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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2차 중동전쟁, 1. 운하와 분쟁


제2차 중동전쟁 중, 시나이 반도에 참호를 파고 대기중인 이스라엘 군인들.


수에즈 분쟁 [각주:1] (The Suez Crisis,
Arabic: ???? ?????? - ??????? ????????; Hebrew: ???? ????)은 1956년 10월 29일부터 이집트 영토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연합국과 이집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각주:2] [각주:3] 1956년 7월 26일, 영국과 미국이 아스완 댐 건설 자금 지원을 취소한 보복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한 것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각주:4]


배경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 정부의 재정적 지원하에 1869년 개통되었다. 표면적으로, 운하는 이집트 영토의 일부였으며 수에즈 해운 운하 회사(정식명칭은 Compagnie universelle du canal maritime de Suez = the Universal Company of the Suez Maritime Canal) 또한 당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이집트 소속의 회사였다.

그런데 운하 건설 당시에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던 영국은 인도, 극동, 오스트레일리아, 뉴 질랜드 등에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과의 중요한 해상 연결로라는 점에서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가치에 점점 주목하기 시작한다. 1875년 영국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수상은 이 회사의 이집트 지분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당시 대부분, 프랑스 개인 투자자들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운하회사에 대한 부분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1882년, 이집트의 분쟁에 개입한 영국은 운하에 대한 사실상의 (de facto) 소유권을 획득하여 운하의 운영, 수익, 재정 부분을 총감독하게 되었다.

1888년의 콘스탄티노플 조약은 운하가 영국 보호하의 중립지역임을 선언했고 [각주:5]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국가의 선박이 운하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음에 동의했다. [각주:6]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에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여순(Port Arthur)에 일본이 기습공격을 가하자 러시아는 증원부대로 발틱함대를 파견하는데 영국은 이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가야 했고 일본 해군은 양 함대가 합류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각개격파를 달성할 수 있었다. [각주:7]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세계대전을 통해서 더욱 명확해진다. 1차 세계대전중,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국 이외의 선박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국의 일련의 군사행동이 이 지역에서의 영국의 독점적 지배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석유산업사가인 데니엘 예르긴은 다음과 같은 말로 수에즈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1948년, 인도가 대영제국에서 독립함으로써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전통적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였다. 동시에, 수에즈 운하는 제국통치망의 중추가 아니라 석유운송의 중추로서 새로운 전략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존재는 유럽으로 운송되는 석유운반로를 12,000km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5년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의 2/3는 유조선이었으며 유럽으로 운송되는 석유의 2/3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었다." [각주:8]

1948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종료되면서 영국군은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였으며 이스라엘은 UNSCOP(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의 분리독립안에 기초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아랍 연합이 UN 결의안에 의한 2국가 분리독립 승인을 거부하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주변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

1950년대 초

1950년대, 중동지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영국은 지역에서의 역학관계를 재조정 하고 있었다. 방대한 석유자원과 수에즈 운하는 냉전기에 중동의 가치를 급속히 상승시켰고 영국은 이곳에서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라크 왕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힘을 쏟고 있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상당수의 병력을 주둔하고 있었고 수에즈에는 약 8만여명[각주:9] 의 경비병력이 상주하여 세계최대규모의 병력 주둔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비록 이 때문에 전통적인 이집트-영국의 우호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이곳은 중동에서 영국의 국가전략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2차대전을 겪은후 이집트의 내부 정세는 경제적 불균형과 인플레이션, 고용불안 등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사회 불안이 심해지자 공산당이나 무슬림 형제당같은 급진적 정단단체들이 영향력을 확대하갔고 영국과 이집트 내부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에 대한 적대감도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영국에 대한 적대감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고, [각주:10] 이러한 상황변화는 이집트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었고 반 영국 정책이 이집트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51년 이집트 정부는 일방적으로 1936년에 체결된, 20년간에 걸쳐 영국에게 수에즈 기지를 임대하는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의 종료를 선언한다. [각주:11] 영국은 조약을 근거로 수에즈에서 철군하지 않고 다만 주둔병력의 규모를 감축하겠다고 답했으나 이후로 영국과 수에즈 주둔 영국군에 대한 이집트의 반응은 이집트 당국이 무간섭을 표방한 가운데 적대감의 강도를 더해갔다. 1952년 1월 25일, 영국은 분란을 일으킨 이스마일리아(Ismailia)의 경찰 주둔지역을 무장해제하였고 그 와중에 41명의 이집트 인이 사망했다. [각주:12] 이 때문에 카이로에서는 대규모 반 서방 폭동이 발생하여 11명의 영국인을 포함한 다수의 외국인이 사망하고 재산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각주:13] 이윽고 이 폭동은 반 이집트 왕정을 목표로 바뀌게 되었다.

