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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도전기 9.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8. 프로비셔의 실패 마틴 프로비셔 마틴 프로비셔(Martin Frobisher 프로비서 아님)는 잉글랜드 웨이크필드 출신으로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아프리카의 기니만 무역선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영국 해협을 근거지로 플로렌스 지방과 오가는 에스파냐 운송선단을 습격하는 해적행위를 통해 프로비셔는 용감하고 노련한 뱃사람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일찍부터 북방항로 탐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576년 멕코비 회사의 자금 지원을 통해 20~25톤급 선박 가브리엘 호와 미카엘 호와 10톤급 핀네스 한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는데 성공, 6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한 후 북미대륙의 북동부를 통해 카타이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찾아나섰다. 영국 최고의 두뇌진이 제시한 낙관적 견해에 고무되기는 했지만 탐험대의 항로는 험난해서 그린란드 남쪽에서..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7. 베라차노의 바다 베라차노 죠바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의 삶에 관해서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는 1485년 피렌체에서 약 50km 떨어진 카스테라 베라차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7년 프랑스의 디에프 근처로 이사한 후 항해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동 지중해와 대서양일대를 항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4년 베라차노는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의 측량사로 근무하던 중 왕의 명을 받아 북아메리카 연안의 탐험여행에 나서게 되고 그 탐험으로 북미대륙에 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베라차노는 플로리다와 뉴펀틀랜드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으며 현재의 남 캐롤라이나 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 체샤피크 만과 델라웨어 강을 비롯한 오늘날의 뉴욕만 근처를 탐사했고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6. 북서항로의 선구자 북서항로의 선구자 1492년 크리스토발 콜론은 신대륙을 발견하여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전에도 신대륙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8세기 경에 코라틀을 타고 아이슬랜드를 발견했다는 아일랜드의 수도사 성 브랜든이나 그린랜드까지 정착한 바이킹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한 기록이 있다. 특히 레이프 에릭슨이 발견한 빈랜드가 뉴펀틀랜드 근처였을 가능성은 고고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14세기 부터 이어진 소빙기와 이누이트와의 대립 때문에 바이킹은 그린랜드를 포기했고 신대륙 발견의 영광은 역사의 중대한 변혁을 이루게 된 크리스토발 콜론에게 넘겨지게 된다. 이탈리아가 낳은 이 위대한 항해자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곳을 인도라고 착각했거나 또..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5. 북방항로 논전 북방항로 논전 이 논전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0년후 길버트는 "카타이로 가는 새항로의 발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당시의 논전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논란 당시에 길버트나 젠킨슨는 북동항로건 북서항로건 실제로 항해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양측은 모두 당시에 입수 가능했던 자료들에 의존해서 논쟁을 이어나갔다. 젠킨슨은 북동항로를 꽤 전진한 후 그 앞에 다시 열려있는 바다를 보았다는 타타르인 어부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들어 북동항로를 옹호했다. 그에 대하여 길버트는 "타타르인은 미개한 민족이며 항해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우기 해상에서 32km이상이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젠킨슨은 바렌츠 해에서 일각수의 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거..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4. 북서항로론의 대두 스티븐 버로우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로써 러시아와의 교역로가 개설되었다. 뇌제 이반의 치하였던 당시의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에 의해 서방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고 발트해의 교역로는 한자동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들의 방해가 없는 신 교역로는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이익이었고 당시에도 귀중품이었던 모피를 수입하게 되자 이에 고무된 모험회사의 투자가들은 3년뒤인 1556년, 스티븐 버로우(Steven Borough)의 지휘하에 새로운 북방항로 탐험대를 파견한다. 챈슬러의 항해사로 저번 항해에 참가했던 스티븐 버로우가 지휘하는 서치드리프트(Serchthrift) 호를 환송하기 위해 80세의 고령이 된 영국 최고의 도항사 세바스티앙 카보트가 그레이브샌드항까지 찾아와 직접 배를 둘러보..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3. 