 보다는 계급간의 협력을 선호하며 국제주의보다 국가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1932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철학자 지오바니 젠틸(Giovanni Gentile)은 파시즘이 집단적이고 우익적인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가 사회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세기였다고 해서 20세기에도 이념분포가 그와 같은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존재하지만 정치적 이념은 변화한다. 우리는 20세기가 권위의 세기이며 우익화되는 성향이 있는 파시스트의 세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19세기가 개인주의의 세기였다면(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포함한다.) 우리는 20세기가 집단의 세기,.. 더보기
이스라엘이 바라본 중동분쟁 UN 1947년 분리독립안 1947년 11월 29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2/3의 찬성으로 유대와 아랍의 분할독립안을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지도상의 푸른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유대인에게 배정된 지역의 75%는 사막이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한 천국은 아닐지라도 유대인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분리안을 받아들인다. 반면 아랍은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유대인 국가도 수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분리독립안을 거절한다.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예맨 등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했고 결의안이 무효라고 선언한다. 1948년 아랍침공 아랍국가들은 분리안을 반대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다음날 아랍연합 총장 아잠 파샤는 성전.. 더보기
코그 Cog 코그선은 10세기부터 등장해서 12세기 무렵에 발트 해 주변의 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선박이다. 발트해 연안에서 풍부한 목재인 떡갈나무로 건조되었고 보통은 마스트 1개에 가로돛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가로돛만 장비한 선박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항해하기가 어렵지만 운항에 필요한 승무원의 수가 적으므로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1380년의 코그선 구조 코그선의 구조는 중간부에서는 평평한 구조의 평저선 선저에서 선수와 선미 부분으로 갈수록 잇대어 이어진 외판을 덧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선의 밑부분은 통칭 빌지(배 밑바닥에 침수되는 물을 모아둔 부위)에 외판을 덧대어가는 구조로 판은 쇠못을 양단으로 굽혀서 고정한다. 용골은 지중해의 카벨 빌드와는 달리 측면판보다 약간 두터울 뿐인 클링커 빌드로 이.. 더보기
안네의 일기 ; 진위논쟁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조숙한 소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키티라는 제3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표현 스타일에 있다. 나찌 치하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은 모종의 두려움으로 표현될 뿐 생활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극장의 우상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안네는 그런 삶에서도 희망의 끈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안네의 일기는 최종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암스테르담 주둔 보안경찰 SD에 발각되고 은신처의 8명중 7명은 각기 다른 수용소에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 뿐이었다. 보안경찰이 은신처를 수색한 뒤 마루 위에 흩어져 있던 문서들을 모아두었던 협조자들은.. 더보기
2차대전갤 정리 4. 미디어 2007 승전기념식???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8050&page=206 2대전입문서적???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7067&page=557 2대전입문영화???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7151&page=554 2대전입문영화???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7164&page=553 2차 로봇대전???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7765&page=215 2차대전배경소설??? http:/.. 더보기
2차대전갤 정리 3. 인물편 2대전지도자???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111&page=747 2차대전 종군한국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3680&page=337 2차대전과 연예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4464&page=313 2차대전한국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645&page=764 가미카제 한국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8586&page=508 갈레아조 치아노??? http:.. 더보기
2차대전갤 정리 2. 무기편 100식 기관단총???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4968&page=620 128mm에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8553&page=192 14형 잠수함???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0824&page=136 15인치포 성능비교???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8779&page=499 15인치포 성능비교???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8791&page=499 1식 중전차 치해??? .. 더보기