1952년 7월 23일, 무하마드 나기브(Muhammad Neguib) 장군을 내세운 가말 압둘 나세르의 이끄는 "자유 장교단"이
영국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파로크 1세(King Farouk I)의 정부를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립적이고 아랍민족주의에 충실한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이집트의 정치적 지배세력이 되어 공화국을 수립했다.


혁명 이후

영국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의 친선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러한 교섭의 일부는 1953년과 1954년에 그 성과를 나타내었다. 1953년 이집트는 나일 계곡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그 대가로 영국은 1956년에 수단에서의 식민지배를 종식했고, 1954년 10월에 영국과 이집트는 수에즈 기지의 반환문제에 합의하여 20개월 이내로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기지 자체의 반환은 7년 후까지 보유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각주:14]

그러나, 영국과의 합의를 통한 관계개선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영국과 관계를 장기간 유지할 마음은 없었다. 수단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한 대신, 향후 2년간에 걸쳐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수차례 요구했으며 이 문제는 나세르에게는 1954년 그의 암살시도가 있을 정도로 혼란한 내부 정국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확실하지 않은 나세르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집트가 아랍권의 지도층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955년의 바그다드 조약은 영국과 우호적인 이라크를 중심으로 아랍권을 재편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오인케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에 도전하는 형태로 표출되었고 이것은 수에즈 운하 사태를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각주:15]


영국과 나세르 간의 불화

1955~1956에 걸쳐 나세르는 중동에서 영국의 의도에 반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실시하고 이것은 영국과 이집트 간의 적대도를 상승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세르는 "서방측의 방위조약들 대부분에 대하여 식민 정책의 일환이며, 아랍의 분열과 약화를 획책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문제들은 영국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각주:16] 또, 바그다드 조약을 영국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지역 재편의 의도로 판단하여 하시미트 왕가와 잠재적 경쟁관계에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친교를 추진하는 동시에 암만에서의 반대시위를 지원하였고, 1956년 3월에는 영국 출신의 유능한 요르단 군 지휘관 글룹 파샤를 해임하도록 후세인 국왕을 부추키는 등 영국의 중동정책을 혼란으로 몰고갔다. [각주:17]

그러나 영국에게 가장 뼈아팠던 것은 나세르가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함으로써 [각주:18] 무기체계를 전환하면서 부터였다. 이집트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200대의 탱크와 150문의 야포, 120여기의 미그 제트기, 50기의 제트 폭격기, 20기의 수송기에 15기의 헬리콥터를 비롯하여 수백대의 차량과 수천정의 현대식 소총, 기관총 등을 구입했다. 무기들은 즉각 배성송되었으며 대금의 지불은 12년에 걸쳐 이집트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면화를 수출하는 것이 계약이었다. 이집트가 확보한 무기의 양은 일찌기 아랍구나이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으며 시리아도 100대의 탱크와 100여기의 미그기를 포함한 수백개의 무기와 체코출신 훈련교관 및 군사원조단을 파견하는 것과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불가리아도 상당수의 지뢰 제거기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판매했으며 불가리아는 다시 4척의 구축함과 2척의 잠수함, 1척의 프리깃 함을 이집트에 판매하고 2척의 잠수함과 1척의 미사일 발사정을 시리아에 판매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무기 거래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이게 된 것 이상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무기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제공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미국의 긴장감도 높아졌다. 영국 내각도 상황을 주목하면서 앤소니 이든 수상이 나세르를 무솔리니에 비교하는 등 [각주:19], 영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운하의 국유화와 위기로 가는 길.

영국은 나세르의 혈기를 다독이면서 미국이 지원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당시에 워싱턴은 중동문제에 관하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근본적으로 이집트와 체결한 바그다드 조약에 의거하여 요르단에 반대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국의 중동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바그다드 조약은 근본적으로 영국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였고 "영국은 나세르 정부를 전복시키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체코와의 무기구매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했어도 이것이 나세르에게 도움이 된다면 용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각주:20]

