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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차 중동전쟁, 6. 내전에서 전쟁으로 구쉬 엣 지온의 함락(5월 12일~13일) 작전 구역 구쉬 엣지온 함락 후의 유대인 포로들 크파르 엣지온은 예루살렘과 헤브론 사이 아랍영역 한복판의 전략적인 통로에 건설되어 있는 4개의 정착촌 집단을 칭하는 이름이다. 1947년에 이 지역에는 4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분리독립안이 발표된 이후에는 아랍측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어 1월 8일 정착지에서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소개하도록 허가되었다. 12월 7일, 벤 구리온은 이 지역에 팔마흐 연대를 파견하여 방어를 강화하도록 했으며 심각한 인명손실을 감수하며 마지막으로 보급차량이 도착한 3월 26일 이후로, 방어측은 완전히 고립되었지만 현위치 고수정책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5월 12일, 아랍군은 정착지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공격의 동기중에는 금수.. 더보기
1차 중동전쟁, 5. 하가나의 공세 하가나의 공세(1948.04.01 ~ 1948.05.15) 4월부터 하가나가 공세에 나서게 되자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면서 다음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에서 아랍군은 아랍 해방군의 자원 병력 3~5천여명을 포함한 병력 1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하가나와 팔마흐의 병력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3월에는 약 1만5천여명에 달했고 5월에는 조직, 훈련도, 장비 면에서 우세한 3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다. 팔레스타인 군은 점진적으로 패배에 몰렸고 이슈브는 유대 정착지들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역으로 팔레스타인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야파를 비롯하여 유대계와 아랍계가 혼재되어 있는 주요 도시들이 하가나에게 점령되었고, 그에 따.. 더보기
1차 중동전쟁, 4. 국제정세와 전환점 외국군대의 개입 팔레스타인의 아랍 자원군 폭력은 군부대가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는데 위임통치가 끝날때까지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을 세워야 할 영국은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고, 주둔군과 관리자들의 철수 준비에만 부심할 뿐이었다. 더욱이, 영국측 책임자들은 분쟁을 통해서 자신들 쪽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느끼는 중이었으므로 영국은 타국 군이 팔레스타인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여력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UN 특별조사 위원회의 팔레스타인 관련 보고에 따르면, 1월 20~21일 밤에 군복을 입은 700여명의 시리아 인이 무장한 채로 장갑차량의 통제를 받으며 "트렌스요르단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했다. 1월 27일,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진입해온 300여명의 무장집단이 갈릴리의 안전지역에 박격포와.. 더보기
이니그마 4. 알란 튜링의 등장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삼십구년 사월 이십칠일, 독일이 슈테텐란트를 점령하고 폴란드와의 불가침협정을 파기하며 목을 조여오는데, 폴란드는 더 이상 독일의 암호코드를 해독하지 못하게 되자 폴란드 정보국 뷰로 쉬프로프 소장 랑게 소령은 지금까지 연합국에도 비밀로 하고 있었던 암호해독 기술을 프랑스와 영국에 공개하기로 결정해. 7월 24일, 프랑스와 영국의 고위 암호해독 전문가들이 폴란드에 도착하자 랑게르는 자신들이 지금껏 쌓아온 암호해독 관련 기술을 이전해 주었어. 그리고, 폴란드와 프랑스가 차례로 숨이 끊어지자 처칠은 OB-40을 개편하여 버킹엄의 브레츨리 파크에 정부 암호국(GCCS)를 설립하고 암호해독에 필요한 모든 분야의 인재를 모으라고 명령했어. 브레츨리 파크. 그때까지 암호해독을 맡고 있던 언어학자와.. 더보기
SIGABA 1945년 2월 3일. 2차대전도 막바지에 달하던 중, 연합군 점령지인 프랑스 콜마르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도난품은 군용트럭 1대와 SIGABA. 독일이 이니그마를 만들었듯이 동시대에 제조된 다양한 로터식 암호기계 중에서 스웨덴에서 제조된 로터 머신을 미군이 도입하여 개량한 상위버전이 독일군의 이니그마에 해당하는 SIGABA, 애칭은 ABA라고 하는 암호기계였다. 요렇게 생겼음. 연합군은 자신들이 이니그마를 해독하여 톡톡히 효과를 보았기에 암호기계의 보안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고 기계1대당 경비병 2명을 배치할 정도로 용의주도했지만 이 사건에서 28사단 담당지역에서 SIGABA를 운반하던 병사가 운송중에 잠시 “알고 지내는 현지여성의 주택을 방문”하고 나와보니 트럭과 기계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 더보기