북동항로에의 첫도전 북방 진출에 있어서 먼저 시도된 것은 북동항로로, 이 항로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점을 강조하는 일단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들의 필두에는 존 디가 있었다. 당대의 대수학자이며 천문학과 지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메르카토르와 친분이 깊은 존 디는 당시 궁정점성술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에녹어"라고 하는 독특한 언어를 제창하여 대천사장 미카엘과도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바디랭기지의 달인 띠딕 존 디 선생은, 아라비아 지리학자들의 저작을 근거로 타빈곳이라고 하는 지점을 지나면 항로가 남동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단 이 항로를 통한다면 카타이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북해안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항로를 발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올..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2. 북방항로를 찾아서 "이제 발견해야 할 항로는 다만 하나, 북방으로의 진출 뿐이다. 이미 에스파냐는 서방의 바다를 발견했고 포르투갈은 동방의 바다를 발견하여 인도 제국에 도달했다."?? 1527년, 로버트 손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실리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 이외의 지구 대부분을 양분한 상태였으나 이 협약의 효력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 미치는 것으로 북방의 바다에 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당초 탐험가들은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라는 관념에 의존하여 북방항로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이 북방의 항로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는 좋은 반증이었다. 북방항로는 다른 항로보다 물부족의 위협은 덜해도 훨씬 더 험난했다. 열대에서는 1년 .. 더보기
북방항로 도전기 1. 북방으로 일찌기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15세기말 부터 유럽의 열강은 흑사병의 공포를 벗어나 자원 고갈로 인한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슬람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된 항해술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고 항로의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인도양 무역에 뛰어들어 향신료와 황금, 노예 무역을 기반으로 했고 에스파냐는 신대륙의 금은을 긁어들이고 있었다.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이들 국가들의 뒤에는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쟁국들이 있었고 그중에 북쪽에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막 벗어난 잉글랜드가 있었다. 1540년대, 오스만 해.. 더보기
무다구치 렌야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사가현 출신. 일본육사 22기, 일본육대 29기. 최종계급은 중장. 키무라 헤이타로, 토미나가 쿄지 등과 함께 토조 히데키의 심복 부하중 하나. 노구교 사건(1937)에서 독단적으로 공격을 허가해서 중일전쟁의 단서를 만들었다. 이 사건 직후에 다치지 않은 팔을 붕대로 고정하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1944년 일본 제15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정글과 2000m급 산악지대가 혼재된 코히마를 돌파해서 미얀마-인도 경계가 되는 임팔 지역을 공략한다는 작전을 입안했다. 당초 상급 부대인 남방군 사령관이나 자군 참모, 예하 사단에서는 보급 문제를 들어서 거의 전원이 반대했지만 무다구치는 "영국군은 약하다. 반드시 퇴각할 것이다"라며 강경론을 관철시켜.. 더보기
전열함 -1 전열함(ship-of-the-line)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건조된 군함의 일종으로, 당시의 해군전술은 교전중인 선박들이 전열을 형성하여 정연한 통제하에 현측의 대포를 상대방에게 고정하고 포격전을 가하는 선형전술인 전열전술을 기본으로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포를 장비한 대형 함선이 필요하기에 가장 대형화되고 강력한 함선들로 전열을 형성했고, 이런 함선들을 전열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840년대 말에 증기기관이 도입되자 목조 전열함도 스크류 추진기를 장비했으며 그때까지 풍력에 의존하던 전열함들은 증기력과 풍력을 혼용해서 사용하게 되었고 철갑함이 보편화되면서 전열함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기원 그레이트 쉽, 카락, 갤리온 북해나 발트해 연안에서 건조된 코그는 선수루와 선미루에 궁.. 더보기
고속도로 론 얼마전 영세6관왕에 올라 사상 최강의 일본장기 기사라는 위상을 드높인 하부 요시하루는 "웹진화론"이라는 책에서 네트워크가 장기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IT와 넷의 진화에 의해서 장기계에는 강해지기 위한 고속도로가 단번에 깔렸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달려나간 앞에는 대정체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유명한(일본에서) 고속도로 이론입니다. Run your highway 현대 일본장기에서는 정석의 연구성과가 널리 공개되고 방대한 기보데이터 베이스가 열람가능해지면서 장기의 실력은 급속도로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 비교한다면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상당한 수준까지 강해질 수 있게 되어 확실히 "정비된 고속도로"를 질주해 나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십년전 .. 더보기