2차대전갤 정리 1. 일반 20mm포 탑재항공기?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0557&page=143 2차대전 최강함포?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8300&page=518 3차 하르코프 공방?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7609&page=220 3차 하르코프 공방?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17622&page=220 44년 전반기 동부전선?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0148&page=153 44년 전반기 상황일지.. 더보기
독일의 전후배상 "우리는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독일과 적대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마음이 아프더라도 되새기고 청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 화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뼈아픔은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1985년 5월 8일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제2차대전 40주년 기념연설 같은 해 일본의 나카소네 수상은 '.. 더보기
레바논 내전 7. 출구없는 미로 전쟁은 도박과 같아서 시작하기는 쉬운데 그만두기가 힘들다. 이스라엘은 PLO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으며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군비를 확충하고 있음을 전재로 전쟁을 시작했고, 시리아와 PLO가 레바논에서 축출되면서 물러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어떻게 전쟁을 끝내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계획했던 종전 작업은 레바논에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레바논 군을 재조직하여 시리아와 PLO? 세력을 몰아낸다면 리쿠드 당이 약속했던 40년간의 평화도 멀지 않을듯 했다. 바시르 제마엘. 팔랑헤당의 창립자인 피에르 제마엘.. 더보기
레바논 내전 6.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은 최신예 메르카바가 시리아군 T-72를 압도한데 힘입어 다시금 기갑부대간의 교전에서 승리를 장식했다. 이스라엘의 자국산 최신예 메르카바가 환상의 무적전차로 알려져 있던 소련의 T-72를 승무원 손실없이 제압해버리자?시리아 군은 더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메르카바는 히브리어로 전차(Chariot)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자국설계, 자국생산 전차인 메르카바는 두터운 전면장갑을 바탕으로 높은 생존성을 자랑하며 굴곡이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자국지형에 맞게 설계되었다. T-72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이미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군은 결국 11월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아랍세계에서 고립된채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벌이게 될 상황이.. 더보기
유대인 절멸의 문서적 근거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절멸 명령’을 기록한 문서는 발견된 적은 없고, 대부분의 경우에 유대인을 절멸시키라는 것보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조치”, “궁극적 해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나찌가 유대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 내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찌 독일에서 행해진 수많은 발언들 중에는 그러한 절멸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며 1939년 1월 30일에 히틀러가 독일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는 그러한 “절멸 의도”에 대한 증거로서 자주 인용된다. ”만약 국제 유대인 자본이 독일 제국을 다시 세계전쟁에 빠트린다면 그 결과는 지구의 볼셰비키화나 거기에 따른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5. 베카 계곡의 공중전 6월 9일, 시리아와 PLO는 전진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을 레바논 중부의 방어 거점에서 저지하고 있었다. 자동차에 탑재한 Sagger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스라엘도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ATM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격렬한 지상전을 거듭하면서도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의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이 시점까지 아직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전면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지난 전쟁에서 맹위를 떨치며 이스라엘 공군을 괴롭혔던 시리아군 SAM과의 2라운.. 더보기
레바논 내전 4. 작전명 갈릴리의 평화 1982년 PLO는 병력 15,000명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000여명이 남부 레바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기동중인 이스라엘 전차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차호에 은폐되어 있었다. 또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츄사 방사포 80문 및 120mm~ 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 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무장의 속도도 밀수의 천국이 된 레바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 더보기
