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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1차 중동전쟁, 6. 내전에서 전쟁으로

구쉬 엣 지온의 함락(5월 12일~13일)


작전 구역


구쉬 엣지온 함락 후의 유대인 포로들


크파르 엣지온은 예루살렘과 헤브론 사이 아랍영역 한복판의 전략적인 통로에 건설되어 있는 4개의 정착촌 집단을 칭하는 이름이다. 1947년에 이 지역에는 4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분리독립안이 발표된 이후에는 아랍측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어 1월 8일 정착지에서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소개하도록 허가되었다. 12월 7일, 벤 구리온은 이 지역에 팔마흐 연대를 파견하여 방어를 강화하도록 했으며 심각한 인명손실을 감수하며 마지막으로 보급차량이 도착한 3월 26일 이후로, 방어측은 완전히 고립되었지만 현위치 고수정책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5월 12일, 아랍군은 정착지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공격의 동기중에는 금수조치가 발효되기 전에 크파르 엣 지온을 통과하는 마지막 보급차량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정착지들이 압둘라의 주요 목표물 중 하나였던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부대배치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각주:1] 외부 방어선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5월 13일에 첫번째 키브츠가 함락되어 4명을 제외한[각주:2] [각주:3] 131명의 방어자들 중에 21명의 여성을 포함한 127명의 포로가 항복한 뒤에 학살당했다. [각주:4] 다른 3개 정착지들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처음으로 항복하고 파괴된 키브츠가 되었다.

크파르 엣지온에서 발생한 사건은 철수금지 정책이 비록 내전 기간중에 효과적으로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달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으로 더이상 고립된 유대계 정착지들이 정규군의 화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철수를 통해서만이 체포당하거나 살해당하지 않도록 정착민들을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각주:5]

요압 겔베에 의하면 크파르 엣지온의 함락과 학살은 하가나의 참모진 사이에서 부대를 예루살렘 내부에 직접 배치하는 것이 도시내의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벤구리온이 아랍연맹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 확보를 위한 직접적 투쟁을 벌이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벤구리온은 최종결정을 다비드 샬티엘(David Shaltiel)에게 남겨두었고, 예루살렘을 향한 전투가 바야흐르 임박하게 되었다.[각주:6]




키르손 작전(Operation Kilshon ; 갈퀴. 5월 13일~18일)


예루살렘의 영국 경계구역 중심, 베닌그라드


하가나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위임통치 말기에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각주:7] 첫단계로 동 예루살렘과 서 예루살렘 경계선 지역을 5월 13일부터 18일 동안에 점령하기로 계획을 세웠다.(키르손 작전) [각주:8]

예루살렘에서 영국군은 중심부에 위치한 라디오 방송국과 전화 교환 시설, 정부 청사, 병원과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노틀담 여관 등이 위치하고 있는 "베빈그라드"라 불리게 될 전략적 요충지들에 다수의 병영을 위치시켜 확보하고 있었다. [각주:9] 키르손 작전의 핵심목표중 하나는 이 지역을 영국군이 철수하는 시기에 맞추어 확보하는 데 있었고 5월 13일에 하가나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구역을 통제하에 넣고, 14일에는 영국군의 철수 스케쥴에 면밀하게 연계시킨 계획에 따라 우체국과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포함한 베빈그라드 지역을 04:00에 점령하는데 성공한다.[각주:10] [각주:11] 반면 기습을 당한 아랍군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각주:12]

키르손 작전의 두번째 목표물은 고립되어 있는 유대계 거주지역들 간에 연속적인 전선을 일제히 형성하는 것으로, 이를 위하여 전임 하가나 유럽 특사 다비드 샬티엘 준장은 400명의 하가나 병사와 600여명의 민병대를 배치했다. 성전군의 새 지휘관 에밀 구리도 이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6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두기는 했지만 특별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결국 하가나의 두번째 목표도 성공을 거두어 유대계 군대는 아랍인들이 밀집되어 있는 세이크 야라 지역을 점령하고 스코푸스 산으로 통하는 연결로를 확보하는 한편 미국계 유대인 정착지를 둘러싼 마을들을 점령했다. [각주:13] 남쪽에서는 알렌비 병영을 점령함으로써 탈피오트(Talpiot)와 라마트 라헬(Ramat Rahel)을 비롯한 독일계와 그리스계 정착지간 연결로를 확보했고, 팔마흐 연대는 시온 게이트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유대계 거주지와 연결로를 재확보하기까지 했다.[각주:14]