햄장기 이번에 소개드릴 프로그램은 일본장기계의 귀염둥이 햄스터를 마스코트로 하는 햄장기입니다. 요런... 꼬라지? 는 페이크고, 웹상에서 실행이 가능한 플래쉬 프로그램입니다. http://hozo.vs.land.to/shogi.html 이 링크로 들어가시면 별도의 설치없이 플레이 가능합니다. 플래쉬 프로그램이라서 우습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외로 그럴듯한 프로그램으로 기보의 저장을 제외하고는 어지간한 기능은 다 있습니다. 왼쪽의 메뉴는 위부터 룰, 트레이닝, 기본, 리셋, 가이드(체크)로 되어 있습니다. 룰 메뉴는 기본적인 일본장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일본어를 아신다면 쉽게 일본장기를 배우실 수 있습니다. 트레이닝에서는 30단계에 걸쳐서 기본적인 진행법, 말을 사용하는 방법들을 알려줍니다. 일본어.. 더보기
우샤뽕 일본어로 우샤는 토끼, 우샤뽕이면 깡총토끼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홈페이지 캐치프레이즈로 "일본장기의 세계에 혁명을!" 이라고 적힌 걸 봐서는 애니메이션의 팬일까요? 귀여운(?)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그냥 보기에는 별로 특별할게 없어 보이지만 보난자 이전에 프리웨어 일본장기계를 주름잡던 강자로 초단 정도 실력은 나옵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일본장기 프로그램 중 가장 추천할만한 건 K-Shogi라고 생각하지만 그에 버금갈 만한 강추 프로그램입니다. 귀여운(?)인터페이스 시작 설정 필요한 기능은 대부분 있고 인터페이스도 직관적입니다. Lv0이라고 해도 실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초보자 클래스라면 말을 떼고두지 않는한 쉽게는 이기기 힘들겠습니다만, Lv0과 Lv1은 실수 루틴이 있기 때문에 컴퓨터 치고는 의외.. 더보기
3차 중동전쟁, 6. 전쟁의 결과 분쟁의 결말과 전후 상황 6월 10일,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의 최후공세를 종료하고 다음날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서안,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전에 비해 3배로 증가했으며 점령지에 거주하는 1백만명의 아랍계 인구가 이스라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종심은 남쪽으로 300km, 동쪽으로 60km, 북쪽으로 20km씩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67년 전쟁의 정치적 중요성은 심대하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뒤바꿀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도 있음을 확실히 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요한 교훈을 습득했고.. 더보기
3차 중동전쟁, 5. 리버티 사건 공중전 6일전쟁 중에 IAF는 사막전에서 현대적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전술적 기습이 된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공격 이후에 (공격이 시작된 시점에 이집트 공군의 비무장 훈련기 4기만이 비행중이었다.) 이스라엘은 잔존 아랍 공군을 파괴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전술지원 활동으로 첫공격의 전략적 효과를 더욱 확대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체로 저공으로 침투하여 일출 무렵에(전술적으로 태양을 등지고 싸움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기습을 가하는 전법을 이용했고 초기의 타격으로 적 공군의 전술적 저항력을 제거하였으며 제공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이스라엘 공군은 대부분의 전장에서 육군의 전진을 도왔으며 특별히 요르단 군의 예리고 근처에 주둔한 60기갑여단의 기동을 파괴.. 더보기
3차 중동전쟁, 4. 전쟁의 전개 포커스 작전(Operation Focus) 시나이 반도에서 격추된 이집트 공군기를 이스라엘 공군장교가 조사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의 최중요 작전목표는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공격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소련제 신예기 450기로 구성되어 아랍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현대화된 공군으로 초기에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 측은 군사 및 민간 시설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30기의 Tu-16 "배저" 중폭격기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판단했다. 이스라엘 시간으로 6월 5일 7시 45분, (이집트 시간 6:45), 이스라엘 전역에는 시민군 방어 경보가 울려퍼졌고 그와 함게 이스라엘 공군은 포커스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가능한 200여기의 제트기 중 12기를 제외.. 더보기
3차 중동전쟁, 3. 전쟁 전야 이집트와 요르단 5월과 6월, 이스라엘 정부는 여러전선에서 동시에 공격받을 위험을 피하고, 요르단 서안의 팔레스타인 계 문제를 피하기 위해 요르단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범아랍주의 여론 때문에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1967년 5월 30일 이집트와 시리아 간의 군사동맹에 더해 요르단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후세인 국왕을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부르던 나세르는 "우리의 기본적 공동목표는 이스라엘의 파별이며 아랍인들은 모두 싸움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상호 방위조약에 서명하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1967년 5월 말, 요르단 군은 이집트의 압둘 무님 리아드(Abdul Munim Riad) 장군의 지휘하에 .. 더보기