1차 중동전쟁, 3. 팔레스타인 내전. 개괄 1947년 11월 30일, 국제연합이 영국의 위임통치를 종결짓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분리독립안을 결의하면서 부터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실제로 위임통치를 종료하기 까지의 혼란을 1947~1948, 팔레스타인 내전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공동체가 충돌하던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의 초기 단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질서를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던 영국은 철수준비를 하느라 분쟁의 중재에는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간여하고 있었다. 이 분쟁은 영국이 위임통치를 종료하고 국제연합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이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주변 아랍국가들과 전쟁이 발발한 1948년 5월 15일부터 1차 중동전으로 더더욱 격화되게 된다. 개괄 UN의 분리독립안이 발표되자 마자 유대인 사회는 기쁨에..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3 (오스만 후기 부터 현대까지) 오스만 통치기(1800 ~ 1917) 1895 예루살렘의 유대인 예루살렘의 다양한 복식들. 1870년대. 예루살렘의 근대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다. 당시 이 도시는 침체되어 있었고 인구는 8천명을 넘지 못했으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극단적으로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도시로, 크게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아르메니아인의 4부류로 나뉘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성묘교회는 그리스 정교회, 카톨릭, 아르메니안 교회, 콥트 교도, 에티오피아 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각 그룹들 간의 갈등관계는 무슬림들의 "중립적" 안전보호의 토대위에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각각의 공동체들은 주로 자신들의 성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무..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2 (칼리프 시대부터 오스만 통치 전기까지) 아랍 칼리프 시대 958~1052 기간 동안의 예루살렘 지도. 아랍 지리학자 알 무스카다시에 의함 마파 문디(세계의 지도).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 쿠란(Qu'ran 코란)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하디스(hadith, 이슬람교 전승)에서는 무하마드가 Isra and Miraj(무하마드의 야간 여행에 관한 이슬람 전승) 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간 후, 그곳에서 승천했다고 전하고 있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의 칼리프 첫 정복기인 AD 638년 경에 정복되었다. 동시대의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Umar al-Khattab)는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을 청소하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린 뒤, 수비대와 성곽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1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다윗왕 시대의 유적 고대 (선사시대 ~ BC 1000) 인간이 예루살렘에 최초로 흔적을 남긴 것은 후기 동석기 시대(Chalcolitic period)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BC 3000)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의 execration 문서(BC 1900~BC 1800)나 아마르나 문서(기원전 14세기)로 볼때, 이 도시는 고대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르나 서신 중 하나에서 도시의 감독, 압디-헤바는 이집트에게 하비루(히브리 라는 말의 어원일 수 있다.)와의 싸움에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창세기 14:18절 에서 이 도시는 제사장 멜기세댁이 다스리는 도시로, 평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소유자가 이러저리 바뀌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미드라쉬에 기록된 유.. 더보기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 (Golda Meir, Hebrew: ????? ?????, Arabic: ????? ??????) 1898.05.03 ~ 1978.12.08. 이스라엘 4대 수상 노동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으로 근무한 후에 1969.03.17, 이스라엘 수상에 취임했다. 마가렛 대처에 비견될만한 "철의 여인" 으로 불리웠고, 다비드 벤 구리온은 "내각에서 유일한 사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수상이며, 역사상 3번째 여자 수상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 정부 수반이 없었던 사람으로는 최초) 유년기 러시아 제국(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의 키에프에서 블룸 나디치와 모세 마보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의 이름은 골다 마보비치. 목수인 아버지 슬하에 두명의 자매가 있고, 다섯명의 남매들은 어.. 더보기