이 때문에 아랍군 비정규 병력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고 저항을 포기하면서 가망이 없는 상황으로 간주하고 도시가 곧 함락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각주:15]




벤아미 작전(5월 13일 ~ 22일)


작전 구역

달렛 계획의 근간에 따라 이갈 야딘은 다수의 유대계 정착지가 위치하고 있는 서부 갈릴리 지역으로 돌파할 계획을 세운다. 이 지역은 아크와 연결된 모든 도로가 분리안에서 아랍지역에 할당되어 있는 레바논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레바논 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에 해당했다. [각주:16]

이 작전의 지휘는 카르멜리 여단의 사령관 모세 카르멜에게 맡겨져서 2단계로 구성되었으며 5월 13일 저녁에 첫단계가 시작되어 하가나의 장갑차량과 수송용 트럭들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을 통해 지역으로 진입했다. 아랍해방군은 교전없이 도주했으며 작전은 5월 18일 아크가 점령되면서 일단락을 지었고,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작전 병력은 통로 상의 아랍계 마을들을 점령하고 파괴하면서 레바논 접경선의 예히암 키브츠까지 전진했다.[각주:17]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1948년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

하가나가 전쟁의 두번째 단계에서 공세로 나서면서 초기에 발생했던 10만여 명에 더해 30만명의 아랍계 피난민이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피난민"이라는 말은 보통 이 두번의 피난사건을 합쳐서 일컫는 것으로 이 사건은 다른 팔레스타인 관련 사건들보다 언론에 더 많은 관심을 얻었다. [각주:18]

피난민 발생사건의 책임과 원인에 관해서는 이 분야를 전공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심하게 엇갈리는 부분으로, 아랍당국의 피난 권고나, 이슈브 당국과 하가나의 추방에서 원인을 찾거나 내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랍 연합의 침공준비

1948년 2월 아랍 연맹의 최종 회담에서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해방군 만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사회에게 UN 분리안을 포기하도록 할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한 바 있었다. [각주:19] 다음 회담은 알-후세이니의 사망과 마쉬마르 하에메크에서의 패배로 명백히 상황이 변화된 4월 10일, 카이로에서 개최되었다.

회담에서 이스마일 사파와트는 다시 한번 아랍군을 팔레스타인 경계에 즉각적으로 배치하고 대규모 작전보다는 소규모 작전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아랍 지도자들은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각주:20]

시리아와 레바논은 즉각적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지만 압둘라 국왕은 아랍군이 즉각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고, 초조해진 아랍 연맹 사무총장은 압둘라가 영국의 명령을 맹종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둘라 국왕은 5월 15일 이후에는 팔레스타인에 병력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으며 그에 발맞추어 시리아는 이집트 군도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여 이집트 수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르쿡 국왕은 시리아의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팔레스타인을 도우려는 것보다는 요르단의 헤게모니 장악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각주:21]

나중에 팔레스타인 고위층이 암만을 방문한 자리에서 시리아와 아민 알 후세이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잠 파샤는 압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마일 사파와트를 암만에 보내어 아랍해방군과 요르단 군의 공조를 논의했고, 그 자리에서 작전이 총 지휘권이 압둘라 국왕에게 귀속됨을 명시했으며 이라크가 5월 15일 침공에 대비하여 1개 여단을 파견할 것이 결정되었다. [각주:22]

4월 26일, 트랜스요르단 의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의도"가 있음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고, 유대인들은 "압둘라 국왕의 정당한 통치 아래 초대"되었다. 이 선언은 유대계에게도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으나 이슈브는 이 선언을 선전포고이며 외교적인 방법으로 개입을 막으려고 했던 서방측에 대한 답변으로 받아들였다. [각주:23]