3차 중동전쟁, 2. 티란해협 봉쇄 초기 군사활동 5월 17일, 가말 압델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UNEF병력 4,000여명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아바 에반의 절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UN 군은 수일 뒤 부대를 철수했다.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과 공보부는 당시 이집트가 북예맨 내전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대 이스라엘 전선에서 개전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세르가 예맨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시나이 쪽으로 진출시키겠다고 선언하자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혼란이 야기될 정도로 병역 대상자 일체를 소집했다. 요르단 국경선에서는 비상 시국 분위기가 없었으며 요르단 군단이 암만에서 유대아, 사마리아 등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는 중에 관광객들은 여전히 만델바움 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반면에 이집트는 샬름 엘 세이크를.. 더보기
3차 중동전쟁, 1. 분쟁재개 6일전쟁 (??? ?????? ??????, ?arb al?Ayyam as?Sitta, ????? ??? ??????) 또는 1967년 중동전, 제3차 중동전, 6일전쟁, 6월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연합군의 전쟁으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튀니지아, 모로코, 알제리아도 아랍 연합군에 병력과 무기를 제공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국제연합긴급대응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UNEF)을 1956년 2차중동전 이후 평화유지를 위해 완충지대를 형성하던 시나이 반도에서 축출하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긴장고조에 대응하여 이집트는 1,000대의 전차와 병력 10만명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그와 함께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기를 게양했거나 전략적 물자를 .. 더보기
1차 중동전쟁, 9. 전쟁의 결과 1949년 종전협정 이집트 1948년 1월 6일, 랄프 분쉐 박사는 이집트가 마침내 이스라엘과 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1월 12일부터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발표가 있은 직후 이스라엘은 팔루자(Faluja)의 포위되어 있던 이집트 여단을 해방시켰지만 그달 말이 되자 대화는 난황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집트는 48년 11월 4일 UN안보리 결의안 1070에 따라 11948년 10월 14일 점령하고 있던 영역으로 후퇴하겠다고 주장했다. 1949년 2월 12일, 이슬람 형제단의 지도자인 핫산 알 바나의 살해로 인해 이집트 내부의 긴장감이 상승한 것도 회담의 교착에 빠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2월 초, 이스라엘.. 더보기
19매 떼기 "차포 떼고 두는 장기"라는 관용구로 잘 알려져 있듯이 장기에는 기력의 차이로 말을 떼고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장기에도 다양한 핸디캡 매치가 있습니다. 향차떼기, 각떼기, 차떼기, 등등 1매 떼기부터 4매떼기 9매떼기(왕이랑 보만 있다.) 등등의 다양한 떼고두기의 궁극에 해당하는 것이 나왕(裸王), 19개 떼고 왕만으로 두는 장기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낮아도 20:1 상황에서 질까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외로 이런 상황에서도 집니다. 2006년 8월 20일에 TV프로그램 전파소년에서는 사상최강의 기사 하부 요시하루에게 공개적으로 19매 떼고두기를 요청했습니다. 당황할만도 하지만 하부 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응해서 이겨버립니다.(d.hatena.ne.jp/YOSHIO/20060820) 대단하죠.. 더보기
1차 중동전쟁, 8. 전쟁의 전개 1948 아랍-이스라엘 전쟁 제1단계 (1948. 5.14 ~ 1948. 6.11)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는 5월 15일에 종료되었지만 미래의 수상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끄는 유대 지도부는 14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소련과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게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서 레바논군 1,000, 시리아군 5,000, 이라크군 5,000, 이집트군 10,000 이 신생 이스라엘 영내로 침공을 개시했다. 트렌스요르단 군은 예루살렘과 주변지역의 아랍관리지역을 비롯하여 국제관리 독립구역을 4,000여명의 병력으로 침공했으며 사우디아리비아, 리비야, 예맨의 자원병력 군단이 이들을 보조했다. 1948년 5월 15일, 아랍연합 사무총장은 해저전보를 통해 UN사무.. 더보기
불운은 나의 것 한참 글을 번역하고 사진을 업데이트 하고 주석을 확인하고 다 완성하고 글을 저장하고, 뿌듯한 기분으로 라이브라이터에 저장된 초본을 삭제하고, 다음 글을 준비하고, 윗글을 약간 수정하고 아래로 내려왔는데 헉. 글이 없다. 짧은 순간 기분이 확 상하면서 안절부절한 마음에 포럼에 글도 올려봤지만 대답이 있을지가 의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원인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데 티스토리 쪽에서 뭔가 조치를 쥐해줄 수 있을까? 기껏해야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다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알려달라던지, 죄송합니다 이런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겠지. 억지로라도 생각하면 백업하기 전에 초안을 지워버린 내가 잘못이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몇시간을 낑낑대며(특히 번역이 잘 안되다보니) 적은 글을 다시 처.. 더보기