쇼기 금지의 위기 2차대전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사건은 꽤 알려져 있습니다. 파고 들어가다보면 일본측이 꼭 포로를 학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가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는 등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엄청난 수치로 여겨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사건이 많았죠. 이 정도로 포로가 되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힌 적을 잘대해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아무튼,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진주하여 일본에는 미군정(이하 GHQ)가 통치를 담당하게 됩니다. GHQ는 일본사회가 지극히 군국주의적인 체제이고, 이것을 "수정"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리면서 교육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를 검토하게 되었고 그 대상 중에 일본장기..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1. 여명 1. 프로축구, 그 화려한 서막 한국의 1980년대는 3S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고 프로축구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의 여가선용 기회 마련을 위해서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프로화 계획이 시작되었지만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길이 문제였다. 당시 야구협회 회장이었던 임광정 씨는 야구 프로화에 36억이 필요하다고 보고했고 축구협회 회장인 최순영 씨는 축구 프로화에 139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당시에 이렇게 막대한 돈을 끌어올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우병규 씨와 고등학교 동기라는 연줄이 있던 MBC의 해설위원출신 이호헌 씨가 기업들에게 야구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도록 하자는.. 더보기
프리미어 리그의 역사 1. 프리미어의 태동 1970년대 이후 10여년간 유럽의 강호로 군림했던 영국축구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된다. 주요 구장들은 노후화되고 팬의 편의를 위한 시설들은 부실했으며 훌리건이 들끓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잉글랜드 축구팀들은 1985년의 헤이젤 참사로 향후 5년간 유럽의 모든 대회에 출장을 정지당했다. 1888년 이래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축구리그는 이탈리아의 세리에A나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와 비교했을때 입장객이나 시설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고 최고수준의 선수들은 해외로 이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준결승에 올랐고 UEFA가 출전제한을 풀어주자 1991년 맨유는 UEFA컵에서 우승하고 테일러 리포트에 기초해 모든 구장의 개선이 시작되는 등..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4. CU@K 리그 1. CU@K리그 2002년 한국을 강타한 월드컵 열풍과 대표팀의 스타선수들이 줄줄이 해외 빅리그로 진출하면서 (송종국; 부산 > 페예노르트로, 이영표 ; 안양 > PSV 아인트호벤) 증폭된 유럽리그의 영향으로 K리그의 서포팅 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대구와 인천에 시민구단이 등장하는 등 프로축구계에는 폭발적인 활기가 넘쳐 흘렀다. 4강 토너먼트, 챔피언 결정전을 모두 폐지하고 풀리그제를 도입하자마자 디펜딩 챔피언 성남이 독주하는 가운데 후반부터 미칠듯한 기세로 페이스를 끌어올린 울산과 수원의 상승세가 막판까지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2002년 K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불과 승점 2점 차이로 성남이 2연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이듬해에는 팀의 레전드 신태용이 K리그 최초로 60-60을..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3. 월드컵을 향하여 1. 월드컵 유치경쟁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북한, 사우디, 이란, 이라크, 일본과 티켓 2장을 놓고 경쟁했다. 한국은 이란에게 3:0승리를 거두고 이라크와 사우디에 무승부를 기록해 1승 2무로 4차전에서 철천지 원수 일본과 맞붙었다. 그런데 10월 25일, 40$의 시청율을 기록한 이 시합에서 한국은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1로 패했고 이로써 한국은 조3위로 떨어졌다. 10월 28일 운명의 5차전은 승부조작 여지를 없애기 위해 모두 같은 시간에 시작되었는데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하려면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고 한국이 북한에게 대승을 거둬 동률이 된 다음 득실차를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북한에게 3:0 대승을 거두었지만 같은..