4월 30일, 요르단과 이집트, 이라크는 압둘라 요르단 국왕의 지휘권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 끝에 압둘라에게 "최고사령관(Commander-in-Chief)의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고 이라크 장군 알딘 누르 무하무드(Aldine Nur Mahmud)가 참모총장(Chief of Staff) 명칭으로 실질적인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단합된 외형에도 불구하고, 작전에 있어서는 각각의 군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것에 대한 동의도 이루어졌다.[각주:24]

5월 4일, 1개 탱크 연대와 1개 기계화 보병 연대, 24문의 화포, 1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이라크 기동부대가 마프라크(Mafraq)에 도착했다. [각주:25] 이집트는 2개 여단 700명의 병력을 시나이에 배치했고 [각주:26] 시리아는 레바논이 5월 10일 작전에 참가할 수 없다고 전해옴에 따라 추가 병력을 파견할 수 없었다.

그 2일전인 5월 8일, 영국 외무성은 아랍의 침공이 확실하다고 밝혔으나 요르단 군(Arab Legion)을 제외하고는 아랍군이 다가올 교전에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각주:27] 이집트 장교들은 자신들의 진군이 "위험도가 최소한에 불과한 군사적 퍼레이드"에 불과할 것이고 "2주 내로 텔아비브를 점령"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이런 방심때문에 군부대는 팔레스타인 지도조차 확보하지 않았고, [각주:28] 이스마일 사파와트가 절망상태에 빠져있는 것과는 달리 아랍국가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1948년 5월 15일, 아랍 연합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안전을 보장하고, 독립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의 자위권 확보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고 선언했다.[각주:29] 앗잠 파샤는 카이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전쟁은 몽골의 학살이나 십자군과 같은 반열의 것으로 회자될 절멸전이며 중대한 학살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각주:30]





결과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고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아랍연합군의 침공으로 새로운 단계, 제 1차 중동전쟁(1948 Arab-Israeli War)에 접어들었다.

  1. Yoav Gelber (2006), p.95 [본문으로]
  2. Yoav Gelber (2006), p.96  [본문으로]
  3. Official site of the kibbutz [본문으로]
  4. Benny Morris, The road to Jerusalem, p.139. [본문으로]
  5. Yoav Gelber (2006), p.96 [본문으로]
  6. Yoav Gelber (2006), p.96  [본문으로]
  7. Benny Morris (2002), pp. 155-156. [본문으로]
  8. Benny Morris (2002), pp. 155-156. [본문으로]
  9.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576 [본문으로]
  10.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580-582 [본문으로]
  11. Benny Morris (2002), pp. 155-156. [본문으로]
  12.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575-576 [본문으로]
  13. Benny Morris (2002), pp. 155-156. [본문으로]
  14. According to this Israeli site with confirmation from this map from the Passia organisation [본문으로]
  15. Yoav Gelber (2006), p.140 [본문으로]
  16. Yoav Gelber (2006), pp.134-135 Although the last (the Lebanese) ultimately would not engage in combat [본문으로]
  17. Benny Morris (2003), pp.252-254) [본문으로]
  18. See, for example, in the New York Times archives : : Despair is voiced by arab refugees [본문으로]
  19. Ilan Pappe (2000), p.147 [본문으로]
  20. Yoav Gelber (2006), p.120 [본문으로]
  21. Yoav Gelber (2006), p.120 [본문으로]
  22. Yoav Gelber (2006), pp.122-123 [본문으로]
  23. Yoav Gelber (2006), pp.124-125 [본문으로]
  24. Yoav Gelber (2006), p.127 [본문으로]
  25. Yoav Gelber (2006), p.126 [본문으로]
  26. Yoav Gelber (2006), p.128 [본문으로]
  27. Yoav Gelber (2006), p.126; p.132 [본문으로]
  28.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453-454] 침공 최종계획은 수립되지도 않았다. 영국 지휘관들은 외교적 접촉으로 아랍측의 결정을 돌이키려 마지막 노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footnote]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133 [본문으로]
  29. Arab League Declaration, May 15 1948 from jewishvirtuallibrary.com, retrieved September 26 2007 [본문으로]
  30.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132;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p. 219; Sachar, 1979, p. 33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