1차 중동전쟁, 7. 분쟁의 주역들 이슈브 베니 모리스는 이슈브의 목표가 전쟁을 통해서 서서히 변해갔다고 지적했다. 전쟁 초기에 이슈브의 목표는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계와 주변 아랍국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깊이, 진정으로 중동에서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가 재현될 것을 우려했고 아랍의 공공연한 발표들은 그들의 공포를 부추켰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슈브의 목표는 유대국가의 영역을 국제연합 분리안 너머로 확장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우선 고립되어 있는 유대인 정착지들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점진적으로 방어가능한 경계선 속에 궁가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4~5개월 후에 정치, 군사 지도자들 간에 세워진 세번째 새로운 목표는 "이스라엘에 장래의 강력한 제5전선.. 더보기
81다이버 9화 중반에 들어서면서 4차원 근성작이 되어가던 CG빨 드라마가 단숨에 그럴듯한 전개로 돌아섰군요. 중간구원에 나선 아유미의 얀데레는 너무나 급격한 츤>데레>얀>데레 변화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부분의 "졌습니다"로 그럭저럭 마무리했습니다. 미즈타 나리히테와 마츠야마 히로아키가 번갈아 가면서 프로듀스 하기 때문인걸까요? 어쩌면 이 드라마의 주제는 여자의 변신일지도 모르겠군요. 접수사=소요, 미사키=귀 미사키, 아유미=귀 아유미. 무구루마도 변신계에 해당되지는 않을 듯 한데, 애초부터 무리하게 집어넣었다는 느낌일 뿐입니다. 잘 쓰면 좋았을 캐릭이지만 도저히 연결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간신히 진지한 승부 모드가 되어 아유미를 꺽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간 스가타가 마주한 것은 장려회 시절의 .. 더보기
1차 중동전쟁, 2. UN분리안 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아랍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 관리를 1948년 8월 1일부로 종결하고 이 지역에 유대계와 아랍계로 분리된 2개의 국가를 분리 독립시키는 안건을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 불참 1로 결의했다. 계획의 맥락 1917년 11월, 알렌비 장군은 팔레스타인 점령 준비를 하는 시점에서 영국 외무부는 1917년 외무부의 벨푸어 경(Lord Belfour)이 영국 시온주의 운동의 수장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 통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폐하의 정부는 유대 민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에 긍정적이며 이 목적의 성취가 용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계 공동체의 사회, 종교적인 권리들이나 .. 더보기
제노사이드 - 4.3 사건 1. 제주 4.3사건 남한에서는 북한을 뺀 단독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결단해, 선거를 앞두고 좌익세력에 의한 선거 방해가 일어났고 특히 제주도에서는 수천인 규모의 무장 세력이 도민을 강제 징집 해 "인민 유격대"를 조직 해 테러를 실시했다. 사건 당초는 교섭에 의해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했지만 미군이 개입되고 평안도 출신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우익단체 「서북 청년단」의 방해로 교섭은 결렬되고 유혈 사태에 이르렀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주도로 개최된 3.1운동 기념대회에 3만명 이상의 도민이 참가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선언하자 경찰은 집회의 해산을 시도했고 당시의 군정 당국에서는 통일정부수립을 요구하는 도민들의 집회가 가두시위로 발전하는 것을 결코 .. 더보기
08년도 2/4분기 잇힝~ 2008년 03월 20일에 블로그 개설하고 좀 시간이 애매하지만 일단 2/4분기의 데이터를 보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방문해 주신분들의 데이터. 약 70%의 분들이 10초 이내로 방문, 즉 흘깃 보고 떠나셨습니다. 이 70% 비율은 어쩔 수가 없군요. 다른 분들이랑 비교를 해봐야 알 듯 한데요. 하지만 의외로 3분 이상, 이 정도면 꽤 버티(?) 시는 분들이죠. 약 30%의 분들이 바로 채널을 돌리지 않아주셨습니다. /ㅅ/ 그리고, 20페이지 이상을 봐주신 분들이 175분, 100회 이상 방문해 주신 분들이 141분 정도. 와아... 이런 블로그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 봐주시는 지 참 당황스럽습니다. -ㅁ-;;;; 제가 써놓고도 읽기 힘든데. 이런 자료를 어디서 구하느냐면... 블로그 방문자들의 동향.. 더보기
일본장기의 말 종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장기말은 다양합니다. 왼쪽위부터 오른쪽아래까지 "고급"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 장기말을 가격에 따라서 구분한 것으로, 오른쪽 아래의 말은 플라스틱 제품으로는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말에 해당됩니다. 또, 자석으로 되어 있어서 움직이는 곳에서도 둘 수 있는 자석장기도 있고 조선시대의 골동품으로 감정가 170만원이 나온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기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장기말은 어떨까요.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들지만 100엔 샵(엔화와 원화의 환율은 대략 1:10 정도로 100엔이면 약 1,000원에 해당한다.)에서 파는 플라스틱 제의 저렴한 보급형 장기말도 있고, 자석식 장기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 장기가 훨씬 활성화 되어 있고 권위가 있는 일본에서는 보다 고급형 장기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