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2. 일화의 시대 1. 새로운 시작 89년, 축구협회장으로 재취임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2년전에 만들었던 한국프로축구위원회를 해체하고 협회직영제로 다시 바꾸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큰 변화가 아니었지만 K리그와 한국축구계는 90년 월드컵과 함께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은 1차예선에서 6전 전승을 거두었고 최종예선에서도 3승1무의 성적으로 월드컵 2회연속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3연패를 당했지만 이회택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인 홍명보와 황선홍의 얼굴이 있었다. K리그에서는 6번째 프로팀 일화가 제6구단으로 정식 출범하면서 84년 청소년 축구 4강신화의 주역 박종환 감독을 국내.. 더보기
St. Crispin's day speech 1415년 10월 25일 새벽녘,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영국 원정군을 이끌고 온 헨리 5세는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아쟁쿠르(Agincourt)의 작은 평지가 전날 내린 비로 온통 진창으로 변했음을 알았다. 그의 병사들도 밤에 내린 비에 젖어 새벽 한기에 떨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계속되는 행군에 지쳤고, 이질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6개월 전 처음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했을 때 병력은 12,000명이었으나 계속되는 전투의 사상자와 낙오병들로 인해 이제는 그 반도 되지 않는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병사들이 질병을 앓고 있었고, 낯선 프랑스의 시골길을 행군하느라 완전 탈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영국군은 아침 안개가 서.. 더보기
Band of Brothers 오류들 6/6 Episode 9-Why We Fight 1. 개괄 1945년 봄, 승전을 눈앞에 둔 연합군의 달콤쌉싸름한 분위기를 다양한 대조를 통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베테랑인 죠지 러즈가 어설프게 작업을 들어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신병은 현란한 침대 플레이로 스피어스 중위와 관객들을 놀래킨다. 폐허가된 독일 시가지의 정적속에서 흐르는 4중주도 좋은 대조를 이루며, 독일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Op 131. C# minor가 포로수용소의 잔혹함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도 그렇다. 1945년 연합군은 독일 시민들과 사적인 대화나 친밀한 행위를 금지하고 군사적인 질문 이외에는 할 수 없도록 했는데 시의적절하지만 비현실적인 조치는 심지어 독일인과 악수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비록 심심하고 외로운 미군 병.. 더보기
Band of Brothers 오류들 3/6 4. 에피소드 1. 몇가지 추가지적 - 화면에서, 수송기들은 대낮에 출격하는데, 이것은 C-47의 대규모 집단을 뚜렷하게 보이도록 하기위한 영화적인 배려다. 실제로는 이 비행기들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출격했다. 또한 이륙하는 비행기들 중에 'parapack'을 아래부분에 장비하고 있는 기체가 없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기체가 장비하고 있었다. - 극중에서 기내는 강하하기 직전까지 대단히 조용하다. 실제로는 웨인 "스키니"시스크가 무거움 침묵을 깨려고 "손목시계 살 놈있냐?"라고 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만 생략되었다. 시스크는 극중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 기내에서 출발하기 전에 닉슨 중위는 옆자리의 스트레이어와 지도를 들여다보며 상황을 의논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비행기에 탑.. 더보기
Band of Brothers 오류들 2/6 주의사항. 1. Band of Brothers를 아직 읽거나 보지 않은 사람은 읽지 말 것. 2. Band of Brothers에서 옥의티를 찾고싶지 않은 사람은 읽지 말 것. 3.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Band of Brothers가 어설프다는 뜻이 아니며 폄하하려는 것도 아님. 4. 번역한 사람이 찾아낸 것이 아님. I. 개괄 Band of Brothers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명작시리즈고, 많은 부분에서 고증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대작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전 체에 10점 만점에 8.5점을 주고, 일부 에피소드는 그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언가" 조금 부족한 것들. 그 2%를 설명하려고 한다. Band of Brothers는 1억2천만 달러를 투.. 더보기