레바논 내전 3. 시리아와 이스라엘 레바논 정부가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남부 지역에 파타랜드라고 불리는 PLO 지배 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테러활동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PLO는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이나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해서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남레바논 및 베이루트를 공격했고 이것이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기독교 마론파 소속의 팔랑헤당이 교회에서 집회를 거행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PLO지지자들의 버스가 교회에 발포, 팔랑헤당도 이에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하여 내전이 재개되었다. 또 같은 시기 남부의 시돈에서도 수니파의 어민이 .. 더보기
홀로코스트 부인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주류 역사계에서 논하는 홀로코스트, 이른바 2차대전중 나찌 독일에 의해 발생한 유대인 제노사이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사실 관계의 불명확 또는 의심스러움에서 홀로코스트의 실재를 의문시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부인론 측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용하는 용어이며 부인론자 측에서는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증거나 확립된 방법론을 이용한 역사연구가 아니라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학에서의 수정주의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현재의 주류적 견해는 유대인의 음모에 의한 것이며 이 음모는 유대.. 더보기
레바논 내전 2. 국가속의 국가 PLO 1960년대 아랍권은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사건(1956)으로 나세르 주의가 열풍처럼 휩쓸고 있었고 이것이 인구 변화와 함께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런 와중에 1958년 기독교 출신의 샤문(Camille Chamoun)?대통령이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하는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인자 이슬람 세력이 반발했다. 게다가 샤문 대통령이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한 채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임하려?하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규모?반란을 일으켰으며 1개월 후 반란은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샤문 대통령 ? 내전이 악화되자 샤.. 더보기
레바논 내전 1. 백향목의 레바논 비록 그 날개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입힐 지라도. ?- 칼린 지브난 오늘날의 레바논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 지역을 통치한 두르즈파의 파할 앗디가 지배하던 “소 레바논” 지역을 근거지로 한다.아랍의 일부지만 마론파 기독교도를 비롯해서 그리스 정교들이 다수 존재하는 독특한 사정으로 반독립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던 이 지역에서?1860년 오스만이 지배권을 강화하는 와중에 마론파 그리스도 교도들과 드루즈파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마론파 1만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보내 질서를 회복했다. 이후 프랑스는 레바논의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여 이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했다.?오스만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자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레바논 사회는 유럽과 교류를 쌓았으며 해외에서 축적한 부를 환원하여.. 더보기
히틀러에 관한 소소한 사실 히틀러는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에 히틀러는 미대 입시에 두번 실패했다. 미대 입시에 실패한 유명 예술가는 꽤 있으므로 그다지 수치스러운 경력은 아니지만 본인은 크게 낙담했다. 히틀러는 당시 현대예술의 새로운 조류가 막 태동하던 시기의 예술동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전적인 작풍만을 탐닉하고 있다보니 예술가로서 대성하는데 필요한 독창성이 부족하게 보인 것이 큰 이유였다. 이 미대의 학장은 유대인이었는데 히틀러에게 건축가가 되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친절히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명의 학생에게는 꽤 호의적인 대우였지만 히틀러는 이 사건을 자신이 유대인에 의해서 부당하게 예술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으로 묘사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1913년 병역을 회.. 더보기
2차대전에서 유대인 희생자의 수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600만명에 이른다는 주장은 1945년 뉘른베르크에서 제국보안국 소속의 빌헬름 회틀의 증언, 즉, 1944년 8월말 부다페스트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때까지 살해된 유대인 수가 600만에 달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회틀은 이 가운데 400만은 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 200만은 소련에서 총살되었다고 기억했으며 뉘른베르크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1946년 9월의 선고 공판에서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명이라고 밝혔다. 반제회담에서 추정한 유럽의 유대인 수. 총 1천1백만으로 산정하고 있다. 당시에는 희생자 수가 600만인 근거를 명확히 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라이틀링어는 1945년 뉘른베르크에 제출.. 더보기