한편, 이 위기를 더욱 확대시킨 것은 1956년 봄부터 여름에 걸친 시기의 일로, 5월 16일, 나세르는 반둥회담 이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중공을 승인함으로써 타이완에 호의적인 미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 미행정부의 반감을 샀다. [각주:21] 이 때문에 미국은 7월 19일, 아스완 댐 건설에 관련된 미국의 차관제공을 중지하겠다는 통보를 했고 이미 이집트 경제력의 한계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아스완 건설로 골머리를 앓게 된 나세르는 이에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로 맞선다. 7월 26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세르는 신중하게도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 [각주:22] 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집트 군이 수에즈 운하의 통제를 맡고, 운하를 국유화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연설을 통해 [각주:23]
영국계 자본이 지분의 44%를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제 중동에서 영국의 입지가 약화되었음은 명백해졌고, 대영제국 유지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수에즈 운하는 적대적인 외국의 소유가 되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수에즈 기지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반환한다면 이 지역의 문제에 조속히 대응할 수 없게 되는 점이었다. 영국은 미국이 압력을 가하여 나세르의 결정을 취소하기를 원했지만 미 행정부는 영국의 동기를 잘못 판단했을 뿐 아니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문제로 고심하느라 이 지역에서 일체의 실력행사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 프랑스와 연합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미국과 불화를 빚으며 영국-아랍 관계가 결정적인 파국을 맞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행하지 않다가 이 지역에서 영국의 위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인가 라는 딜레머에 빠지게 된 영국은 설상가상으로 내부적으로는, 1956년의 상황을 1930년대에 뮌헨 회담으로 나찌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과 비교하고 있던 보수당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제 영국은 절망적인 상태로 프랑스와 이스라엘과 군사협정을 통해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랍의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군사적 압력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하여 아랍권은 1950년대 초부터 일련의 경제 제재 조치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이런 제재 중에는 이스라엘의 주변지역을 모조리 봉쇄하여 모든 형태의 통신, 교통수단을 차단하려는 움직이밍 있었다.

아랍국가들은 항구에서 이스라엘 국적이거나 이스라엘을 향하는 모든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으며 만약 이스라엘의 항구에 들리려는 선박은 도착하기 전이나 후나 어떠한 항구에도 입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해운 무역은 거의 봉쇄될 상황에 놓였다.

또, 이스라엘을 경유했거나 착륙했던 어떠한 항공기도 아랍의 영공을 통과할 수는 없었으며 이스라엘 비자를 여권에받은 적이 있는 인물은 무조건 아랍국가의 입국이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랍 정부들은 사기업들이 이스라엘과 연관된 사업을 하는 것도 금지하였으며 다른 국가들도 금수조치에 참가하도록 압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1950년 7월, 이집트는 자국 항구를 통과하는 모든 선박의 선장은 모든 운송물의 최종 목적지를 밝혀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했고, 이 제한은 명백히 중립국 항구를 거쳐 이스라엘로 반입되는 물자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조치들은 이스라엘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각주:24] 이스라엘 경제는 여전히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각주:25]

"이집트는 파라오의 후손들, 이슬람의 전사들이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을 '정화'시켜야 한다. ... 우리는 이스라엘과 싸울 것이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우리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 나세르. 1955년 8월


"나는 이스라엘과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임무는 아랍세계에 반이스라엘 정서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의 증오는 매우 강력하며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협상과 대화의 여지는 없다. 협상의 여지는 '조금도' 있을 수 없다."

- 나세르. 1955년 10월 14일.


"종전협정이 발호된 이후, 지난 6년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에서는 1,843회의 무장 강탈 행위가 있었으며 1,339건의 무장충돌이 있었다. 이집트 군은 435회 영토을 침범하였으며 이집트 군은 172회에 걸쳐서 소규모 국경 충돌을 야기하였다. 이집트의 이런 일련의 군사적 행동들의 결과로 28명의 이스라엘 인이 사망하고 127명이 부상당하고 있다."

- 이스라엘 UN대사 아바 에단. 1956년 10월 30일.


한편, 나세르의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 국경선 근처에서 활동하는 아랍 게릴라(Fedayeen)들을 후원했다. 이집트 정보부는 아랍 게릴라들에게 군사훈련과 무기를 제공하면서 이들을 이용하여 적대적인 행동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영토내에서 사보타지와 살인을 자행했고 개중에는 요르단을 근거지로 하는 아랍 게릴라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반격에 나섰으며 이러한 준군사활동은 모두 1949년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행위였으나 UN 안보리에서 비난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뿐이었다. [각주:26] 이런 상황에서 양측의 적대감은 고조되었고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들과 주변 아랍국에 보복할 방법을 찾게 된다.

당시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 남부에서 아랍 게릴라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방위군은 195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가자 지구에 보복공격을 가했고, 아리엘 샤론이 이끄는 101 특수부대가 보복공격을 실시한 것이 다비드 벤구리온의 강경파와 모세 샤렛의 온건파 사이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영국-프랑스-미국 외교관계

자유진영의 세축을 이루는 미영프 삼국은 8월 1일, 영국 수상관저에서 영국 외무장관 셀윈 로이드(Selwyn Lloyd)와 주영 미국대사 로버트 머피(Robert D. Murphy), 프랑스 외무장관 크리스티앙 피노(Christian Pineau)가 참가한 자리에서 앞으로의 대처를 논의했다. [각주:27] 이후 영국 수상 이든 경과 프랑스 국무총리 가이 모렛(Guy Mollet)은 공조를 이루어 런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참모총장에 스톡웰 장군(General Stockwell)과 바요 제독(Admiral Barjot)을 임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이스라엘의 이집트에 대한 공격을 미루기 위해 1956년에 미국과 공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1956년 7~10월, 미국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양자간에 운하의 운영에 대한 국제회의를 주선하였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스라엘 과의 비밀 접촉을 통해 영-프 연합군과 공조할 현지 세력을 마련하고 미국의 핵우산을 무력화 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각주:28]