Band of Brothers 오류들 1/6 에피소드 3 마지막부분에는 알버트 블라이스가 노르망디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19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알버트 블라이스는 1967년까지 죽지 않았으며, 웨스팅하우스에서 근무하면서 두명의 자녀를 얻었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상사까지 진급했다. 그는 알링튼 국립묘지에 잠들어있다. 마켓가든 작전을 준비하면서, 덴버 "불" 렌들먼 하사는 신병에게 "drop your reserve chute. you won't need it. we'll be jumping low."(보조 낙하산은 버려. 그건 필요없다. 우린 낮은 고도에서 낙하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켓가든 작전에서의 충고로는 적절하지 않고, 노르망디에서는 맞는 말이다. D-Day에 대부분의 공수부대원들은 200m이하에서 점프해.. 더보기
샬롬 파 갈릴리 중동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좋다고 손꼽히던 레바논은 기독교 계와 이슬람 계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발전해나가고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입과 이들의 정치세력화로 인하여 균형은 무너지고 결국 레바논은 내전으로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레바논은 내전에 휩싸였고 예측하던 대로 피로 피를 씻는 복수는 여기서도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거듭되는 테러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PLO사령부가 있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침공하는 "샬롬 파 갈릴리(갈릴리의 평화)"작전을 실시해버린다. 이 전쟁의 결과로 PLO와 이스라엘은 모두 국제적인 고립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잠시 평화 공존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서구화가 진행되어서 출산율이 낮은데다가 사회적으로도 젊은층의 염증이 점차 강.. 더보기
모세 다얀 네 차례의 전쟁과 모세 다얀 다얀 일가의 저술들 모세 다얀이라는 이름은 이미 여러 번 언급되었다. 투사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왼쪽 눈을 시커먼 안대로 가린 그의 모습은 서부영화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독립전쟁에서부터 욤 키푸르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모두가 다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은 그를 세계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은 그를 끝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만큼 심한 부침을 경험한 정치인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다얀 집안 사람들은 책도 참 많이 썼다. 우선 그의 아버지 쉬무엘 다얀(Shmuel Dayan)이 쓴 책이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 1961)", "요르단 강 연안과 갈릴.. 더보기
3차 중동전쟁, 7. 소모전(War of Attrition)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이집트군과 PLO가 협력하여 이스라엘군과 제한적인 전투를 벌이던 상황을 '소모전' (The War of Attrition) 이라고 부른다. 6일전쟁의 승리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을 축출하기 위해 이집트 군이 작전을 시작한 것이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고 1970년, 전쟁이 시작되던 시점의 국경선에서 정전이 이루어졌다. 이집트 전선 1967년의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전설적인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의 동편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랍 최강의 이집트 군은 이 사실을 지극히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전협정선에서 지속적인 소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1967년 10월 .. 더보기
에레즈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지형적으로 분석하면, 북부의 고지대와 남부의 황무지까지 다양한 기후가 나타나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형태의 국가이다. 특히, 요르단강 서안, 웨스트 뱅크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과거에는 폭이 겨우 20km에 불과하여 종심방어 전술을 펼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국가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양쪽으로 맞이해야 하는, 그야말로 수비에는 절망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1~4차 중동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다. 1차 중동전쟁은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우며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당시에 군대 조직 자체도 존재하지 않던 이스라엘은 국가설립 이전에 존재하던 자경단 조직을 급히 군대형태로 격상하고 해외 각지에서 무기를 끌어들여 다급하게 무장을 갖추었다. 2차대전때.. 더보기