토미나가 쿄지 토미나가 쿄지(1892년 1월 2일 - 1960년 1월 14일) 별명은 "도조 히데키의 돈주머니" 경력 1939년 9월 참모본부 제1 부장으로 취임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일본이 접수하는 작전에서 진주시각을 알리는 전단이 유출되는 사고로 좌천되었다. 1941년 4월, 일본 육군성 인사국장으로 중앙에 복귀했으며 이후 1943년 3월 육군 차관을 겸임했으나 도조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실각, 1944년 8월에 신임 육군상 스기야마 하지메에 의해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 9월 8일 마닐라에 착임했다. 스기야마는 "자리가 나서 간신히 토미나가를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으므로, 좌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다가 실전경험이 전무한 토미나가는 항공대가 발진할 때 군도를 휘두르며 호령하는 등 .. 더보기
컨셉시온 호와 윌리엄 핍스 1641년 9월 28일, 쿠바의 하바나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스파냐 선단이 있었다. 선단을 책임지는 인물은 후앙 루이스 데 빌라 빈센치오 였고, 그의 기함인 컨셉시온 호는 600톤 급 갤리온이었다.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한번 귀환했던 이 선단은 불과 열흘만에 수리를 마치고 유럽을 향해 재 출항에 나섰다. 신대륙의 귀금속을 대서양을 횡단하는 이 항로는 에스파냐 제국의 목숨과도 같은 자금줄이었고, 멕시코와 포토시의 광산에서 채굴한 수톤의 은과 마닐라 갈레온 선단이 멀리 아시아에서 실어온 비단, 향신료, 도자기, 옥 장신구를 비롯한 에스파냐 왕실의 금은보화는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 디에고 데 파셰코의 개인보물들, 신대륙 상인들의 상납금을 포함한 막대한 보물들로 배는 화물이 과적된 상태였지만 긴 항해가 무사.. 더보기
루땡호의 종 1779년 툴룽항구에서 "루땡"(Lutin)이라는 이름의 마지시오네 급 프랑스 해군 프리깃 1척이 진수했습니다. 이 배는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함대에 소속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에 휘말려서 기구한 운명에 휘말려 들게 됩니다. 후드제독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은 1793년 툴룽을 봉쇄했고 이 도시를 장악한 왕당파는 16척의 전열함과 프리깃 함을 영국 해군에게 넘겨주었으며 그와 함께 루땡 호도 영국해군에 편입되어 툴룽 포격을 위해 박격포함으록 개조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해군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가 유리했지만 나폴레오네 부오네파르데라는 이름의 젊은 장교가 이끄는 혁명군이 툴룽의 포위를 돌파하자 영국해군이 물러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나폴레옹이 영광으로 향하는 그의 전설을 시작했다면 루땡호는 HMS..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2. 테라 인코그니타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캐나다 북부의 탐험을 통해 북서항로를 찾으려고 하거나,?러시아 북부를 통과해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1631년에는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가 북서항로를 탐사했고 러시아도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을 찾아 탐험대를 파견했다. 비투스 베링 1725년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을 받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 2년간의 여정을 거쳐 캄차카 반도의 오호츠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선박을 건조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과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여 수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1730년 페테르스부르크로 귀환한다.? 1733년 베링은 쿠릴열도의 지도작성과 일본과의 항로등을 탐사하기 위해?두번째 탐험에 나선다.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1. 바렌츠의 모험 바렌츠의 모험 네덜란드의 탐험 영국인들은 거듭되는 실패로 북방항로 탐사에서 손을 떼었지만 1588년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북방항로도 그 후보중의 하나였다. 1594년과 1595년, 네덜란드 의회는 "메소포타미아와 타타르(오늘날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 북부를 따라가는 탐험여행"을 시도하게 된다. 1차 항해에서는 탐험대는 오렌지 군도 일대를 탐사했으며 바다코끼리 떼를 발견하여 상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고무되었지만 북극곰을 만나 생포하려다가 탐험대원 일부가 사망했다. 원하던 목적달성에는 살패했지만 몇가지 새로운 발견에 고무된 네덜란드는 다시금 카타이와의 무역을 희망하면서 탐험대를 파견했다. 불행히도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0. 허드슨의 비극 데이비스 드레이크의 북미대륙 서해안 조사와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 발견의 가능성은 희미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은 일부 영국 상인들은 북서 항로의 단서를 더듬어나갈 유능한 항해자를 찾았다. 유능한 항해자로 정평이 나있던 존 데이비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쉽게 실망하거나 개인적인 욕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북서항로를 탐사해 나갔다. 1585년의 첫 항해에서는 폭풍때문에 배를 돌려야 했지만 프로비셔가 조사했던 지역보다 훨씬 북쪽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컴벌랜드 해협을 발견했다. 다음해의 2차 항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587년의 세번째 항해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를 거쳐 베핀 만까지 진출했고 그때까지의 항해가들 중 가장 높은 위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 세번째 항해에서 그는 "7..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