세브르 의정서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회사를 국유화한 후 3개월 동안, 이스라엘과 프랑스 영국은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서 회담을 가졌다. 3국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로 진출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이집트 군과 이스라엘 군이 상호간에 운하 16km 밖으로 에 주둔하고 이집트와 협상을 진행하여 중요지역을 이집트 군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서 운하지역의 경비를 영국과 프랑스가 중립구역으로 경비한다는 내용의 세부사항에 합의하였다.

이 협상에서 각국의 입장은 서로 달랐는데, 영국은 제국의 남은 부분들을 상실할 것에 노심초사 중이었고 프랑스는 나세르가 자국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가 석유의 주요 운송로로 기능해주기를 원했고 이스라엘은 운하를 통해 이스라엘의 선적을 재개하면서 남쪽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험하고 강력한 적대국가를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작전에 우선해서 영국은 미국인들과 신중히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당시 영국은 나세르가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 것 때문에 고심하는 미국이 결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지지하리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식민제국의 결정적인 패착이었음이 후일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수에즈 분쟁은 수에즈 전쟁 또는 1956년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흔히 3국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시나이 전쟁, 수에즈-시나이 전쟁, 1956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제2차 중동전, 수에즈 작전, 시나이 작전, 카데쉬 작전, 3총사 작전 등으로도 불리운다. [본문으로]
  2. Damien Cash "Suez crisis" The Oxford Companion to Australian History. Ed. Graeme Davison, John Hirst and Stuart Macintyre.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본문으로]
  3. Roger Owen "Suez Crisis" The Oxford Companion to the Politics of the World, Second edition. Joel Krieger, ed. Oxford University Press Inc. 2001. [본문으로]
  4. "Suez crisis"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Politics. Ed. Iain McLean and Alistair McMill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본문으로]
  5. Suez Canal. Egyptian State Information Service. Retrieved on March 18, 2007. [본문으로]
  6. Howard M. Sachar. A History of Israel from the Rise of Zionism to Our Time. Published by Alfred A. Knopf (New York). 1976. ISBN 0-394-28564-5. [본문으로]
  7. 이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어에 기술상 약간의 오류가 보인다.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도거뱅크에서 민간 선박(주로 영국 어선)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한 사건에 항의하여 러시아 정부에 함대의 항해 중단을 요구했으나 당시 제2태평양 함대(제1태평양 함대는 여순항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의 제1전대는 수에즈를 통과하지 못한 반면에 제2전대와 제3전대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본문으로]
  8. References Yergin Page 480 [본문으로]
  9. Darwin, J; "Britain and Decolonisation", page 207 [본문으로]
  10. "이슬람 교도들을 그토록 분노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없었을 것이다. .. 또, 영국에 대한 의구심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겪는 재앙이 영국의 "배신"에 의한 것으로 비춰지자 비난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게서 [본문으로]
  11. Butler, L.J.; "Britain and Empire", page 111 [본문으로]
  12. Darwin, J; "Britain and Decolonisation", page 208 [본문으로]
  13. 전게서 [본문으로]
  14. Butler L.J.; "Britain and Empire", page 112 [본문으로]
  15. Darwin, J;"Britain and Decolonisation", page 210. [본문으로]
  16. 전게서 [본문으로]
  17. Kissinger, H; "Diplomacy", page 529 [본문으로]
  18. Darwin, J; "Britain and Decolonisation", page 211 [본문으로]
  19. Daily Mirror interview [본문으로]
  20. Kissinger, H; "Diplomacy", page 528 [본문으로]
  21. 전게서 p. 529 [본문으로]
  22.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맡은 기사 [본문으로]
  23. 전게서 p. 530 [본문으로]
  24. Howard M. Sachar. A History of Israel from the Rise of Zionism to Our TimePublished by Alfred A. Knopf (New York). 1976. pp. 453-6. ISBN 0-394-28564-5. [본문으로]
  25. Israel's economic growth: success without security - MERIA Journal Vol. 6 No. 3 September 2002 [본문으로]
  26. Fedayeen. jewishvirtuallibrary.org. [본문으로]
  27. Le Canal de Suez et la nationalisation par le Colonel Nasser, Les Actualite Francaise - AF, 08.01.1956  [본문으로]
  28. French Minister of Defense archives ECPAD, La distribution de vivres a la population civile de Port Said et de Port Fouad, lors de l'expedition de Suez. MO56137A [본문으로]