이스라엘의 환경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3개 대륙이 만나는 지점으로써 지정학적으로 국제적인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지형조건에 관해서는 http://blog.naver.com/dkmcdkmc?Redirect=Log&logNo=40038752487 참고. 지리적으로 이곳은 1. 해안지역 2. 유대광야 3. 요르단 강 유역의 세가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해안지역은 고대로 부터 중계무역을 통해서 발전하였고 이 곳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서 날라온 물자를 지중해로 실어나르는 무역이 발전하여 그리스계 이민들의 도시국가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이들이 바로 비블로스를 근거지로 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다. 유대광야 지역은 이스라엘의 중-남부에 펼쳐진 광야지대로 일종의 황무지이며 건기와 우기가 확실하여.. 더보기
중동전쟁 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 현대전의 신화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중동전이지만 국내에서 중동전 관련 자료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때문에 그런 기적같은 승리가 가능했는지, 왜 아직도 분쟁이 끝나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가면서 모아간 자료들을 통해, 극단적인 이스라엘 찬양, 혐오로 치닫는 논쟁이 좀더 발전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은 글입니다. http://armishel.tistory.com/18 이스라엘의 주변환경 이스라엘의 환경 에레즈 이스라엘 이스라엘 안보지도 중동전쟁사 이스라엘이 바라본 중동분쟁 예루살렘의 역사 1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예루살렘의 역사 2 (칼리프 시대부터 오스만 통치 전기까지) 예루살렘의 역사 3 (오스만 후기 부터 현대까지) 1차 중동전쟁 1차 중동전쟁, 1. 배경 1.. 더보기
이니그마 3, 레예프스키 이니그마를 간보다 1차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떡하니 태어나면서 옆동네 소련이랑 한판 뜬건 알꺼야. 유명한 투하체프스키 옹이 모스크바 까지 깔짝대던 폴란드 애들을 쫓아내고 역러쉬 들어가다가 비스와 강에서 꺽였던 것도 들어봤겠지. 폴란드가 비스와 강에서 소련군 우익의 약점을 찾아내서 발라낸 건 우연이 아니었어. 슈테판 마즈키에비치를 중심으로 한 암호해독팀이 소련군 통신을 감청하는데 성공했거든. 이때 맵핵에 맛들인 폴란드는 통신감청 부분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31년에 Biuro Szyfrow(뷰로 쉬프로프, 암호부서)라는 통합정보처를 설립해. 폴란드 정보부. 궁전을 개조한 거라서 존내 멋지다. 그런데 독일측 암호를 간보다가 폴란드 애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도수분석이 통하지 않는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암호해독부의 주류.. 더보기
이니그마 2. 이니그마의 구조 이니그마가 어떻게 해독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아는 횽들은 다 아는 거지만, 이니그마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그 구조라는 건 어찌보면 굉장히 간단한데, 해독하기 위해서는 구조에 빠삭할 필요가 있고, 지금 적어둔걸 몇번씩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 몰라. 해독하는 부분에 들어가면 얼마나 복잡해지고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까, 일단은 구조에 대해서만 올려볼께. 몇번씩 수정해야 할지 몰라. 이니그마라는 건 기본적으로 키보드, 플러그보드, 전구(모니터 대신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 회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생긴건 대충 타자기 처럼 생겼다고 보면 되거든? 그 모양은 영상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거야. 영어를 알아듣는 횽은 영상보면 대충 감 잡았을 것이고, 좀 더 도식화 해서 보자. 아래 있는 게 이니그.. 더보기
이니그마 1, 이니그마 태어나다 1차대전에서 영국과 아이들이 독트리오를 관광태운건 다들 잘 알고 있지. 그리고 독일애들이 러시아 애들을 탄넨베르크에서 존내 패버린 것도 잘 알고 있을꺼야. 근데, 1914년 탄넨베르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러시아 무선통신을 독일애들이 모두 도청하는 걸 모르고 신나게 자기들 부대위치를 무선으로 나불거린 러시아 장군들 책임도 있어. 물론 잘 찾아보면 독일애들도 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선통신에서 마음 놓고 나불대다가는 incoming폴더 내용물까지 들킨다는 걸 잘 몰랐기 때문이지. 한편, 영국과 독일 해군은 무선통신을 잘못 사용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독일의 순양작전으로 숨바꼭질을 하면서 알게되었어. 그래서 대전중기 이후에는 양쪽 모두 무선전신을 조심스럽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